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강좌

[2017 상반기 제6강] 서로 거드는 짝으로서의 여성과 남성 - 여성의 권리와 양성평등의 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6-14 22:05
조회
835
살림 인문교양강좌 2017년도 상반기 강의
주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권리 - 국민주권 시대에 다시 읽는 성서
강사: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제6강(6/14) 서로 거드는 짝으로서의 여성과 남성 - 여성의 권리와 양성평등의 길


1-1.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현상을 주목하자면, 그 주요 현상으로 소외, 착취, 차별을 들 수 있다.
1-2. 소외란 인간과 그 자신의 잠재력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착취란 물질적 관계 안에서 잉여생산물을 빼앗기는 것을 말하며, 차별은 이데올로기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차별이란 단지 차이 그 자체를 뜻하지 않고 그 차이가 우열의 관계로 설정되는 것을 뜻한다.
1-3. 이 세 가지 고통의 현상은 서로 같지 않고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지도 않지만 상호작용하며 각각의 현상을 강화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해법도 각기 다르지만 효과적인 공통의 해법을 추구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특별히 모든 고통의 현상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조건에 따라 효과적인 해법이 모색될 수 있다.

2-1. 인간사회가 역사적으로 경험해온 여러 차별들 가운데 성차별은 가장 오래된 차별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성과 남성과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로서, 성차별의 정도에 따라 그 사회가 ‘인간적’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다.
2-2.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여성 차별이 계급사회와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적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2-3. 문화인류학적 또는 역사적 자료들을 일일이 들춰보지 않더라도 대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 신화나 설화 등에서 성차별의 현상이 노골화되지 않거나 오히려 여성이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경우를 보면, 성차별(여성차별)이 분명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을 가늠해볼 수 있다.

3-1. 그렇다면 성서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우선 성서는 남성가부장제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역사적 조건 안에서 형성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성서는 전승되고 기록된 시점의 역사적 한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그 점에서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성서는 압도적으로 남성가부장제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3-2. 그러나 성서가 만일 전적으로 역사적 한계 안에만 머물고 있다면 성서의 보편적 의미는 재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진실을 담고 있기에 오늘날까지 인간 구원과 해방을 향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성서 서사시의 위력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 평등의 추구 등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설득력이 강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서 우러나온다. 성서는 모든 인간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깊은 의식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이스라엘 핑컬스타인 외,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3-3.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성서는 남성가부장제의 시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여성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시대적 한계를 지닌 남성가부장제에 기초한 통념에 균열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동등한 양성관계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중요한 전거들이다.

4-1. 전통적으로 창조 이야기 가운데 남자와 여자에 관련된 대목(2:18~25)은 남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 논란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1534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해부학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갈빗대가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했을 때 그는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지탄받았다.
4-2. ‘갈빗대’로 번역된 히브리어 ‘첼라’는 그냥 ‘한쪽’을 의미할 뿐이다. 한편 수메르어 ‘갈비뼈’와 ‘생명’은 ‘ti’의 동음이어이기도 하다. 갈비뼈는 활과 달(iti)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여성을 ‘생명’과 연관지어 이해한 고대적 인간인해의 흔적일 뿐이다.
4-3. 성서는 하와를 일러 아담의 ‘알맞은 짝’이라 한다. ‘알맞은 짝’, 그 말은 원래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뜻한다. 반으로 딱 갈라져 좌우대칭을 이루고 한 가운데는 서로 붙어 있는 모양이다. 남녀관계는 그와 같이, 붙어 있지만 떨어져 있고 떨어져 있지만 동등하게 한 형상을 취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을 시사한다.

5-1. 성서가 전하는 예수의 족보(마태 1:1~16)는 통상적으로 남성중심의 가계도를 서술하면서도 특이하게 세 명의 여성을 등장시킨다. 다말, 라합, 룻이 그들이다.
5-2.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주인공 다말(창세 38:1~30)은 강고한 남성가부장제의 질서하에서 남성들의 음모를 무너뜨리고 당당한 가족 구성원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5-3. 라합은 이방 여인으로서 출애굽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에 입성할 때 그 성 내부에서 이들을 도운 여성(여호 2:1~6:25)으로, ‘이방 여성’으로서 이중적 차별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이스라엘의 구원사의 지평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5-4. 룻 역시 이방 여성으로서 다윗 왕의 조상을 낳은 주인공이 되었다(룻기). 룻의 역할 역시 이른바 ‘순수 정통’의 계보에 관한 이데올로기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5-5.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 외에 구약성서에서 두드러진 여성으로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미리암(출애 1:1~민수 20:1)과 여성 사사 드보라(사사 4:4~5:15)를 들 수 있다. 특별히 미리암은 ‘위대한 여성’이자 동시에 ‘위험한 여성’으로서 이중적 면모를 지닌 존재로 등장하고 있어, 남성가부장제 사회 안에서의 두드러진 여성 존재에 대한 시선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5-6. 민족을 구한 여성 에스더(에스더서)는 전형적인 규방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민족을 구한 구원자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6-1.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여러 종교적 전통 가운데 나타나는 세 가지 구원자상, 곧 왕과 같은 구원자, 위대한 어머니로서 구원자, 어린이 구원자상이 있다. 어머니로서의 구원자(모성적 구원자)는 사람들의 탄원을 들어주는 중보자이다. 성모 마리아는 그 전형에 해당한다. 사람들의 내면의 심층세계에서 어머니로서 구원자상이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여성 존재의 근본적 역할을 환기시킨다.
6-2. 한편 동정녀 탄생 이야기에서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는 부정되는 반면 육신의 어머니의 뚜렷한 존재는, 기존의 부성적 권위에 의존하는 질서의 부정과 함께 모성적 포용을 따르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부추긴다.

7-1.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누가 10:38~42)는 예수께서 남성 제자들과 여성 제자들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전거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친근함의 표현이 아니라 선생과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전용적인 표현이다.
7-2. 부활사건의 첫 증언자로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실(마태 28:1~10; 마가 16:1~8; 누가 24:1~12; 요한 20:1~10)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여성들의 몫을 말한다. 그 주인공 여성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이들의 몫은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가장 결정적인 부활사건의 첫 목격자요 증언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부활사건의 갖는 의미를 말해준다. 부활사건은 주변인으로 차별을 받던 사람들이 주역이 되는 사건이다.

8-1. 사도 바울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지평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부정하였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8-2. 그러나 오늘날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가장 빈번히 인용되고 있는 것이 또한 바울의 서신이다. 예컨대 앞서 말한 여성의 존재에 대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언급과 달리 다른 대목에서는 아예 혼란스럽거나(고전 11:2~16) 부정적인 언급(고전 14:34)이 등장한다. 여성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부정적ㆍ소극적 견해는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한편, 구체적 관습에 대한 태도에서 시대적 제약을 뛰어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면 또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 고린도전서 14:34이하 내용의 경우 심각한 주석상의 검토를 필요로 한다. 여성에게 공적 발언을 허용하지 않은 그 구절이 바울의 서신 원문에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8-3. 한편, 바울은 유대교에서 결혼생활을 의무화하고 있는 데 반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결혼관계에 대해서 거부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권면함으로써 ‘해방적’인 가족관계를 말하고 있다(고전 7장).

9-1. 오늘날의 성차별은 어떨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적어도 법적인 차원에서는 성차별이 상당부분 해소된 것으로 간주된다.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는 법적인 의미에서 만인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로운 노동력의 구매는 자유로운 개인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9-2. 그러나 실제로 성차별이 해소되었을까? 앞서 말했듯 차별은 착취와 구별되지만,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 논리는 차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착취는 수많은 차별로 훨씬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 차별이 많을수록 저임금 노동은 강화되고, 따라서 착취는 강화된다. 차별이 착취와 구별된다고 하지만, 차별은 물질적 착취를 강화하는 조건이 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차별은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9-3. 그런 차원에서 성차별의 문제를 생각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고유한 역할로 간주된 ‘돌봄 노동’의 의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의 지위의 변화는 세 단계를 거쳐 변화되어 왔다. 첫 단계로 ‘분리된 영역’으로 가족에게 맡겨지는 방식, 다음 단계로 ‘가족 임금’으로 적절한 보상을 하는 방식, 마지막으로 오늘날에는 ‘맞벌이 가족’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낸시 프레이저, “자본과 돌봄의 모순”, <창작과 비평> 175[2017/봄] 참조). 이런 변화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는 표면적으로 향상되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성차별의 물질적 조건을 변화시켰는지는 의문이다.

10. 차별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상 또는 이데올로기상 태도의 변화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의식적 노력을 강구하여야 하지만, 차별을 강화하는 물질적/실질적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는 노력과 더불어 극복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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