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양극화 사회가 빚은 비극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0-03-14 23:04
조회
2770
*<주간 기독교> 다림줄 세번째 원고입니다(100315).


양극화 사회가 빚은 비극


‘길태’, 길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라는데, 이 이름은 부산여중생납치살해 피의자의 이름이다. 범죄의 흉악함을 떠올리지 않고 그 이름만 보면, 마치 모든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는 그럴 듯한 은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그런 고상한 은유와는 전혀 상관없다. 한 개인의 실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일 뿐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운 그의 양부모가 붙여준 이름이란다.


그가 붙잡혔다는 기사와 함께 짤막하게 소개된 그의 삶의 배경과 이력을 보자니 그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그의 삶이 어땠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그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련만, 불행하게도 그의 삶은 일탈자로서 방황하는 삶이었던 것 같다. 그를 낳아준 어머니가 어떤 사연 때문에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그를 따듯하게 안아줄 수 없었던 냉혹한 현실이 그를 그렇게 흉악한 범죄의 상황으로 내몬 것이 아니었겠는가? 탄생의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은 그의 삶은 배경은 처음부터 안락한 가정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를 키워준 양부모의 정성도 처음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삶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한 모양이다.      


심경을 착잡하게 만든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범행의 장소이자 그 범행의 희생자가 된 여중생이 살았던 주변환경 또한 새삼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었다. 근래 5년 동안 주요 어린이 납치 및 살해 사건이 일어난 곳이 모두 치안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가난한 동네’라고 한다. 범인이 붙잡힐 때까지 떠나지 못했던 이번 사건의 현장은 전형적으로 그와 같은 동네에 해당한다. 부유층이 사는 지역과 달리 서민들이 사는 지역은 부족한 재정 탓에 상대적으로 치안시설이 부족해 범죄의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 실상이다. 사회적 양극화가 치안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범행자도 범행의 희생자도 사회적 양극화의 어두운 그늘 안에 놓여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이니 범죄자를 더욱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저 허망하게만 들린다. 범죄자에게 발찌 팔찌 다 채운다 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끔찍한 범죄는 범죄자의 삐뚤어진 동기와 인성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부유한 사람들은 세금까지 후하게 감면 받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일상의 삶 자체를 전쟁터처럼 경험하고 있는 양극화의 현실이 극복되지 않는 한 그 비극은 끊임없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그 두려운 현실을 넘어서는 길은 누구나 살 만한 사회를 일구는 데 있을 뿐이다.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복지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따라서 그와 같은 범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도 있다. 지금 4대강개발사업과 같은 엉뚱한 데 돈을 쏟아 부을 때가 아니다.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보다 앞서 서둘러야 할 일은 이 사회의 구성원 누구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 받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