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 경제윤리를 모색한 대작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6-07 20:03
조회
325
강원돈, 『기독교경제윤리론』, 동연, 2024, 1232쪽, 출판기념회
2024년 5월 23일(목) 오후 5시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한국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 경제윤리를 모색한 대작
-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1. 기대했던 경제윤리 대작의 탄생

3년여의 저술 끝에 마침내 대작이 완성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강원돈 교수가 번역한 아르투르 리히(Arthur Rich)의 『경제윤리 1·2』 (한국신학연구소, 1995)를 통해 경제윤리의 방법과 그 방향을 공부할 수 있었던 입장에서, 한국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 상황에 걸맞는 경제윤리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제를 수행하는 데 강원돈 교수가 최적임자라는 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집필 계획을 들었을 때 마땅히 필요한 작업이라는 데 전폭적으로 공감하였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하는, 아니 오히려 처음 기대를 넘어설 정도의 대작이 탄생하였다. 우선 이를 축하하며 기쁨을 함께한다.
좋은 저술은 서문과 목차만 훑어보아도 그 전모를 가늠할 수 있다. 무려 1,232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서문을 읽고 목차를 일일이 훑어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압도당하는 느낌과 함께 조금 숨 막힐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선 윤곽과 요지가 선명하게 파악되었다. 일주일에 걸쳐 완독하고 났을 때 과연 수미일관한 논리체계를 갖춘 방대한 저작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방대하면서도 치밀한 체계와 논리를 갖춘 저작이다. 전체적으로 숲을 조망하면서도 나무 하나하나를 동시에 살펴보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경제윤리에 접근하면서 다뤄야 할 모든 영역과 주제를 가능한 한 모두 포괄하는 성격을 지니면서도 하나하나의 사안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집중력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이 저작의 문제의식은 서문의 첫머리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시장경제는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사회적 가난을 물리치고 화폐자본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을까?”(8) 저작은 이 과제를 ‘전망을 갖는 현실주의’ 입장에서 수행하며(11), 그 목표를 ‘경제민주주의’로 설정하고 있다(13). 이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전망을 지향하지만 시장경제의 조건 안에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하는 입장을 뜻한다.
우선 이 저작이 표방하고 있는 ‘경제민주주의’의 의의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민주주의’ 또는 ‘경제민주화’ 개념은 제법 널리 통용되어 왔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제1호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실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도 그 공약의 효과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당시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김종인의 아이디어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 경제민주화의 실질적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대·중소기업 상생과 공정경쟁 등이 그 핵심 요체였다. 이는 물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규범에 근거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규정하고 있다(제119조 2항). 시장의 지배력 남용을 방지하여 경제주체간 조화와 균형을 이룸으로써 국민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이뤄내면서도 적정한 소득분배를 실현하려는 취지이다. 여기서 경제주체간의 조화와 균형은 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 조건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김종인이 제안하고 박근혜가 표방한 경제민주화 개념 역시 그 한계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 저작이 표방하는 경제민주주의는 명확하게 그 한계를 넘어선다. 이 저작은 경제민주주의를 “자본의 노동 포섭을 해체하는 것이고, 그것은 노동과 자본의 권력관계를 재편성해서 노동자들의 참여와 결정을 최대화하고 시장경제를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하는 일”(254)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본의 독재를 철폐하고 자본과 노동의 균형을 이루는 것을 요체로 한다. 그것은 자본의 노동 포섭으로 자본의 무한한 축적과 팽창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가난과 생태계 위기의 중층적 결합을 해체하는 첫걸음이 된다(254). 이 저작은 “사회적 가난을 불러오는 바로 그것이 생태계 위기를 불러일으킨다.”(175)는 점을 분명히 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달리 말하면 “생태학적 정의와 사회정의를 동시에 실현하는 방식으로 시장경제를 규율하기 위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방안을 모색”(250)하는 것이 이 저작의 목적이다. 이 저작은 “경제 활동이 경제계와 생태계 사이의 에너지-물질 순환 과정이라는 통찰”이라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172), 수미일관하게 경제민주주의의 영역과 과제들을 다룬다.
왜 경제민주주의일까? 저자의 그 입장에 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경제민주주의 개념이 자본의 독재를 철폐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자본의 역할을 전제하는 가운데 그 자본과 노동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소유권과 노동권의 상호 불가침성과 더불어 양자의 균형을 추구하는 논거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497). 왜 자본의 독재가 아니라 자본 자체의 철폐, 소유권과 노동권의 균형이 아니라 소유권의 철폐를 주장하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이 저작 자체 안에서도 현실을 분석하는 데 마르크스의 주요 개념들과 방법이 적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결이 자본을 넘어선 사회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자본을 전제하는 경제민주주의인가? ‘물(物)의 신학’을 제창할 때부터 강원돈 교수의 저작 활동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라면 대번에 드는 의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전망을 갖는 현실주의’(11) 또는 ‘지속적 개혁주의’(82) 개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자본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생활력이 지속되는 현실 가운데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생활력이 지속되는 조건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아예 자본의 독재가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전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전망을 바라보며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탐색하려는 입장인 것이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공공기금을 제외하고 자본의 투자분과 노동자의 몫을 구분했을 때의 입장과 상통한다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경제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초월해서 사회주의를 선취하려는 시도일 뿐, 자본주의를 초월한 제도에 관한 구상이 아니다”(313). 분명히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되, 자본주의 그 안에서 선취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3. 기독교경제윤리론의 개요

사회적 정의와 생태학적 정의를 두 기축으로 하는 경제민주주의를 이루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저작은 먼저 제1부에서 경제윤리의 방법과 의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기독교경제윤리는 경제제도의 규율을 위해 사회과학적 현실 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매개하는 관점과 방법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이를 메타 이론의 수준에서 검토한다는 점에서 신학과 사회과학과 철학의 협업이 필요한 학문이다”(9).
기독교경제윤리는 보다 바람직한 제도를 추구하는 기독교사회윤리의 한 영역이자 나아가 신학의 한 영역이다. 그것은 현실분석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가치 규준으로 그것을 판단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여기서 현실을 판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가치 규준은 고유한 신학적 근거로 뒷받침된다. 현실을 분석하는 데서는 사회과학적 방법이 요구되며, 가치 규준을 형성하는 데는 신학적 근거 설정과 더불어 보편적 가치들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숙고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 점에서 기독교사회윤리는 사회과학, 철학, 교의학과 성서학 등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적 신학의 성격을 띤다. 이 저작은 그와 같은 기독교사회윤리, 더 구체적인 분과로서 기독교경제윤리의 방법과 얼개를 서설에서 다루고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신학적 근거에 관한 논의는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야말로 저자의 말대로 ‘빙산의 일각’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사회윤리의 필수적 요소로서 신학적 근거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매우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작 자체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신학적 논거를 다루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소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경제윤리 규범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신학적 논거가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저작이 제시하는 경제윤리 규범으로서 참여의 원칙, 생태계 보전의 원칙, 정의의 원칙, 인간존엄성 보장의 원칙은 확고한 성서적·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어지는 경제윤리의 본론은 제2부 시장경제의 근본 문제, 제3부 경제민주주의의 개념과 실천의 역사, 제4부 시장경제의 생태학적 규율, 제5부 시장경제의 사회적 규율을 다루고 있다. 이 저작이 추구하는 경제윤리의 목표로서 경제민주주의의 개념과 역사를 오늘의 시장경제 상황에서 다루는 부분으로서, 사실상 저작의 요체에 해당한다.
그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시장경제 조건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6부 토지공개념과 지대공유제, 제7부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기본소득 구상, 제8부 재정과 금융의 민주화, 제9부 달러 패권체제의 종식과 대안적인 세계통화금융제도, 제10부 금융화의 대안, 제11부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세계무역체제의 규율이 그것이다. 이 내용들은 이 저작이 경제윤리의 과제를 지구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지평 안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안마다 내재된 쟁점들을 세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작이 방대해질 수밖에 없는 사연을 공감하게 될 것이다.
누가 이렇게 방대한 체계를 구성하고 그 체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주제들을 이렇게 꼼꼼히 다룰 수 있을까 하는 경이감을 자아낼 정도이다. 그래서 오히려 또 다른 문제의식을 촉발하기도 한다. 과연 충분한가 하는 물음이다. 특정한 주제로 한정되었다면 오히려 물음 또한 자제될 수밖에 없지만, 실로 모든 영역과 주제를 총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제기되는 물음이다.
이 저작은 현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저자가 정립한 윤리적 규준을 적용하여 평가하기에 앞서 어떤 특정한 인식과 개념 등의 사상사적 맥락을 짚어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다. 이 점에서 이 저작은 학습자나 연구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으며, 때로는 논쟁사에 관한 백과사전과도 같은 성격까지 지니고 있다. 빛나는 여러 대목이 있지만, 제4부 시장경제의 생태학적 규율을 다루는 데서 특히 오늘 생태계의 위기 원인을 사상적 맥락에서 짚고 있는 것(347)도 돋보이는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근대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고 있다. 그 맥락에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명제를 말하고 있다. “경제계가 생태계 안에 자리를 잡은 개방계이고, 생태계와 경제계 사이에서 에너지-물질 순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주류 경제학에서 전혀 인식되지 않았다”(351). 이는 주류 경제학과는 다른 경제학을 구성하고 있는 이 저작의 고유한 관점을 잘 집약하고 있는 명제일 것이다.
여기서 번득 드는 물음이 있다. “경제계가 생태계 안에 자리를 잡은 개방계이고, 생태계와 경제계 사이에서 에너지-물질 순환이 이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에 기초할 때 생태계로 표현되는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아가 이 저작은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적 형식까지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54). 이쯤 되면 오늘 자연 또는 물질을 그저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데서 벗어나 그 능동성을 인정하는 신유물론의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저작은 과거 근대적 자연관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는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지만, 새롭게 대두되는 자연관에 대해 명시적 언어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저작이 자연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이 새롭게 대두되는 자연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시적으로 밝혔더라면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하지 않았을까?
이 저작을 읽는 동안 정작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가 있다. 이른바 계획경제로 알려진 구 사회주의권의 실험은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의 한 시도로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 관리를 하나의 모델로 평가하고 있고, 또한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 현실 안에서 중국 등의 역할에 대한 기술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일종의 야심찬 역사적 기획으로서 사회주의의 실험에 대한 평가가 동반되었더라면 경제윤리론으로서 더욱 완성도 높은 저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구 사회주의권에서 보다 전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소비에트식 경제원리, 또는 중국의 인민공사의 작동원리 등도 검토대상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모델들이 검토되지 않은 것은 역시 경제민주주의라는 개념의 제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더욱 방대한 분량으로 다뤄져야 할 과제이기에 포함하기 어려웠던 탓일까? 시장경제와는 구별되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모델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더 보완되었더라면, 시장경제 조건 안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4. 신학적 저작이자 기독교 사회과학으로서의 의의

‘기독교경제윤리’라는 점에서 먼저 신학적 차원에서 저작의 의의를 생각해 보고 싶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저작은 강원돈 교수의 신학 여정을 한 매듭 짓는 소중한 결실이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서 일관된 문제의식을 따라 집요하게 탐구해 온 경제윤리의 방대한 집대성이다. 향후 또 다른 연구가 이어지겠지만, 이번 저작은 한국적 상황에서 시작하여 지구적 자본주의 시장경제 상황 가운데서 형성하여야 할 기독교 경제윤리의 여러 차원을 포괄하고 있다. 기독교 경제윤리, 곧 신학적 경제윤리로서 이 책은 오늘 우리 시대 신학하는 방법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한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윤리적 판단 규준을 설정하고 제도적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신학이 역사적 현실 가운데서 어떤 임무를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기독교 사회윤리의 한 방법을 성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지만, 신학의 한 분과로서 사회윤리 영역을 넘어 모든 신학이 지향해야 할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 저작은 한국 민중신학의 중대한 성취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신학적 근거에 해당하는 논거의 표출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라고 할 만큼 절제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저작의 신학적 밑바탕은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이라는 점을 저자 역시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민중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민중신학의 성찰 또한 깊어 갔지만, 동시에 민중신학을 둘러싸고 중요한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 젊은 신학도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종종 해방신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탄탄한 사회과학적 방법의 수용과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선택 등이 그 핵심 쟁점이었다. 그 점에서 해방신학은 분명한 뚜렷한 성취를 보이고 있는 반면 민중신학은 모호한 것으로 여겨졌다. “정치경제학적 현실분석과 신학적 성찰의 결합을 방법론적 기축으로 삼은 해석학의 일반이론”으로서 ‘물(物)의 신학’은 그 문제 제기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신학적 시도였다. 그 ‘물(物)의 신학’이 자본의 생활력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망을 갖는 현실주의’ 형태로 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안병무 선생이 말했던 ‘살림’과 ‘공’(公)의 상상력을 넘어 구체화한 전망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해방신학의 성취를 넘어서는 민중신학의 한 성취로 평가할 만하다. 선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수용한 해방신학이 일종의 ‘자본의 형이상학’에 치중된 경향을 띠고 있다면, 이 저작으로 민중신학은 종말론적 지평을 전제하면서도 자본의 독재를 넘어선 구체적인 대안을 지향하는 신학으로서 면모를 확실히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종 서구신학자들에 의해 민중신학으로는 형성의 윤리가 불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크리스티네 린네만-페린, “교회의 정치적 책임”, 안병무박사고희기념출판위원회 편, 『예수·민중·민족』,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그 평가를 무색하게 하는 성취이다.
그 점에서 이 저작은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경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설정하는 데도 중요한 참고서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잘 알다시피 세계 교회 차원에서는 특별히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당대의 세계 경제질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더불어 대안을 제시하는 문서들을 꾸준히 내놓았다. 그것이 곧바로 정책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의 경제질서와 그 현상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판단 규준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경우 경제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간헐적일 뿐 아니라 그저 단기적 시의성을 지니는 문제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오늘과 같이 지구적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폐해가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적 생명과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적 대안을 교회의 입장에서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이 저작은 그러한 형편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릴 뿐 아니라, 교회가 적극적으로 사회를 향하여 경제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 때 중요한 참고점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일종의 기독교 ‘사회과학’으로서 이 저작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이미 앞서 말했듯이, 이 저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제기되는 전반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분석하고 사회적 정의와 생태학적 정의를 기축으로 하는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들이 쟁론하고 있다. 이 저작은 그 쟁점들을 비켜 가지 않는다. 가능한 한 친절하게 논쟁 구도를 드러내 주고, 이에 대해 저자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 전개 방식은 저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사안의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가운데 이치에 맞게 판단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당연히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언제든 다시 펼쳐보며 되새겨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준다.
사회과학도의 입장에서는 이 저작이 과연 합리적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요건에 부합하는지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저작은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윤리’에 해당한다. 이는 합리적 과학으로서 경제학에서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주류 경제학이 신봉하는 신화를 타파하고 경제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접근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과 구별되는 본래적 이성에 부합하는 탐구이다(222). 도구적 이성에 지나지 않은 “경제적 합리성이 절대화되면, 그것은 경제의 영역과 체제를 넘어서서 인간 생활의 나머지 모든 영역과 부분 체제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224). 따라서 시장경제체제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이성적 규율이 요청되며, 경제적 합리성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제 역할을 맡는 것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요컨대 현실분석과 가치판단은 그 수준이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현실분석에서 가치판단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저작은 사회적 정의와 생태학적 정의를 내세우며 시장경제체제를 민주적으로 규율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경제의 목적과 기능, 그리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해 주고 있다.


5. 덧붙이는 이야기

번역서가 아닌 우리말로 저술된 저작으로서 가독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대개 이런 류의 책은 번역서로 읽는 데 익숙했는데, 이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경이감을 느꼈다. 방대한 분량 탓에 일독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인내심을 동반하기는 하였지만, 물 흐르듯 흘러가는 느낌으로 정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저작 원본 자체가 우리말인 탓일 것이다. 물론 강원돈 교수의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엄밀한 개념 설정에 체계적인 논리 전개 방식이 일상 어법을 벗어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연구 저작이라면 엄격한 개념과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요건을 갖출 때 연구 저작으로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기도 오히려 쉬워진다. 촘촘한 벽돌쌓기로 정교한 구조물을 갖춘 듯한 강원돈 교수의 글은 그 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글은 아니다. 그래도 어렵다면 그것은 다루는 주제 자체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이 저작에서는 예컨대 특별히 오늘의 금융 자본주의를 해부하는 대목에서 아마도 누구나 그 어려움을 느낄지 모르겠다.
끝으로 이 저작이 의도하는 마지막 말을 환기하고 싶다. “경제는 불변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 경제는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 아니다. 경제는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 만들어가는 제도다. 시장경제는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규율될 수 있다. 시장경제는 작은 사람들을 가난에서 해방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1176).
이 저작은 오늘 우리 시대의 기원을 해부하며 그 대안을 제시할 뿐 아니라, 사실상 신화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과학을 참칭하며 그 대안 모색을 가로막는 주류 경제학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친다. 이 결구는 저작의 그 성격을 단호하게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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