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본권리로서 노동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9-11 23:00
조회
297
<종교와 평화> 194(2024.9.2.) 사회적 약자 이야기 2
삶의 기본권리로서 노동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에는 탈아감을 느낀다.”
소외된 노동의 실상을 꼬집고 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의 한 대목이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 그 현상은 변화되었을까? 오히려 노동의 소외 현상은 더 극심해지고 있다. 오늘 노동을 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 그 누구라도 붙잡고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통감할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노동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소외된 노동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대안을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현실을 정당화하는 인식이 더 팽배해 있다. 교회에서는 ‘노동’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금기처럼 되어 있다. 노동은 저주의 결과이자 따라서 비천한 것이라는 생각에 더해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가 사회적 갈등을 빚어내고 불안을 안긴다는 생각 때문일까?
성서는 그 편견과는 전혀 다른 전망을 보여 주고 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유비 관계로 제시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다”(창세 2:5).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는 것’과 인간이 ‘땅을 경작하는 것’은 상호 조응하는 관계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펼치시며 인간은 그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 노동을 통해 결합된 이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만물을 생성시키고 모든 생명을 보전하는 역할을 한다. 창조 이야기가 전하는 노동의 고통(창세 3장)은 노동조건이 악화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 그 자체가 저주받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조건에서도 하나님과의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노동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에 의해 긍정된 노동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규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의 상태에서 해방된 출애굽 사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율법은 노동과 휴식의 엄격한 규정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들을 명시하고 있다. 강제노역과 과중한 조세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 노임의 정시 지급, 노동소득을 강탈하여 자유인을 노예화할 수 있는 이자의 금지 등은 자기 몸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미가 4:4).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로 그 열매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언자의 선포는 노동의 의미와 그 보람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의 법 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수에게도 이어졌다. 예수가 자기 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진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선포함으로써(마태 11:28) 육체를 소진하는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자발적 의사와 상관없이 고된 노동의 조건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어 온 실질적 주체인 노동자의 권리와 삶의 실상은 외면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을 포함하여 여러 층으로 갈라진 노동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차별의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산업재해의 심각성은 실로 처참할 지경이다. 매년 세월호 희생자의 여섯 배가 넘는 1,800-2,000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잃고 있다. 매일 5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죽어 나가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은 정당한 기본권마저도 제약받고 있다. 헌법과 노동관계법들은 모두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권리는 보장되고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남짓밖에 되지 않은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노동자의 단결권의 행사에도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반증한다.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극한적인 쟁의행위에 나서는 일이 빈발하는 것은 정상적인 노사협상이 불가한 현실을 반영한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거의 예외 없이 사실상 불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상·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적 규범으로 확립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그 규범이 통용되고 있지 않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그 참담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사회적 요구이자 동시에 저마다 마땅한 몫을 누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신앙의 요구이기도 하다.
삶의 기본권리로서 노동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에는 탈아감을 느낀다.”
소외된 노동의 실상을 꼬집고 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의 한 대목이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 그 현상은 변화되었을까? 오히려 노동의 소외 현상은 더 극심해지고 있다. 오늘 노동을 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 그 누구라도 붙잡고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통감할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노동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소외된 노동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대안을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현실을 정당화하는 인식이 더 팽배해 있다. 교회에서는 ‘노동’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금기처럼 되어 있다. 노동은 저주의 결과이자 따라서 비천한 것이라는 생각에 더해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가 사회적 갈등을 빚어내고 불안을 안긴다는 생각 때문일까?
성서는 그 편견과는 전혀 다른 전망을 보여 주고 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유비 관계로 제시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다”(창세 2:5).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는 것’과 인간이 ‘땅을 경작하는 것’은 상호 조응하는 관계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펼치시며 인간은 그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 노동을 통해 결합된 이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만물을 생성시키고 모든 생명을 보전하는 역할을 한다. 창조 이야기가 전하는 노동의 고통(창세 3장)은 노동조건이 악화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 그 자체가 저주받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조건에서도 하나님과의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노동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에 의해 긍정된 노동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규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의 상태에서 해방된 출애굽 사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율법은 노동과 휴식의 엄격한 규정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들을 명시하고 있다. 강제노역과 과중한 조세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 노임의 정시 지급, 노동소득을 강탈하여 자유인을 노예화할 수 있는 이자의 금지 등은 자기 몸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미가 4:4).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로 그 열매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언자의 선포는 노동의 의미와 그 보람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의 법 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수에게도 이어졌다. 예수가 자기 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진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선포함으로써(마태 11:28) 육체를 소진하는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자발적 의사와 상관없이 고된 노동의 조건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어 온 실질적 주체인 노동자의 권리와 삶의 실상은 외면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을 포함하여 여러 층으로 갈라진 노동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차별의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산업재해의 심각성은 실로 처참할 지경이다. 매년 세월호 희생자의 여섯 배가 넘는 1,800-2,000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잃고 있다. 매일 5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죽어 나가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은 정당한 기본권마저도 제약받고 있다. 헌법과 노동관계법들은 모두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권리는 보장되고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남짓밖에 되지 않은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노동자의 단결권의 행사에도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반증한다.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극한적인 쟁의행위에 나서는 일이 빈발하는 것은 정상적인 노사협상이 불가한 현실을 반영한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거의 예외 없이 사실상 불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상·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적 규범으로 확립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그 규범이 통용되고 있지 않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그 참담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사회적 요구이자 동시에 저마다 마땅한 몫을 누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신앙의 요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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