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의 맥 06] 국가의 탄생 - 평등주의 공동체의 붕괴와 권력의 형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5-15 21:06
조회
1035
2019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4월 3일~7월 10일 매주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6> (5/15) 국가의 탄생 - 평등주의 공동체의 붕괴와 권력의 형성

1. 평등주의 이스라엘 공동체

1) 사사(사사기)
사사(士師; 히브리어 사파트)란 재판관과 군사적 지도자로서 역할(대사사의 경우)을 맡은, 왕정 수립이전의 카리스마적인 이스라엘 지도자를 말한다. 사사기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신명기 역사의 연장으로, 이스라엘의 죄→하나님의 징벌→이스라엘의 회개→하나님의 구원(사사의 등장)을 기본도식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사사는 신앙의 위기와 동시에 빚어진 공동체의 위기에 대처한 지도자로서 역할한다.
2) 원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조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 기간은 대략 200여년간(주전 1200~1000년)으로 알려져 있다.
<원이스라엘 평등주의 공동체의 기본 구조>
① 벧아브 - 확대가족: 기본적 생활 단위로 둘 혹은 그 이상의 핵가족들로 구성 / ‘아버지의 집’
② 미스파하 - 확대가족들의 보호 연합체: 같은 마을 또는 인접 마을에 살고 있는 확대가족들의 연합체 / 땅을 지키고 빚으로 인한 노예를 구하는 역할 / 군사적, 종교적(연례축제) 기능 / ‘족속’ ‘권속’ ‘근족’ ‘가족’ ‘문중’
③ 세베트/마테 - 지파: 미스파하의 연합체 / 법률적 기능 담당 / 지파회의, 장로회의 등을 통한 자치체로 중앙정치조직에 의해 통제받지 않음
④ 이스라엘: 지파동맹체로서의 전체 이스라엘 / 어떤 집단, 지파에도 절대권이 부여되지 않음 / 상비군 제도가 아닌 민병대
이와 같은 기본 질서에 따라 이스라엘은 평등한 공동체를 지속했고 오직 하나님만을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정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은 제의적 측면에서도 광야에서의 예배 정신을 기본적으로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은 법궤로서, 법궤는 한 곳에 고정되지 않았고 세겜, 베델, 실로 등으로 이동하였으며, 법궤가 이동하는 곳에서 축제와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과 혼재되어 살고 있던 다른 민족들, 특히 블레셋은 항상 이스라엘에 위협 요소이자 동시에 유혹꺼리였고, 결국 11세기 중엽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는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왕조국가로 전환하게 된다.

2. 이스라엘의 위기와 왕권의 등장 (사무엘기상)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정착할 즈음 거의 같은 시기에 가나안 해안 지역 일대(아스돗, 아스겔론, 가사, 에그론, 갓)에는 바다를 건너온 ‘해양민족’(Philistines; Sea People; 블레셋 /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철기문명의 시대를 열었으며, 청동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에게는 큰 위협세력이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가나안 지역의 성읍국가 형태의 군주제 국가를 이루고 있어서, 정치ㆍ군사적 동맹체로서 성격이 확고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계속 압박하였다.
아벡전투에서의 패배와 연이어 법궤를 탈취당하는 수모를 겪은 이스라엘은 강력한 왕권국가를 요구하게 되고, 사울이 그 첫 왕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울 왕은 사사에서 왕(melek)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통치자(nagid)로서 제한된 왕권을 행사하였다. 군사적 지휘자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진 사울은 세습적 통치자라기보다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가까우며, 기브아에 있었던 그의 성채도 왕궁이라기보다는 군사적 지휘소에 가깝다. 처음으로 종신의 통치권을 지닌 사울왕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자결)하고, 다윗의 부상으로 이스라엘은 진정한 왕권국가 체제를 갖추게 된다.

3. 다윗왕권의 형성과 왕조신학 (사무엘기하 // 역대기상)

1) 다윗 왕권의 확립과 왕조신학 - ‘다윗계약’
사울 왕이 죽은 후 다윗은 유다로 돌아 와 그곳의 왕이 된다. 그러나 북부의 사울계 세력(이스보셋)과 남부의 다윗계 세력은 전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두고 7년 이상을 싸웠다. 마침내 승리를 거둔 다윗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도성(‘다윗의 도성’)으로 삼아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주변의 민족들도 선제 공격하여 복속시킨다. 다윗은 이제 (종교적) 부족동맹체로서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한 지역을 통치하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왕이 된다(주전 1000-961년). 물론 계속되는 내부의 갈등이 있었지만, 이를 평정하고 다윗은 내부적으로 국가 행정체제제의 기본요소를 갖추고 왕권 세습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건축 사업은 수수한 편이었고, 징병은 부족동맹의 원칙에 따랐고(군대는 용병/사병을 주축으로), 아직 조세를 거두지는 않았다(정복의 결과 외국의 조공 덕택으로).
이러한 다윗의 성공과 더불어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다윗계약’이라 불리우는 왕조신학이 그것이다.
2) 다윗왕에 대한 신명기 사가와 역대기 사가의 서로 다른 평가
신명기 사가나 역대기 사가 모두 다윗왕조 신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러나 두 사가는 다윗의 구체적 면모를 평가하는 데 확실히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삼하 7:8-10 // 역상 17:7-14). 신명기 사가는 다윗의 잘못과 흠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 반면 역대기 사가는 중대한 잘못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4. 솔로몬의 영화와 왕국의 분열 (열왕기상 1-14장 // 역대기하 1-12장)

1) 왕권의 확립과 솔로몬의 ‘영화’
다윗에게서 왕위를 계승한 솔로몬은 이전에 이스라엘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국가를 확립한다. 아도니야와의 왕위쟁탈전을 거쳐 ‘철권’으로 통치의 서막을 연 솔로몬은 유다와 이스라엘에서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조치들을 취한다. 그 조치들은 이후 사회현상을 결정짓는 구조적인 요인들로 작용한다. ① 왕권세습의 확립, ② 정치적 중앙집중화(징집권과 과세권의 확립, 행정조직의 재편, 부역), ③ 사회적 계층화, ④ 토지보유권의 이전, ⑤ 대외무역, 외교 및 전쟁, ⑥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의 혼란 ⑦ 이상과 같은 전반적인 사회적 격변은 자체의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그 결과 대다수 민중은 다윗왕권과 솔로몬으로부터 이반하게 된다.
2) 왕국의 분열 -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솔로몬의 철권통치에 반기를 든 북이스라엘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독자적인 왕국을 수립한다(주전 9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국을 세움과 동시에 단과 베델 두 곳에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송아지를 만들어두는데, 이것은 예배장소의 단일화 원칙에 위배되어 이스라엘의 ‘원죄’의 구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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