설교

보편적 윤리의 지평 - 에스겔서 18:1~9; 21~23; 30~3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7-03 17:43
조회
6113
2022년 7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보편적 윤리의 지평
본문: 에스겔서 18:1~9; 21~23; 30~32



아주 흥미로운 에스겔서의 본문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본문말씀은 그 첫머리에 메시지의 요체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직도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 하는 속담을 입에 담고 있느냐? ... 너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 똑같이 나의 것이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이다.”(2~4절)
편의상 세 대목을 끊어 본문으로 삼았지만, 에스겔서 18장의 메시지 요체를 파악하기에 충분합니다. 두 번째 대목(21~23절)에서는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의를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말합니다. 세 번째 대목(30~32절) 역시 일관된 논리적 맥락 안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그 논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책임을 묻되, 의롭게 산 사람은 의롭게 산대로, 악하게 산 사람은 악하게 산대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누구든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옳은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요체는 아주 분명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 그 속담이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들에게 전가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나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각각 고유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어찌 그걸 혼돈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잘잘못의 책임을 철저하게 각 개인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개인 윤리의 정신입니다.

흔히 개인 윤리는 이른바 근대적 개인이 탄생한 이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어떻게 공동체 윤리가 압도적이었던 고대의 한 시점에 이와 같은 인식이 가능했을까요? 똑같은 취지의 말씀이 에스겔보다 약간 앞선 예레미야에게서도 선포되고 있는데(예레 31:29),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와 같은 메시지가 선포되었을까요?
에스겔이 예언을 선포한 때는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그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던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지켜주시리라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존재 근거인 국가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현실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자신들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달라지면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어째서 전세대의 잘못으로 후세대까지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전세대의 잘못으로 후세대가 고통을 겪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더 정확한 물음은 그 고통을 겪게 된 책임이 후세대까지 전가되는 것이 과연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해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 20:5~6) 그 전통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옛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예언자는 그것을 반복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그렇게 안이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신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명확한 대안을 찾고자 했습니다. 사제 출신이었던 만큼 옛 전통을 잘 알고 풍부한 학식을 갖고 있던 예언자는 단지 옛 것을 답습하지 않고 역사적 상황을 깊이 통찰하였습니다.
그 답으로 제시된 것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메시지의 요체는 너무 선명합니다. 명확하게 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의 책임 같은 것은 의미 없다는 이야기일까요? 각 개인은 그저 완전하게 독립된 존재일 뿐 사회적 관계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이야기일까요? 본문말씀 서두에서 넘어가 5절 이하의 말씀은 의로운 사람이 실천해야 할 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의를 뜻합니다. 철저한 공동체 윤리, 곧 오늘의 개념으로 말하면 사회 윤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산 위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 않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들에게 눈을 팔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않으며, 월경을 하고 있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사람을 학대하지 않으며, 빚진 사람의 전당물을 돌려 주며, 아무것도 강제로 빼앗지 않으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며, 돈놀이를 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으며, 흉악한 일에서 손을 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리며, 나의 모든 율례대로 살아 가며, 나의 모든 규례를 지켜서 진실하게 행동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6~9절)
하나하나 그 조목을 헤아릴 겨를은 없지만, 모든 조항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옳음을 추구하는 행동방식입니다. 공동체의 윤리, 곧 사회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개인의 책임은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음이 제기됩니다. 기왕의 집단적 책임의식과 에스겔이 새롭게 선포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책임의식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입니다. 기왕의 집단적 책임의 논리에서는 각 개인의 인격적 결단이 부각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집단의 일원일 경우 그 집단의 논리에 충실해야 하는 의무를 지닐 뿐입니다. 책임과 운명을 모두 공유해야 합니다. 반면에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논리는 각 개인의 결단과 공동체의 운명을 긴밀한 상호관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것은 기존의 공동체가 잘못되어 그 자체로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거나 각 개인에게 부당한 의무를 강요할 경우 공동체 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전망을 지향합니다. 여기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특정한 집단에서나 통용되는 특수한 윤리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윤리를 지향하는 뜻을 함축합니다.
이것은 명확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국가가 존속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었던 구심으로서 성전이 존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민족적 집단 안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족했습니다. 가시적인 공동체의 조건으로서 국가와 성전이 소멸되었을 때 예언자는 전혀 다른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마다 스스로의 인격적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새롭게 구성하는 공동체에 대한 전망입니다. 그것은 민족적 귀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실천이 결정적인 요건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이 점에서 사실상 바빌론 포로기 이후 형성된 ‘유대인’을 민족 내지는 종족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허구라는 견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슐로모 산드,『만들어진 유대인』).
에스겔은 기존의 민족적 정체성에 의존해 운명의 논리에 속박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 속박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날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희망을 선포한 것입니다. 물론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비전을 아주 인상 깊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말씀은 단지 민족적ㆍ종족적 한계에 갇힌 환상에 균열을 내고 보편적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전망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옳음을 향한 진정한 인격적 결단에 근거한 올바른 공동체에 대한 전망입니다.

전후 책임에 대한 논란이 한일관계 안에서 끊이지 않고, 그것이 양국간의 갈등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쟁점 가운데 하나가 전세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후세대가 이어받아야 할 까닭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본문말씀의 배경이 되는 문제 상황과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해자 집단이냐 피해자 집단이냐 하는 점이 다르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보편적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공동체를 재구성해야 하는 책임을 의식하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에서 다릅니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전후 책임과 관련하여 그 네 가지 차원을 말한 바 있습니다. 법적 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에 상응하는 책임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정치적 죄란, 국가의 특정한 체제를 지지한 경우뿐 아니라 그에 대해 저항했다 하더라도 그 체제가 빚어낸 과오를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뜻합니다. 이는 역사적 범죄를 저지른 국가 체제가 그 잘못을 청산하지 않고 존속하는 한 그 구성원들에게는 끝까지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환기합니다. 가해의 역사를 안고 있는 집단의 구성원은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집단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역시 결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인식입니다. 독일이 전쟁범죄에 대해 시한을 두지 않고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도 그에 따른 것입니다. 요체는 각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얼마만큼 책임의식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이 현대적 문제의식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두고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과거 집단의 운명의 논리에 매인 사람들에게 그 족쇄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삶을 누리는 희망을 선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에스겔이 선포한 메시지의 요체입니다. 백성이 살아갈 길을 찾는 데서 각 개인의 놀라운 각성을 일깨운 것입니다.
그 통찰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뼈아픈 고통을 동반한 물음을 통해 도달한 진실입니다. 역시 야스퍼스가 말한 인류 정신사에서의 차축(車軸)시대가 갖는 의미를 환기해봅니다. 원래 야스퍼스는 그 시기를 상당히 짧게 설정했지만,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은 조금 더 긴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대략 기원전 9세기경부터 기원전 2세기 사이가 그에 해당합니다. 그 시기는 오늘날까지도 인류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고 있는 중요한 각성이 이뤄진 시기로서, 동아시아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불교, 중동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의 기틀이 형성된 시기입니다. 지금까지도 인간은 그 시대의 물음에서 벗어나 있지 않고, 그 시대의 물음을 재해석하는 데서 지혜를 얻고 있다고 할 만큼, 그 시대의 각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시대 인류가 도달한 정신세계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 종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제의에서 윤리로 방향전환이 이뤄집니다. 둘째 종족적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 진정한 개인의 내면을 발견하는 깨달음이 본격화됩니다. 셋째 개인의 내면에 대한 발견은 곧 개인의 내면적 성찰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보편적인 정신세계가 형성됩니다.

오늘 에스겔서의 본문말씀은 그 빛을 보여주는 한 사례입니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그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지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의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자 동시에 세계 공통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진정한 삶을 누리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겉치레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나 제도에 매여 누군가를 정죄하며 악다구니를 쓰면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미숙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정말로 성숙한 인간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고상한 삶을 지향하는 데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진정한 삶을 누리는 세계를 향한 믿음으로 한결같이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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