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후, 한국정치의 미래와 기독교적 전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6-24 18:30
조회
331
『농촌과목회』통권 102호(2024년 여름호) 원고
총선이후, 한국정치의 미래와 기독교적 전망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정권심판 소용돌이 속의 제22대 총선
긴장감이 감돌던 4월 10일 총선이 끝나고 5월 말 제22대 국회가 개원했다. 집권여당 108석에 범야권 192석으로 22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단순 요약하자면 정권심판을 내세운 범야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집권 기간 내에 이뤄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지 못한 선거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확실히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이뤄진 선거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의 환호성을 외치지 않았다. 집권 여당은 과반은커녕 제1당도 이루지 못했으니 탄식할 만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탄핵과 개헌의 저지선은 지켰으니 내심 오히려 안도하는 것 같다. 이는 정책방향은 옳았으나 국민에게 충분히 이해를 구하지 못했다는 대통령의 태도나 별다른 변화의 움직임이 없는 여당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범야권은 환호성을 지를 만했지만, 역시 그렇지도 않다. 승자의 겸손 때문이 아니다. 내친김에 집권 여당을 확실히 제압하여 개헌과 탄핵선을 넘겨야 했으나 절묘하게 의석 확보율이 코앞에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승리감을 맛볼 수 있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3년은 너무 길다!”를 외치며 돌풍을 일으킨 ‘조국혁신당’ 정도가 아닐까 싶다. 기대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전반적으로 급격한 재편이 이뤄지지 않은 정치구도가 지속된 탓에 누구도 환호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오히려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 진보정당이 사실상 괴멸 상태에 빠져버렸다. 진보정당의 의석이 전혀 없지 않으나 기존의 정당구도 안에서 비례연합을 통해 겨우 몇 석을 확보한 정도이다. 진보당 지역구 1석을 제외하면 이번 회기에 사실상 진보정당의 독자적인 원내 진출은 사실상 막혀버렸다. 그나마 그간 제3세력으로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었던 정의당은 녹색당과 의미 있는 선거연대에도 불구하고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였다. 기존의 정치구도를 재편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괴멸 사태는 이번 총선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심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책대결이 실종되어 버린 데 그 요인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 제22대 총선 국면에서 양대 정당의 정책은 아예 드러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피차간 심판에만 몰입하는 진영대결의 판도만 두드러졌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진보정당들이 의미있는 정책들을 제시하였으나 모두 소용돌이 가운데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니 미약한 정치세력은 표심을 얻을 길이 묘연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정치구도를 흔들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를 형성하는 과제가 난관에 봉착한 것은 이번 총선의 특수한 국면에서 발생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할만한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현재의 원내 의석수에 근거한 의정활동을 예측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임박한 선거 국면에서라면 당장 당락 여부가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이제는 그보다 중장기적 전망 안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2.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2016년 촛불 항쟁에 이어 2017년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이 현저해진 상황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는 예외적으로 진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 평가와 기대가 무너진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비로소 그 기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2020년 제21대 총선 이후부터 그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기본권을 확대하여 탄탄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집권 거대 여당의 무능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무너졌다. 촛불 민의로 표출된 개혁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실현에 다걸기를 하였으나 그것이 좌절된 이후 이렇다 할 정치개혁이나 사회개혁은 거의 이뤄내지 못했다. 사회적 불평은 심각해졌고 정치적 양극화 또한 심화하였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실망했고 지지할 정치세력을 찾지 못하였다. 보수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준 제20대 대선 결과는 사실상 그 필연적 수순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지배구조를 확인하였고, 그것은 기존의 거대 정당에 의한 정권교체만으로 쉽사리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른바 재벌, 금융, 행정, 사법, 언론 등 여러 분야의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선출 권력을 제약할 뿐 아니라 통제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정치세력은 날것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몰입하며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그에 대응하여 민주주의적 규율을 확대하여야 할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정권 장악을 위한 당리당략에 몰입하는 현상을 지켜봐야 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확장할 수 있는 정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한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사이 한국은 이례적으로 ‘독재화하는 국가군’으로 전락하기까지 하였다. 여러 국제적인 연구·조사 기관의 통계지표가 말해 주듯, 정치적 민주주의 측면은 물론 경제적 성장의 측면에서도 모두 현저하게 추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나라가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국 그것을 돌파할 정치세력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 특별히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그 위기를 돌파하는 데 기여할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번 총선의 결과로서 진보정당의 사실상 괴멸 사태를 가장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연 그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는 긴 호흡으로 마주해야 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3. 위기의 민주주의, 그 대안의 실마리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이는 그저 객관적인 정세분석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진 주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입장을 주목하고 싶다.
사회학자 백승욱은 그 위기를 돌파하려는 세력에게서 나타나는 ‘분석의 부재’와 ‘의지의 과잉’을 지적하고 있다(백승욱,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2022). 단순하게 요약하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낳은 구조적 요인에 대한 분석 없이 그저 민중의 결집된 의지로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의지의 낙관주의만 넘쳐난다는 진단이다.
백승욱은 1987년 이후 한국 역사를 단순히 ‘위대한 민중 승리의 역사’와 ‘계속 지속돼야 할 적폐 청산의 역사’로 보는 관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1987년의 위기를 ‘자유주의적으로 전환’하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 1991년을 주목한다. 정태춘이 ‘92년 종로, 장마에서’ 노래한 그 어간의 시점이다. 지배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준전시 체제하에서 위로부터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유신체제를 개방 지향적 자유주의적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던 시점이었다. 3당 통합은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등장했고 재벌개혁의 시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그 상황에서 ‘PD 3파 통합’과 ‘전노협 해소’를 거치며 노동운동 현장에서 철수하고 합법적 혁신정당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는 제도적 측면에서 두 가지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경제 관리 측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종료되고 자유주의적 시장 관리 방식이 자리를 잡았고, 또한 공권력의 중심이 안기부에서 검찰로 이동하면서 ‘법치’의 제도화가 이뤄졌다. 요컨대 1991년은 한국 자본주의 축적구조를 유지하는 통치성의 수선기로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법률 자유주의가 제도적 수선을 거쳐 새롭게 결합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체제였다.
백승욱은 오늘의 정치적 위기가 그 유산의 기반 위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돌파는 그 구조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그것을 내파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진보정당에 몸담은 이력을 지닌 철학자 김상봉은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으로 ‘영성의 부재’를 꼽고 있다(김상봉,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2024). 그 영성의 요체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랑,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집약된다. 그 믿음이 병들었기에,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만 머물렀을 뿐 한국 민주주의가 공화국으로서 자기를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상봉은, 동학혁명 이래 우리의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 심각한 위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가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제압하려는 대결로서 사실상 내전 상태로 퇴행하였다. 마치 한국전쟁 이전의 적대적 대립 상태를 방불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패의 전략·전술만 남은 정치 현실을 꼬집는 지적이다.
정치를 영성과 관련시키는 문제의식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솔깃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자가 해야 할 말을 철학자가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특정한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공동선을 위한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적 주체들을 향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두 주장은 언뜻 보기에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상반된 의견을 제기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은 ‘의지의 과잉’을, 한편은 ‘의지의 결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와 ‘영성’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단순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로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는 두 입장은 오히려 서로 접목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 제안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두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게 일치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가, 적과 동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칼 슈미트(Carl Schmitt)적 정치구도에 가깝다는 진단이다(백승욱, 16; 김상봉, 30). 다만 한편에서는 ‘분석의 부재’를, 한편에서는 ‘영성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그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여기서 민주주의 위기 현상을 진단하는 원인으로서 분석의 부재와 영성의 부재가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은 현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의미하고, ‘영성’은 문제시되는 현상을 넘어 대안을 모색하는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하는 관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냉철한 현실분석에 기초하여 그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장기적인 과제에 해당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위기라고 불릴 만큼 심각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의해야 할 과제이다.
4. 오늘 직면한 정치적 과제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장기적 전망을 그리는 가운데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하지만 동시에 당장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우선 기존의 양당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당장 그 구도를 재편하여 국민의 대표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그나마 진보정당이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던 제21대 국회에서도 실현되지 않은 선거제도 개선이 오히려 양당 구도가 더 강고해진 제22대 국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 난망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민의 대표성을 가능한 한 엄밀하게 구현하는 것은 성숙한 민주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양당 정치구도가 고착된다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환멸이 깊어질 수 있고, 그것은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정당 자체에도 위기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존의 거대 정당들이 기득권 체제에 안주하여 거듭 선거제도 개혁을 방기한다면, 경각심을 일깨우는 시민사회의 몫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국민적 주권을 강화하고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규범을 확립하는 헌법의 개정 또한 당면한 과제이다. 이 역시 지난 정부에서 시도되었다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87년 항쟁 이후 개정된 이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앞서 말한 대로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권력을 견제하는 균형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 헌법 정신의 기초를 재확인하고(5.18 정신의 전문 수록 등), 변화된 환경 가운데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합의로서 규범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예컨대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생태지향적 국가 규범을 확립하고, 사회적 양극화에 대응하여 자본과 노동의 균형을 이루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더욱 확고히 하는 헌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당장 문제시되고 있는 검찰권력을 확실히 제한하는 규범을 포함하고, 대통령 임기를 변경하는 내용도 포함할 수 있다. 그렇게 이번 제22대 국회 임기 초반에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제한하고 현직 대통령의 임기까지 조정할 수 있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훨씬 평화롭게 그 이행 과정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이 헌정체제 안에서 이뤄지는 절차이지만, 탄핵으로 국가적·사회적 역량의 소모와 갈등을 겪는 방식보다는 헌법 개정으로 현 대통령의 임기를 조기에 끝낼 수 있다면 당사자에게나 국민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 사회는, 이상의 단기적 과제 말고도 중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복합적 위기 가운데 해결해야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후위기 대책, 사회적 불평등의 극복과 한국형 복지체제의 구축, 사회적 불평등에 편승하는 사회적 차별의 극복,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 중견국가로서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의 확보 등 실로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현재 자본의 권력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더한 권위주의적 정치는 그 모든 과제들의 해결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 폭주를 제어할 수 없다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그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5.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과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 위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믿음 안에 살고 있다. 그 믿음은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선포하고 그들과 스스로 동일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 믿음은 이 땅 위에서 구현되어야 할 정치적 책임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세상의 삶 가운데서 그 어떤 영역도 예외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정치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이자 책무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세상 안에서 소통될 수 있는 가치로 구체화하는 가운데 수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정의·평화·생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상통할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인권 또한 오늘날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믿음 안에서 당연하게 수용되는 가치이다. 우리가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모색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자 동시에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마땅한 정치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진 정치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거부해야 할지 분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은 없다.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 나아가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는 세계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 정파에 대한 지지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과 의지를 펼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갖는 그 희망과 의지로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총선이후, 한국정치의 미래와 기독교적 전망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정권심판 소용돌이 속의 제22대 총선
긴장감이 감돌던 4월 10일 총선이 끝나고 5월 말 제22대 국회가 개원했다. 집권여당 108석에 범야권 192석으로 22대 국회가 구성되었다. 단순 요약하자면 정권심판을 내세운 범야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집권 기간 내에 이뤄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지 못한 선거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확실히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이뤄진 선거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의 환호성을 외치지 않았다. 집권 여당은 과반은커녕 제1당도 이루지 못했으니 탄식할 만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탄핵과 개헌의 저지선은 지켰으니 내심 오히려 안도하는 것 같다. 이는 정책방향은 옳았으나 국민에게 충분히 이해를 구하지 못했다는 대통령의 태도나 별다른 변화의 움직임이 없는 여당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범야권은 환호성을 지를 만했지만, 역시 그렇지도 않다. 승자의 겸손 때문이 아니다. 내친김에 집권 여당을 확실히 제압하여 개헌과 탄핵선을 넘겨야 했으나 절묘하게 의석 확보율이 코앞에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승리감을 맛볼 수 있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3년은 너무 길다!”를 외치며 돌풍을 일으킨 ‘조국혁신당’ 정도가 아닐까 싶다. 기대되는 바가 없지는 않으나, 전반적으로 급격한 재편이 이뤄지지 않은 정치구도가 지속된 탓에 누구도 환호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오히려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 진보정당이 사실상 괴멸 상태에 빠져버렸다. 진보정당의 의석이 전혀 없지 않으나 기존의 정당구도 안에서 비례연합을 통해 겨우 몇 석을 확보한 정도이다. 진보당 지역구 1석을 제외하면 이번 회기에 사실상 진보정당의 독자적인 원내 진출은 사실상 막혀버렸다. 그나마 그간 제3세력으로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었던 정의당은 녹색당과 의미 있는 선거연대에도 불구하고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였다. 기존의 정치구도를 재편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괴멸 사태는 이번 총선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심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책대결이 실종되어 버린 데 그 요인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 제22대 총선 국면에서 양대 정당의 정책은 아예 드러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피차간 심판에만 몰입하는 진영대결의 판도만 두드러졌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진보정당들이 의미있는 정책들을 제시하였으나 모두 소용돌이 가운데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니 미약한 정치세력은 표심을 얻을 길이 묘연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정치구도를 흔들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를 형성하는 과제가 난관에 봉착한 것은 이번 총선의 특수한 국면에서 발생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할만한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현재의 원내 의석수에 근거한 의정활동을 예측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임박한 선거 국면에서라면 당장 당락 여부가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이제는 그보다 중장기적 전망 안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2.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2016년 촛불 항쟁에 이어 2017년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퇴행 현상이 현저해진 상황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는 예외적으로 진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 평가와 기대가 무너진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비로소 그 기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2020년 제21대 총선 이후부터 그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기본권을 확대하여 탄탄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집권 거대 여당의 무능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무너졌다. 촛불 민의로 표출된 개혁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실현에 다걸기를 하였으나 그것이 좌절된 이후 이렇다 할 정치개혁이나 사회개혁은 거의 이뤄내지 못했다. 사회적 불평은 심각해졌고 정치적 양극화 또한 심화하였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실망했고 지지할 정치세력을 찾지 못하였다. 보수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준 제20대 대선 결과는 사실상 그 필연적 수순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지배구조를 확인하였고, 그것은 기존의 거대 정당에 의한 정권교체만으로 쉽사리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른바 재벌, 금융, 행정, 사법, 언론 등 여러 분야의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선출 권력을 제약할 뿐 아니라 통제하고 있는 실상을 확인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정치세력은 날것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몰입하며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그에 대응하여 민주주의적 규율을 확대하여야 할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정권 장악을 위한 당리당략에 몰입하는 현상을 지켜봐야 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확장할 수 있는 정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한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사이 한국은 이례적으로 ‘독재화하는 국가군’으로 전락하기까지 하였다. 여러 국제적인 연구·조사 기관의 통계지표가 말해 주듯, 정치적 민주주의 측면은 물론 경제적 성장의 측면에서도 모두 현저하게 추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나라가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국 그것을 돌파할 정치세력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 특별히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그 위기를 돌파하는 데 기여할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번 총선의 결과로서 진보정당의 사실상 괴멸 사태를 가장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연 그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는 긴 호흡으로 마주해야 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3. 위기의 민주주의, 그 대안의 실마리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이는 그저 객관적인 정세분석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뜻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진 주체 형성의 과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입장을 주목하고 싶다.
사회학자 백승욱은 그 위기를 돌파하려는 세력에게서 나타나는 ‘분석의 부재’와 ‘의지의 과잉’을 지적하고 있다(백승욱,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2022). 단순하게 요약하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낳은 구조적 요인에 대한 분석 없이 그저 민중의 결집된 의지로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의지의 낙관주의만 넘쳐난다는 진단이다.
백승욱은 1987년 이후 한국 역사를 단순히 ‘위대한 민중 승리의 역사’와 ‘계속 지속돼야 할 적폐 청산의 역사’로 보는 관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1987년의 위기를 ‘자유주의적으로 전환’하며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 1991년을 주목한다. 정태춘이 ‘92년 종로, 장마에서’ 노래한 그 어간의 시점이다. 지배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준전시 체제하에서 위로부터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유신체제를 개방 지향적 자유주의적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던 시점이었다. 3당 통합은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등장했고 재벌개혁의 시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그 상황에서 ‘PD 3파 통합’과 ‘전노협 해소’를 거치며 노동운동 현장에서 철수하고 합법적 혁신정당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는 제도적 측면에서 두 가지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경제 관리 측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종료되고 자유주의적 시장 관리 방식이 자리를 잡았고, 또한 공권력의 중심이 안기부에서 검찰로 이동하면서 ‘법치’의 제도화가 이뤄졌다. 요컨대 1991년은 한국 자본주의 축적구조를 유지하는 통치성의 수선기로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법률 자유주의가 제도적 수선을 거쳐 새롭게 결합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체제였다.
백승욱은 오늘의 정치적 위기가 그 유산의 기반 위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돌파는 그 구조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그것을 내파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진보정당에 몸담은 이력을 지닌 철학자 김상봉은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으로 ‘영성의 부재’를 꼽고 있다(김상봉,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2024). 그 영성의 요체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랑,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집약된다. 그 믿음이 병들었기에,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만 머물렀을 뿐 한국 민주주의가 공화국으로서 자기를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상봉은, 동학혁명 이래 우리의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고 의미 있는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이 땅에 많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한국 민주주의가 오늘 심각한 위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가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제압하려는 대결로서 사실상 내전 상태로 퇴행하였다. 마치 한국전쟁 이전의 적대적 대립 상태를 방불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패의 전략·전술만 남은 정치 현실을 꼬집는 지적이다.
정치를 영성과 관련시키는 문제의식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솔깃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자가 해야 할 말을 철학자가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특정한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공동선을 위한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적 주체들을 향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두 주장은 언뜻 보기에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상반된 의견을 제기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은 ‘의지의 과잉’을, 한편은 ‘의지의 결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와 ‘영성’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단순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로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취하는 두 입장은 오히려 서로 접목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 제안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두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게 일치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가, 적과 동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칼 슈미트(Carl Schmitt)적 정치구도에 가깝다는 진단이다(백승욱, 16; 김상봉, 30). 다만 한편에서는 ‘분석의 부재’를, 한편에서는 ‘영성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그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여기서 민주주의 위기 현상을 진단하는 원인으로서 분석의 부재와 영성의 부재가 동일한 수준에서 서로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은 현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의미하고, ‘영성’은 문제시되는 현상을 넘어 대안을 모색하는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하는 관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냉철한 현실분석에 기초하여 그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장기적인 과제에 해당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위기라고 불릴 만큼 심각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의해야 할 과제이다.
4. 오늘 직면한 정치적 과제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장기적 전망을 그리는 가운데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하지만 동시에 당장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우선 기존의 양당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당장 그 구도를 재편하여 국민의 대표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그나마 진보정당이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던 제21대 국회에서도 실현되지 않은 선거제도 개선이 오히려 양당 구도가 더 강고해진 제22대 국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 난망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민의 대표성을 가능한 한 엄밀하게 구현하는 것은 성숙한 민주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양당 정치구도가 고착된다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환멸이 깊어질 수 있고, 그것은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정당 자체에도 위기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존의 거대 정당들이 기득권 체제에 안주하여 거듭 선거제도 개혁을 방기한다면, 경각심을 일깨우는 시민사회의 몫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국민적 주권을 강화하고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규범을 확립하는 헌법의 개정 또한 당면한 과제이다. 이 역시 지난 정부에서 시도되었다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87년 항쟁 이후 개정된 이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앞서 말한 대로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권력을 견제하는 균형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 헌법 정신의 기초를 재확인하고(5.18 정신의 전문 수록 등), 변화된 환경 가운데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합의로서 규범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예컨대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생태지향적 국가 규범을 확립하고, 사회적 양극화에 대응하여 자본과 노동의 균형을 이루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더욱 확고히 하는 헌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당장 문제시되고 있는 검찰권력을 확실히 제한하는 규범을 포함하고, 대통령 임기를 변경하는 내용도 포함할 수 있다. 그렇게 이번 제22대 국회 임기 초반에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제한하고 현직 대통령의 임기까지 조정할 수 있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훨씬 평화롭게 그 이행 과정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이 헌정체제 안에서 이뤄지는 절차이지만, 탄핵으로 국가적·사회적 역량의 소모와 갈등을 겪는 방식보다는 헌법 개정으로 현 대통령의 임기를 조기에 끝낼 수 있다면 당사자에게나 국민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 사회는, 이상의 단기적 과제 말고도 중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복합적 위기 가운데 해결해야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후위기 대책, 사회적 불평등의 극복과 한국형 복지체제의 구축, 사회적 불평등에 편승하는 사회적 차별의 극복,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 중견국가로서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의 확보 등 실로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현재 자본의 권력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더한 권위주의적 정치는 그 모든 과제들의 해결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 폭주를 제어할 수 없다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그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5.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과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 위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믿음 안에 살고 있다. 그 믿음은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선포하고 그들과 스스로 동일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 믿음은 이 땅 위에서 구현되어야 할 정치적 책임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세상의 삶 가운데서 그 어떤 영역도 예외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정치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이자 책무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세상 안에서 소통될 수 있는 가치로 구체화하는 가운데 수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정의·평화·생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상통할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인권 또한 오늘날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믿음 안에서 당연하게 수용되는 가치이다. 우리가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모색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자 동시에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마땅한 정치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진 정치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거부해야 할지 분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은 없다.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 나아가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는 세계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 정파에 대한 지지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과 의지를 펼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갖는 그 희망과 의지로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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