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정당한 상속자인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6-18 23:46
조회
457
새길&제3시대 여름학기공동강좌 / 2024년 6월 18일(화) 오후 7:00시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아래로부터 함께, 그리스도교적으로 평화에 대해 생각하기”
제3강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은 해방되리라”에 대한 논찬을 대신하여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정당한 상속자인가?
-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위하여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1. 제국주의 유산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름 때문에 사람을 이토록 골치 아프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모리드 바르구티,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수아드 아미리 외, 『팔레스타인의 눈물』, 도서출판아시아, 2006, 147).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참담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짧게는 77년(1948년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 기점부터), 길게는 10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지만, 그 비극적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연 어떨까? 많은 경우 종족간 뿌리 깊은 갈등의 한 현상으로 바라보거나, 조금 더 나아간다면 아랍 민족주의와 시온주의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중동’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에 해당하는 그 사태는 그와 같이 모호한 일반화로 해명할 수 없는(에드워드 사이드,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김영사, 2001, 229) 분명한 역사적 기원에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종족적·종교적 갈등 양상이 겹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근본적인 갈등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하랄트 뮐러, 『문명의 공존』, 푸른숲, 2000, 112). 팔레스타인 문제는 1948년 시온주의를 따르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강점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촉발되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강점 배경에는 현대 서구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배어 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 운동을 불러일으킨 시온주의 운동의 태동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며 동시에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배경 역시 서구 제국주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대인과 아랍인, 이스라엘 정권과 아랍 정권들 사이의 관계 역시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규율하에 놓여있는 점도 팔레스타인 문제가 단순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하는 팔레스타인 민중과 제국주의와의 숙명적 대결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필립 마플릿, 『팔레스타인의 저항: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책갈피, 2021, 참조).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구조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이었다. 선진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대개 자본주의적 체제에 동화되어 있었지만, 후진 동유럽에 자본주의가 침투함에 따라 봉건 경제구조에 의존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개되면서 발생한 대중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공격 표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형성된 유대 민족주의의 완성 형태가 바로 시온주의였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고, 그 귀착지로 선택된 곳이 성서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었다. 옛 조상들의 땅이라 여겨진 곳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목표는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과 후원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모순적 성격이 배태된다. 유럽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시온주의 운동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구체화한 방안에는 바로 그 유럽 사회의 모든 특징이 들어 있었다. 바로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성격이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후원에 의존하던 시온주의 운동의 분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영국의 선택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게 된다. 밸푸어 선언으로 가시화된 제국의 후원 약속으로 독립국가의 염원을 안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땅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만 이미 100만 명에 이르는 아랍인들이 있었다. 또 다른 독립국가 건설 후원 약속을 받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유대인의 이주는 분쟁의 화근이었다. 게다가 현지 아랍인들과는 구별되는 경제구조를 고수한 유대인들의 정착촌은 처음부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공명정대한’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시온주의에 기울어 사실상 유대인과 아랍인을 차별하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고양된 아랍 민족주의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아랍인의 대규모 항쟁이 실패로 끝난 후 피폐해진 아랍 사회를 대체하는 세력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오히려 급성장하게 된다. 수에즈 운하에 대한 확실한 통제와 걸프 유전 지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영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소요를 무마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세력의 분리 공존을 표방했지만, 점차 강력해진 유대인 세력 편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퇴조와 더불어 시온주의 운동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된다. 새롭게 영향력을 확보한 미국 제국주의가 그 파트너였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물러간 자리에 미국은 기민하게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석유 발견은 미국이 중동에 대한 지배력 확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후 새롭게 형성된 냉전체제는 미국에게, 소련을 배제하고 중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은 중동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인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중 급성장한 미국내 시온주의 운동의 영향력 또한 영국을 대신한 미국을 강력한 파트너로 삼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 애초 친유대인 정책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랍 세계에서의 역효과를 염려하여 미온적이었던 미국은, 안정적인 동맹국이 없는 중동에서 친서방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시온주의 운동의 요구에 결탁한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 흔들리지 않는 협력체계의 기틀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의 통과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은,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커넥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및 아랍 민중들에게 중대한 기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은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를 통합하는 독립국가를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려는 원칙을 폐기할 것과 독립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결정할 때까지 시온주의자들의 이주 중단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은 그와 같은 요구를 가볍게 묵살해 버린 결과였다. 그 결과 험난하고 지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2. 유대 민족 귀환 신화와 기독교 신학의 공모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또한 현재진행형으로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정착 식민 운동’(일란 파페,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24)이라는 점에서, 그 해법 또한 그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벌어진 현재의 사태만을 문제시하는 시선으로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엄연히 원주민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 식민지’로서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로부터 이어지는 참혹한 폭력적 지배의 현실을 고려할 때 그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그야말로 일관된 ‘제거’와 ‘인간성 말살’의 논리(일란 파페, 앞의 책, 113)로 점철된 점령 정책을 간과하고서는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이를 신학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그 부당한 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신학이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뜻한다. 신학적 접근을 시도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시온주의’의 문제이다. 시온주의는,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의 땅’에 귀환하여 자신들만의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오늘날 시온주의는 단순히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정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서 시온주의 운동이 처음부터 유대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해 그 원형이라 할 만한 ‘시온에 대한 열망’은 백성의 거듭남을 지향하는 종교적 이상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약속의 땅’으로의 실제적 귀환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제창되었을 때 유대교의 많은 분파들은 본래의 이상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강력한 정치적 동기를 지닌 이념으로 부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실상 시온주의의 선구 테오도르 헤르츨의 경험이 말해주듯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 박해 경험 때문이었다. 헤르츨은 처음에는 정치적 시온주의에 무관심하였으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만의 조국을 바라는 시온주의로 선회하였고 그 선구가 되었다. 이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유럽 사회의 유대인 박해라는 강력한 외적 동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시온주의의 모체가 유대인들의 그것에 앞선 기독교의 시온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천년왕국을 믿는 이들은 그 성취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메시아의 재림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이전 유대인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그 믿음 자체로 반유대주의의 표현이었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의 구원을 증명하는 반증으로서 남아 있던 유대인은 끝내 기독교 세계 안에 통합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침내 유대인이 천년왕국 도래와 더불어 이뤄질 심판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뜻하였다. 귀환한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인지 완고하게 유대인으로 남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는 그들의 몫일 뿐이었다.
유대인의 귀환은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도 부합했다. “나는 유대인이 동화될 수 없으며, 어디에 있든 항상 국가 안에 국가를 세우리라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쫓겨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간단하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 원수였던 샤를조제프 라모랄의 말이다. 이는 시온주의를 형성한 사상이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 왔던 반유대주의와 분명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일란 파페, 앞의 책, 55). 그것은 유럽 사회 편에서 볼 때 유대인 추방의 정당한 근거였다. 유럽 열강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특별히 중동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던 영국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유대인 국가는 오스만투르크와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마침내 1917년 유대인 국가의 지원을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와 같은 일련의 맥락 가운데서 애초 반유대주의와 연결된 시온주의 사상은 이제 거꾸로 유대인의 자기 결속의 이념으로 변화되었다. 더불어 명확하게 실현가능한 정치적 운동으로 변화하였다. 나치 독일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그 운동은 더욱 강력한 동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귀환한 땅이 ‘임자 없는 땅’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현지 원주민과의 필연적인 갈등이 예견되는 상황이었지만, 유대인의 귀환이 결정된 이래 그 문제는 진지하게 다뤄진 적이 없다. 적어도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주민에 의한 정착 식민화의 시도는 포기된 적이 없다. 그것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시온주의를 배태하고 자극한 기독교 신학의 공모는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서의 서사는 의심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 전제하에 이뤄진 성서 해석은 유대인의 귀환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죄의식 탓이었을까? 유럽과 북미의 주류 신학계에서 이를 의심하는 해석은 쉽사리 수용될 수 없었다. 이를 더욱 확고히 입증하는 방편으로 성서 고고학이 동원되었다. 성서의 서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고고학적 발굴이 시도될수록 성서의 서사와 고고학적 증거 사이의 일치보다는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늘날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eology)보다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Syro-Palestinian Archeology) 또는 ‘레반트 고고학’(Levantine Archeology)이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것도 그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성서의 서사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예컨대 장엄하게 묘사된 출애굽 사건의 실체는 모호했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제국으로서 유대 국가 또한 그 존재가 의심받게 되었다.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고대 왕국 시대부터 유일신 신앙과 유대인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전제도 의심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1980년대 이래 일군의 ‘신역사학자들’(New Historians)이 등장하게 되었고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표적 저작으로 이스라엘 핑컬스타인(Israel Finkelstein)과 닐 애셔 실버먼(Neil Asher Silberman)의 The Bible Unearthed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까치, 2002), 키스 W. 휘틀럼(Keith W. Whitelam)의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이산, 2003), 슐로모 산드(Shlomo Sand)의 The Invention of Jewish People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일란 파페(Ilan Pappe)의 Ten Myth About Israel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역사학파의 연구에 기초하여 우리말로 저술된 저작으로 정의길의 『유대인, 발명된 신화: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한겨레출판, 2022)도 주목할 만하다.
이 연구 결과들은 유대인 귀환의 근거로서 고대 유대인의 정체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후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다시 고토로 되돌아온다는 논리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종족적·민족적 정체성을 전제로 하며, 더불어 그들이 떠난 고토에 유대인들이 사실상 남아 있지 않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신역사학파는 유럽 등으로 흩어진 유대인이 종족적·민족적 집단이라기보다는 개종을 통해 확산된 종교집단으로 이해한다(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이들을 민족집단으로 볼 수 있다면 유럽 사회에서 민족주의 열풍과 더불어 일어난 시온주의를 통해 비로소 민족의식을 형성한 그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 국가 멸망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이 아예 사라진 것일까? 유대 국가 멸망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은 본토에 남아 역사의 부침 속에서 변모하였다. 유대교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유일신교를 믿는 몇 집단으로 분화하였고 이슬람제국 지배 이래 다수가 무슬림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원주민의 후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오히려 고대 유대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이해에 따르면 귀환을 정당화하는 믿음 자체가 일종의 신화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신화에 근거한 믿음과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제거’와 ‘인간성 말살’의 논리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국가적 정책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건국 70주년을 맞이한 2018년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표방하는 기본법을 채택하였다. 기본법의 하나로 제정된 ‘유대 민족국가 기본법’(Basic Law on the Jewish Nation-State)은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조국이며, 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지닌다”고 규정했다(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 한겨레출판, 2022, 4). 아예 인종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표방한 것이다.
그 경로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이미 형성된 유대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주민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기초 위에 성립되는 것이라면 과연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현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가당치 않은 이야기이다.
3. 인종주의와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성서를 해방하기
‘신역사학파’는 대개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학자들로, 이들은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책임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 성과는 그간 강고하게 자리 잡은 성서학과 신학의 중요한 전제들을 재검토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고 있다.
기독교 신학이 그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그것은 성서를 보편적 구원의 전망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배타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오용되도록 방치할 것이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의 진실성은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벽이 나팔소리에 무너지고 다윗이 팔매 돌로 골리앗을 죽인 것 등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충실한 역사적 ‘증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서사시의 위력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 평등의 추구 등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설득력이 강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서 우러나온다. 성경은 모든 인간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깊은 의식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이스라엘 핑컬스타인 & 닐 애셔 실버먼,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368).
“내가 믿는 신이 타자를 포용하고 나만큼이나 그들을 돌보는 신이 아니라면 이 신은 우리 모두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우주의 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 종교가 각자의 신학적 근거에서 그 안의 폭력과 테러를 비판하고 신이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 평화, 사랑, 자비, 긍휼의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강력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는 하나님이나 우리 주변의 이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낡은 신학체계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이며, 우리의 종교는 오늘날 우리 세계의 고질적인 문제해결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되고 진실한 신은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화의 신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기뻐할 수가 없다.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 또한 기뻐할 리가 없다. 억압받는 사람은 자유로워져야 하고, 지배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은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억압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포함된다.”(Naim Ateek, “진정한 종교의 시험대로서의 해방신학”, Sabeel Ecumenical Liberation Theology Center, July 2020 / 기사연 도시에 제1호, 2024.6.18.)
“아래로부터 함께, 그리스도교적으로 평화에 대해 생각하기”
제3강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은 해방되리라”에 대한 논찬을 대신하여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정당한 상속자인가?
-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위하여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1. 제국주의 유산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름 때문에 사람을 이토록 골치 아프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모리드 바르구티,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수아드 아미리 외, 『팔레스타인의 눈물』, 도서출판아시아, 2006, 147).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참담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짧게는 77년(1948년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 기점부터), 길게는 10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지만, 그 비극적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연 어떨까? 많은 경우 종족간 뿌리 깊은 갈등의 한 현상으로 바라보거나, 조금 더 나아간다면 아랍 민족주의와 시온주의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중동’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에 해당하는 그 사태는 그와 같이 모호한 일반화로 해명할 수 없는(에드워드 사이드,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김영사, 2001, 229) 분명한 역사적 기원에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종족적·종교적 갈등 양상이 겹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근본적인 갈등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하랄트 뮐러, 『문명의 공존』, 푸른숲, 2000, 112). 팔레스타인 문제는 1948년 시온주의를 따르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강점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촉발되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강점 배경에는 현대 서구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배어 있다.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 운동을 불러일으킨 시온주의 운동의 태동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이며 동시에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배경 역시 서구 제국주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대인과 아랍인, 이스라엘 정권과 아랍 정권들 사이의 관계 역시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규율하에 놓여있는 점도 팔레스타인 문제가 단순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하는 팔레스타인 민중과 제국주의와의 숙명적 대결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필립 마플릿, 『팔레스타인의 저항: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책갈피, 2021, 참조).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구조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이었다. 선진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대개 자본주의적 체제에 동화되어 있었지만, 후진 동유럽에 자본주의가 침투함에 따라 봉건 경제구조에 의존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개되면서 발생한 대중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공격 표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형성된 유대 민족주의의 완성 형태가 바로 시온주의였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고, 그 귀착지로 선택된 곳이 성서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었다. 옛 조상들의 땅이라 여겨진 곳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목표는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과 후원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모순적 성격이 배태된다. 유럽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시온주의 운동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구체화한 방안에는 바로 그 유럽 사회의 모든 특징이 들어 있었다. 바로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성격이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후원에 의존하던 시온주의 운동의 분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영국의 선택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게 된다. 밸푸어 선언으로 가시화된 제국의 후원 약속으로 독립국가의 염원을 안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땅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만 이미 100만 명에 이르는 아랍인들이 있었다. 또 다른 독립국가 건설 후원 약속을 받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유대인의 이주는 분쟁의 화근이었다. 게다가 현지 아랍인들과는 구별되는 경제구조를 고수한 유대인들의 정착촌은 처음부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공명정대한’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시온주의에 기울어 사실상 유대인과 아랍인을 차별하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고양된 아랍 민족주의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아랍인의 대규모 항쟁이 실패로 끝난 후 피폐해진 아랍 사회를 대체하는 세력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오히려 급성장하게 된다. 수에즈 운하에 대한 확실한 통제와 걸프 유전 지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영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소요를 무마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세력의 분리 공존을 표방했지만, 점차 강력해진 유대인 세력 편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퇴조와 더불어 시온주의 운동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된다. 새롭게 영향력을 확보한 미국 제국주의가 그 파트너였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물러간 자리에 미국은 기민하게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석유 발견은 미국이 중동에 대한 지배력 확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후 새롭게 형성된 냉전체제는 미국에게, 소련을 배제하고 중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은 중동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인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중 급성장한 미국내 시온주의 운동의 영향력 또한 영국을 대신한 미국을 강력한 파트너로 삼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 애초 친유대인 정책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랍 세계에서의 역효과를 염려하여 미온적이었던 미국은, 안정적인 동맹국이 없는 중동에서 친서방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시온주의 운동의 요구에 결탁한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 흔들리지 않는 협력체계의 기틀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의 통과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은,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커넥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및 아랍 민중들에게 중대한 기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은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를 통합하는 독립국가를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려는 원칙을 폐기할 것과 독립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결정할 때까지 시온주의자들의 이주 중단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은 그와 같은 요구를 가볍게 묵살해 버린 결과였다. 그 결과 험난하고 지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2. 유대 민족 귀환 신화와 기독교 신학의 공모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또한 현재진행형으로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정착 식민 운동’(일란 파페,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24)이라는 점에서, 그 해법 또한 그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벌어진 현재의 사태만을 문제시하는 시선으로는 그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엄연히 원주민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 식민지’로서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로부터 이어지는 참혹한 폭력적 지배의 현실을 고려할 때 그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그야말로 일관된 ‘제거’와 ‘인간성 말살’의 논리(일란 파페, 앞의 책, 113)로 점철된 점령 정책을 간과하고서는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이를 신학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그 부당한 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신학이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뜻한다. 신학적 접근을 시도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시온주의’의 문제이다. 시온주의는,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의 땅’에 귀환하여 자신들만의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오늘날 시온주의는 단순히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정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종의 정치적 운동으로서 시온주의 운동이 처음부터 유대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해 그 원형이라 할 만한 ‘시온에 대한 열망’은 백성의 거듭남을 지향하는 종교적 이상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약속의 땅’으로의 실제적 귀환을 지향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제창되었을 때 유대교의 많은 분파들은 본래의 이상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강력한 정치적 동기를 지닌 이념으로 부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실상 시온주의의 선구 테오도르 헤르츨의 경험이 말해주듯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 박해 경험 때문이었다. 헤르츨은 처음에는 정치적 시온주의에 무관심하였으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만의 조국을 바라는 시온주의로 선회하였고 그 선구가 되었다. 이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유럽 사회의 유대인 박해라는 강력한 외적 동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시온주의의 모체가 유대인들의 그것에 앞선 기독교의 시온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천년왕국을 믿는 이들은 그 성취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메시아의 재림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이전 유대인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그 믿음 자체로 반유대주의의 표현이었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의 구원을 증명하는 반증으로서 남아 있던 유대인은 끝내 기독교 세계 안에 통합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침내 유대인이 천년왕국 도래와 더불어 이뤄질 심판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뜻하였다. 귀환한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인지 완고하게 유대인으로 남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는 그들의 몫일 뿐이었다.
유대인의 귀환은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도 부합했다. “나는 유대인이 동화될 수 없으며, 어디에 있든 항상 국가 안에 국가를 세우리라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쫓겨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간단하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 원수였던 샤를조제프 라모랄의 말이다. 이는 시온주의를 형성한 사상이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 왔던 반유대주의와 분명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일란 파페, 앞의 책, 55). 그것은 유럽 사회 편에서 볼 때 유대인 추방의 정당한 근거였다. 유럽 열강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특별히 중동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던 영국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유대인 국가는 오스만투르크와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마침내 1917년 유대인 국가의 지원을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와 같은 일련의 맥락 가운데서 애초 반유대주의와 연결된 시온주의 사상은 이제 거꾸로 유대인의 자기 결속의 이념으로 변화되었다. 더불어 명확하게 실현가능한 정치적 운동으로 변화하였다. 나치 독일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그 운동은 더욱 강력한 동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귀환한 땅이 ‘임자 없는 땅’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현지 원주민과의 필연적인 갈등이 예견되는 상황이었지만, 유대인의 귀환이 결정된 이래 그 문제는 진지하게 다뤄진 적이 없다. 적어도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주민에 의한 정착 식민화의 시도는 포기된 적이 없다. 그것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시온주의를 배태하고 자극한 기독교 신학의 공모는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서의 서사는 의심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 전제하에 이뤄진 성서 해석은 유대인의 귀환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죄의식 탓이었을까? 유럽과 북미의 주류 신학계에서 이를 의심하는 해석은 쉽사리 수용될 수 없었다. 이를 더욱 확고히 입증하는 방편으로 성서 고고학이 동원되었다. 성서의 서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고고학적 발굴이 시도될수록 성서의 서사와 고고학적 증거 사이의 일치보다는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늘날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eology)보다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Syro-Palestinian Archeology) 또는 ‘레반트 고고학’(Levantine Archeology)이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것도 그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성서의 서사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예컨대 장엄하게 묘사된 출애굽 사건의 실체는 모호했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제국으로서 유대 국가 또한 그 존재가 의심받게 되었다.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고대 왕국 시대부터 유일신 신앙과 유대인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전제도 의심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1980년대 이래 일군의 ‘신역사학자들’(New Historians)이 등장하게 되었고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표적 저작으로 이스라엘 핑컬스타인(Israel Finkelstein)과 닐 애셔 실버먼(Neil Asher Silberman)의 The Bible Unearthed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까치, 2002), 키스 W. 휘틀럼(Keith W. Whitelam)의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이산, 2003), 슐로모 산드(Shlomo Sand)의 The Invention of Jewish People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일란 파페(Ilan Pappe)의 Ten Myth About Israel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역사학파의 연구에 기초하여 우리말로 저술된 저작으로 정의길의 『유대인, 발명된 신화: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한겨레출판, 2022)도 주목할 만하다.
이 연구 결과들은 유대인 귀환의 근거로서 고대 유대인의 정체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후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다시 고토로 되돌아온다는 논리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종족적·민족적 정체성을 전제로 하며, 더불어 그들이 떠난 고토에 유대인들이 사실상 남아 있지 않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신역사학파는 유럽 등으로 흩어진 유대인이 종족적·민족적 집단이라기보다는 개종을 통해 확산된 종교집단으로 이해한다(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이들을 민족집단으로 볼 수 있다면 유럽 사회에서 민족주의 열풍과 더불어 일어난 시온주의를 통해 비로소 민족의식을 형성한 그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 국가 멸망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이 아예 사라진 것일까? 유대 국가 멸망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은 본토에 남아 역사의 부침 속에서 변모하였다. 유대교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유일신교를 믿는 몇 집단으로 분화하였고 이슬람제국 지배 이래 다수가 무슬림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원주민의 후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오히려 고대 유대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이해에 따르면 귀환을 정당화하는 믿음 자체가 일종의 신화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신화에 근거한 믿음과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제거’와 ‘인간성 말살’의 논리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국가적 정책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건국 70주년을 맞이한 2018년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표방하는 기본법을 채택하였다. 기본법의 하나로 제정된 ‘유대 민족국가 기본법’(Basic Law on the Jewish Nation-State)은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조국이며, 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지닌다”고 규정했다(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 한겨레출판, 2022, 4). 아예 인종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표방한 것이다.
그 경로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이미 형성된 유대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주민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기초 위에 성립되는 것이라면 과연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현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가당치 않은 이야기이다.
3. 인종주의와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성서를 해방하기
‘신역사학파’는 대개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학자들로, 이들은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책임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 성과는 그간 강고하게 자리 잡은 성서학과 신학의 중요한 전제들을 재검토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고 있다.
기독교 신학이 그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그것은 성서를 보편적 구원의 전망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배타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오용되도록 방치할 것이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의 진실성은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벽이 나팔소리에 무너지고 다윗이 팔매 돌로 골리앗을 죽인 것 등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충실한 역사적 ‘증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서사시의 위력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 평등의 추구 등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설득력이 강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서 우러나온다. 성경은 모든 인간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깊은 의식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이스라엘 핑컬스타인 & 닐 애셔 실버먼,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368).
“내가 믿는 신이 타자를 포용하고 나만큼이나 그들을 돌보는 신이 아니라면 이 신은 우리 모두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우주의 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 종교가 각자의 신학적 근거에서 그 안의 폭력과 테러를 비판하고 신이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 평화, 사랑, 자비, 긍휼의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강력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는 하나님이나 우리 주변의 이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낡은 신학체계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이며, 우리의 종교는 오늘날 우리 세계의 고질적인 문제해결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되고 진실한 신은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화의 신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기뻐할 수가 없다.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 또한 기뻐할 리가 없다. 억압받는 사람은 자유로워져야 하고, 지배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은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억압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포함된다.”(Naim Ateek, “진정한 종교의 시험대로서의 해방신학”, Sabeel Ecumenical Liberation Theology Center, July 2020 / 기사연 도시에 제1호, 202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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