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반신학의 계보, 세대별 민중신학과 그 전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10-05 19:34
조회
290
『산넘고 물건너』 2024년 가을호 원고


반신학의 계보, 세대별 민중신학과 그 전망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불연기연(不然其然)

‘불연기연’(不然其然), 수운 최제우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의 제목이다. 불연(不然)이 이성을 초월한 세계를 나타낸다면 기연(其然)은 합리적으로 해명 가능한 세계를 나타낸다. 도올 김용옥은 이를 “불연은 기연이다.”라고 해석한다.(1) 곧 그렇지 아니한 세계는 알고 보면 그렇고 그러한 것으로 설명된다는 뜻이다. 알 수 없었던 그 세계도 결국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도올은 수운의 이 문장을 『천주실의』(天主實義)와의 씨름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2)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절대 초월자가 주관하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사실상 상하 위계적 질서를 정당화하고 사람들을 겁박하는 종교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한다. 사람의 인식이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세계도 장차 그 인식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짐으로써 마침내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무지몽매함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자유를 누리는 세계에 대한 전망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시천주(侍天主), 곧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그저 밋밋한 신의 내재성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생동적인 과정을 함축한다. 두말할 것 없이 수운이 일깨운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은 인간해방을 지향한다.(3) 차별이 엄존하는 위계적 구조 안에서 누구는 주인 노릇하고 누구는 종 노릇하는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존엄한 존재가 되는 세계를 꿈꾼 것이다. 불연기연(不然其然), 이 말로써 운명의 족쇄에 매인 인간들이 진정한 자유를 맛보는 세계를 생의 말년에 담담하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권학가」(勸學歌)에서 노래하듯 “춘삼월 호시절이 올 때에는 우리 모두 함께 놀고보고 먹고보세”라고 했던(4) 그 이상과도 상응한다.
너무나 다른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인간해방을 지향한 수운의 궤적은 동시대인인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궤적과 기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수운 최제우(1824-1864)와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동시대인이었다.(5)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봉건사회의 질곡 가운데 있었던 수운과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시대 한복판에 있었던 마르크스가 처한 역사적 상황의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고전적 경서 외에 당대 사회를 분석하는 다른 서적에 의존할 수 없는 형편에서 홀로 도달한 깊은 통찰에 의존해 저술할 수밖에 없었던 수운과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당대 사회를 분석하며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던 마르크스의 개인적 상황의 차이는 두 사람의 언어를 확연하게 구별 짓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수운이 너무나 종교적이고 영적이라면 마르크스는 너무나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다. 이 때문에 과연 두 사람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평생을 일관한 인간해방이라는 관심사에서 두 사람은 동시대인으로서 탁월한 유산을 물려준 위인들이다. 수운의 시천주 사상이 인간해방을 지향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마르크스의 냉철한 과학적 분석의 언어는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인간해방의 관심사는 사라지고 냉정한 분석의 언어일 뿐인 것으로 곡해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휴머니즘적인 초기 마르크스와 과학적인 후기 마르크스를 구분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토록 치밀하게 자본을 분석하는 『자본』에서조차도 인간해방을 향한 마르크스의 관심사는 일관된다.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 인간을 자기 자신과 역사의 주인공으로 보는 비전에 이끌렸으며, 어떤 경우든 노예화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하였다.(6) 그가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몰입한 것은 인간 존엄의 실현을 위한 현실적 조건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그 점에서 수운과 마르크스는 그저 우연히 동시대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 시대의 질곡 가운데서 인간해방을 위한 길을 연 진정한 동시대인이었다.
어느 편에서든 두 위인을 비교하는 것은 달갑게 여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특히 수운의 동학을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이 생뚱맞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불연기연(不然其然)의 인식은 우선 그 편견을 거두어낼 수 있는 실마리에 해당한다. 알 수 없는 운명의 족쇄를 끊어내고 인간이 자유를 누리는 세계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중신학의 신학으로서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도 공통되는 사상적 유산이기도 하다.


두 이야기의 합류와 계시의 하부구조

민중신학이 1970년대 한국 민중의 현실 가운데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당대 ‘지금 여기’에서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단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전태일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역사와 현실을 재해석하게 만들고 신학의 유산을 재해석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대 민중 사건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하나의 신학으로 형성되는 데에는 사상적 전통의 유산을 배제할 수 없다. 사상적 전통의 유산은 그 신학적 인식의 틀을 형성한 바탕이 되었다. 하나의 신학으로서 독특성은 고유한 사상의 유산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유산을 융화하여 새로운 신학의 방법과 내용을 구성한 데 있다 할 것이다. 이때 주목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사상적 유산 가운데 하나가 동학이다.
서남동은 ‘두 이야기의 합류’ 개념을 통해 오늘의 민중사건 가운데 그리스도교 민중전통과 한국 민중전통이 합류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을 민중신학의 임무로 삼았다.(7) ‘두 이야기의 합류’ 맥락 안에 성서의 민중 전통과 더불어 동학 민중운동이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특별히 김지하의 메모 <장일담>에 대한 해석에서 동학 민중운동은 예수 사건과 접맥되는 핵심 줄기가 되고 있다.(8)
더불어 서남동은 당대 역사 현장에서 일어난 민중사건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계시의 하부구조’ 개념을 제시하였다.(9) 그것은 두 이야기의 합류 구조를 밝혀내는 매개 장치로서 민중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오늘의 시각과 방법으로 이해하는 방법론을 함축한다. 막연한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상의 언어로서 민중신학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개념이다. 서남동은 어떤 신학이든 당대의 언어를 매체로 하여 펼쳐질 수밖에 없는 성격을 역설하면서 민중신학이 당대의 언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해명한 바 있다.(10) ‘계시의 하부구조’ 개념을 말하면서, 민중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사회경제사적 방법’, 그리고 그 내면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11)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인식 방법과 상통한다고 했다.(12)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동일한 목적하에 이른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의 통찰과 마르크스의 냉철한 역사 분석의 방법은, 민중신학의 ‘두 이야기 합류’ 개념과 ‘계시의 하부구조’ 개념에서 신학적으로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과 당대 민중 현실에 대한 깊은 탐색의 결과였다. 그저 창백한 이론의 탐구 결과가 아니라 당대의 생생한 민중 현실에 발을 붙이고 역사를 탐구하는 가운데 도달한 신학적 언어였다. 그 신학이 기존의 신학적 언어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기에 ‘반신학’(反神學) 또는 ‘탈신학’(脫神學)이라 이름할 수밖에 없었다. ‘서학’(西學)에 대응하여 ‘동학’(東學)이라 이름하게 되었던 문제의식과 다르지 않다.


세대별 민중신학의 특성과 역할

민중신학을 이해하는 데서 ‘세대론’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점은, 민중신학의 지속성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그 시대 인식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함축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신학자들’이 아닌 ‘신학의 경향’을 분류하는 방식이다.(13) 흔히 19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상황에서 전개된 민중신학을 1세대 민중신학이라 하고, 1980년대 변혁적 민중운동의 상황에서 전개된 민중신학을 2세대 민중신학이라 하고, 1990년대 이후 민중신학을 3세대 민중신학이라 한다.
1세대 민중신학은, 1960-70년대 돌진적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의 발견에서 촉발되었다. 1970년 전태일 사건은 당대 민중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 ‘민중사건’을 증언하려는 민중신학은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더불어 그 사건을 증언하기에는 부적합한 이전의 교회와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서구적 합리성에 기초한 지배적 담론에 대한 저항으로서 당시의 민중신학은 예언자적 통찰에 가까웠다. 그것은 민중신학자들 스스로 표방한 것처럼 ‘증언의 신학’이었으며 ‘반신학’ ‘탈신학’이었다. 그 신학은 민중의 고난을 주목하고 이를 증언하는 데 치중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과 더불어 2세대 민중신학이 펼쳐진다. 1980년대는 한국적 근대화의 대안으로 반자본주의적 전략,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민족해방 전략이 전면에 부상하였고, 급진적인 학생운동의 폭발적 성장 및 노동자 계급운동의 형성과 더불어 대안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수용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의 민중신학은 민중운동과의 연대를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그 연대를 위한 대안적 이론 모색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정치경제학적 인식과 신학적 인식을 결합한 ‘물(物)의 신학’(14)이 형성된 것은 그 결과였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접근한 2세대 민중신학은 제1세대 민중신학의 폭넓은 가능성을 좁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당대의 시대 인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2세대 민중신학은 선언적 주체에서 실질적 주체로 부상한 민중을 주목하고 그 민중과 연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의 지구화가 전면화한 1990년대 이후 역사적 지평은 3세대 민중신학을 태동시킨 배경이 되었다. 국가 내지는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경계가 약화하는 가운데 보다 다양하고 정교한 지배의 양식을 구현하고 있는 자본의 지구화 현실은 새로운 해방 전략을 자극하였다. 3세대 민중신학은 그러한 현실에 대응하여 정치경제학적 인식을 보완하는 인식 틀로 문화정치학적 인식을 수용하며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의 통합을 추구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를 통해 권력의 다양한 지배 양식에 주목하여 민중신학의 권력해체적 특성을 부각하였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시대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체를 면밀히 드러내고 이를 신학적으로 성찰하였다. 이는 2세대 민중신학이 뚜렷하게 보여 준 변혁적 전망과 성격을 달리할 뿐 아니라 1세대 민중신학이 주목한 민중의 ‘고난’에 대한 성찰과도 성격을 달리한다. 1세대 민중신학이 주목한 것은 주체로서 민중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로서 ‘고난’이었다면, 3세대 민중신학이 주목한 ‘고통’은 민중을 주체화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회적 현실의 실체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어떻게 대안적 세계에 대한 전망과 연결될지는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지만, 그 사회적 고통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함으로써만 새로운 세계를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4세대 민중신학의 전망은 어떻게 될까?(15) 3세대의 문제의식이 장기 지속되는 까닭에 뚜렷이 구별되는 그다음 세대의 경향이 부상하지는 않고 있다고 해야 할까? 신학자 후속세대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전 세대의 신학적 경향과 뚜렷이 구별되는 경향의 특징을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과연 무엇이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될까? 한반도적 상황에서 보자면 평화체제의 형성이 그 전환의 계기가 될까? 아니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폐해로 나타난 기후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에서 사회적 정의와 생태적 정의를 결합한 새로운 전망과 관련하여 결정적 전환이 이뤄질까? 그것이 사회적 고통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두드러진 3세대적 문제의식의 확장에 해당할지, 아니면 그와 구별되는 경향을 띠게 될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어쨌든 ‘반신학’ 내지는 ‘탈신학’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세대별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의 위기에 대한 개입 언어로서 신학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 민중을 둘러싼 강력한 힘의 실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려는 진지한 신학적 성찰 태도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로써 현재 민중신학의 동향을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반신학 또는 탈신학의 계보에서 논할 수 있는 다른 경향의 민중신학, 정반대로 신학적 재구성의 경향이 두드러진 민중신학도 있지만, 제한된 지면상 그에 대한 서술은 생략한다.(16) 다만 세대별 계보로 이어지는 민중신학의 경향을 확인하면서 결론에 접근하고자 한다.


기막힌 세계 현실 가운데서 민중신학의 과제

민중신학이 세대를 달리하는 가운데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 탓에 항간에 민중신학이 그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이른바 1세대 민중신학에 대한 훈고학으로 그치지 않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대에 따라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여전히 그 몫을 감당하고 있는 점을 지나치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민중신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민중신학을 너무 좁게 이해하고 있는 인식 탓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아예 더 나아가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의 시효가 다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미 다양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신학 경향들로 해소되어 버린 것으로 여기는 견해이다. 이 견해 역시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신학적 성찰의 중심 과제로 삼은 데 그 독특성이 있다기보다는 ‘민중’의 시좌에서 역사와 현실을 재해석하는 신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한 데 그 독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 민중신학은 민중이라는 주제에 그 독특성이 있다기보다는 민중의 시좌에서 비롯되는 신학의 방법론에 그 독특성이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신학의 경향들로 그 기본적인 특성이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기본 관점을 지키고 있다면 마땅히 오늘 시대에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이 민중신학 아닌 것으로 해소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변화된 시대에 민중신학은 오늘의 첨예한 문제들을 일관된 입장에서 접근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신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여전히 오늘의 세계는 민중적 관점의 중요성을 환기해 주고 있다. 오늘 현실에서 더 이상 고통스러운 민중의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지구화된 세계경제는 물자와 인간의 소통을 확대하고 경제적 규모를 확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매우 다층적인 차별적 위계질서를 동반하고 있다.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과 삶의 질은 공평해진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심각한 격차를 안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을 겪는 가운데 그 격차는 더욱 심화하였다.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이 일상화되고 그에 따르는 노동계급의 주변화 현상이 현저해지고 있다. 동시에 그와 직결되어 매우 다양한 차별 현상들이 심화하고 있다. 인간이 더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일회용 소모품과 같이 취급받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차별적인 사회 안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이들은 ‘민중’이라는 단일한 이름보다는 사회마다 각기 다른 이름들로 불리고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실재가 존재하는 한 민중신학의 문제의식과 그 신학의 방법이 갖는 의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오늘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자본주의의 국면은 심각한 자연의 훼손은 말할 것 없거니와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상업과 금융에 지배적 지위를 부여하는 경제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수용하는 규범을 부여하는 의도적 기획에 해당한다. 그 규범은 각기 모든 사람을 전면화된 경쟁의 세계에 살아가도록 하며, 사회관계는 시장의 모델을 따르도록 명령한 끝에 각 개인을 변형시켜 자기 자신을 기업으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강요한다.(17) 기가 막힌 현실이다.
민중신학은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격화하는 국면에서 민중의 현실에 주목하면서 역사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의 방법을 새롭게 하였다. 오늘 자본주의적 폐해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하는 신학적 성찰의 과제는 더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기가 막힌 세상,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로마 8:22) 세계 현실 가운데서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 동학의 이상이요 또한 민중신학의 이상이다.

미주)

1) 김용옥, 『동경대전 2 – 우리가 하느님이다』(서울: 통나무, 2021), 200.
2) 앞의 책, 195-199.
3) 김경재, “시천주와 국가폭력”, 『산 넘고 물 건너』 14(2024. 여름), 9.
4) 김용옥, 『용담유사 - 수운이 지은 하느님 노래』(서울: 통나무, 2022), 215.
5) 앞의 책, 208-209 참조.
6) 최형묵, “사회주의 혁명과 정의”, 『신학과교회』 17(2022. 여름) 476-482 참조.
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개정증보판(서울: 동연, 2018), 101.
8) 앞의 책, 102-107.
9) 앞의 책, 485.
10) 앞의 책, 208.
11) 앞의 책, 60.
12) 앞의 책, 25, 487.
13)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1990. 여름), 326; 김진호,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 이정희 외,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왜관: 분도출판사, 2018), 322.
14) 강원돈, 『물의 신학 – 실천과 유물론에 굳게 선 신학의 모색』(서울: 한울, 1992).
15) 김진호, 앞의 글, 321-342; 정용택, “다시,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를 위하여”, 「교수신문」2022.4.13. 참조.
16) 이에 대해서는 최형묵, 『민중신학 개념 지도』(서울: 동연, 2023), 193-196 참조.
17)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 합리성 –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에세이』(서울: 그린비, 2022), 21.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