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02] 일제하 독립운동과 민족ㆍ민중교회의 형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5-10 21:25
조회
166
천안살림교회 2023년 상반기 수요 강좌 제2강 / 2023년 5월 10일(수) 오후 7시
주제: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 강사: 최형묵 목사

제2강(5/10) 일제하 독립운동과 민족ㆍ민중교회의 형성

1-1. 한국인의 자발적인 요청에 따라 선교사의 입국(알렌 1884,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1885)과 더불어 초기 한국교회 선교는 본격화된다. 초기 선교활동은 기존의 신앙공동체를 거점으로 하거나 특정한 영역, 곧 의료와 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조선정부가 ‘전도’ 공식허용 1898년). 하지만 기왕의 신앙공동체를 기반으로 교회를 형성하는 것도 가능하였고(1887년 장로교 정동교회[새문안교회], 감리교 베델교회[정동제일교회]),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효과 또한 지대하였다. 특히 여성교육에서 선교학교의 역할을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선교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은 성서번역에도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1910년에『성경전서』를 출간하게 되었다.
1-2. 초기 한국선교는 주로 미국교회(북장로교, 남장로교, 북감리교, 남감리교)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점차 영연방국가들로 확대되었다(영국, 캐나다, 호주 등). 이후 더욱 다양한 교파교회들이(성공회, 구세군, 성결교, 안식교, 정교회 등)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경합이 이뤄지자 선교지 분할 협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1924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가 구성되었으나, 교파형 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1-3. 기독교 선교가 본격화할 즈음 국난의 위기가 겹쳐 있었고, 이는 교세확장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특히 청일전쟁(1894~5), 러일전쟁(1904~5), 그리고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1910) 등이 그 계기이다. 특히 전쟁의 주요 격전지였던 서북지역에서의 교세확장은 더욱 뚜렷했다. 이로 인해 서북지역은 선교초기의 역할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신앙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때 교세확장은 주로 구령운동의 성격을 띤 부흥회를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동시에 기호지역 등을 중심으로 양반과 지식인층(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등)의 입교도 활발해졌고, 이즈음 기독교 신앙은 민족주의와 결합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2. 1919년 3.1운동은 민족사적 사건이지만, 한국 민중 가운데 뿌리내린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3.1운동과 관련한 전체 체포 및 기소자 19,525명 가운데 개신교인 3,373명(천주교인 55명)으로 17.3%를 차지하여 천도교인 2,283명(11.7%)보다 많았고, 유학자와 불교도는 2~3백 명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피소자 가운데 244명의 교역자가 포함되어 천도교와 불교 교역자의 2배가 넘었다. 특히 여성 피소자 가운데 개신교인은 471명으로 전체의 65.6%를 차지하였다. 당시 한국인 1천 6백만 가운데 개신교인은 23만 2천명(1.5%)에 지나지 않은 형편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로, 짧은 기간 안에 민족ㆍ민중교회로서 자리잡은 기독교의 성격을 보여준다.

3-1.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언론ㆍ출판ㆍ결사의 자유가 더 확대되었다. 개신교계에서도 애국계몽운동과 더불어 출판문화가 활기를 띠었고 그만큼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제기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의 변화와 더불어 초기에 해외로 유학한 이들이 귀국하며 한국교회 지도력을 형성한 몫도 컸다.
3-2. 민권운동의 맥락에서 3.1운동이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당대에는 독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망감도 컸다.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한편 더욱 급진적인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이 펼쳐졌고 그 흐름에 많은 기독교인들(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이동휘, 김구, 손정도)이 합류하기도 하였지만, 교회 안에서는 내세적인 희망을 바라는 신앙이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일제의 정책을 따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방침도 주요한 몫을 하였다.
3-3. 대중적 차원에서 부흥회를 중심으로 하는 내세지향적 신앙이 강화되고,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고 있는 교회의 지도층에 의한 애국계몽운동과 절제운동 등이 펼쳐질 때 사회주의의 도전은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양립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는 기독교인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교회는 반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3-4. 한인의 이주와 함께 해외 한인교회의 확장이 이뤄졌다. 해외 한인사회 코뮤니티 형성에 교회가 구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이즈음부터였다.
3-5.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교회 내 신학적 갈등도 첨예화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여권(女權)문제와 『단권성서주석』문제였다.

4-1. 일제 말기 전시체제로의 전환은 교회에도 큰 시련이 되었다. 1936년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이 추진되었고, 1937년 중국 본토 침략, 1941년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일제에 의한 종교 전반, 그리고 교회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고, 전쟁 말기에는 선교사마저 추방당하고, 더불어 교세약화 현상까지 나타났다.
4-2. 전시 동원체제하에서 부일협력 문제가 심각해졌고, 교회에는 특별히 신사참배가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해방 후 교회 진통의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

5. 일제 강점기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다양한 신앙형태가 그 원형을 형성한 시기였다. 그것은 교회 안의 신앙으로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 또는 한국 근대화의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구상은 실제로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어 왔고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5-1. 주로 부흥회를 통해 형성된 교회 대중의 신앙은 내세지향적 성격을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위기가 일상화된 한국근현대사에서 이 신앙은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다.
5-2. ‘자아개조 민족주의’(Kenneth Wells)로 일컬어지는 민족의식에 투철한 서북지역 기독교 선각자들(이승훈, 안창호 등)은 반공주의와 미국적 자유주의로 한국사회를 구상하였다. 이 흐름은 훗날 『사상계』를 중심으로 결집하며, 한국 근대화 구상에 가장 뚜렷한 유산을 남겼다.
5-3. 간도지역의 민족운동과 주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형성된 신앙의 전통(김약연, 김재준, 강원용,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은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5-4. 오늘날 잊혀진 전통이 되었지만,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그 선구자가 된 기독교인(이동휘, 여운형 등)의 전통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5-5. 소수이지만 『성서조선』그룹(김교신, 함석헌 등)과 그 후예들(유달영, 이찬갑, 장기려 등)의 신앙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반국가주의와 함께 자율적 신앙공동체를 추구한 이들의 실천은 오늘날 조합운동과 대안적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5-6. 이상의 여러 신앙 갈래들은 때로는 입장을 공유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는 가운데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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