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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명체계와 핵에너지 문명 [장회익]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1-05-15 22:38
조회
2773
생명체계와핵에너지11  <본질과현상> 2011 여름호 게재예정



                  지구 생명체계와 핵에너지 문명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저지른 실험실 사고>


  이미 오래 전 나는 간단한 실수로 실험실 사고를 낸 일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사관학교 물리학 교관으로 근무하던 시기였다. 당시 말단 장교였던 내게는 강의 이외에 물리실험실 관리라는 추가 업무 하나가 더 맡겨졌다. 그래서 정규 교육 외에도 외부 인사들에게 실험실을 안내하고, 때로 흥미로운 몇몇 장치를 조작해 시범 실험을 수행해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시범 실험으로 단연 인기를 끌던 것이 바로 ‘전자의 운동을 눈에 보이게 해주는’ 실험이었다. 진공으로 된 커다란 유리관 안에 일정한 속도로 전자들을 뿜어내는 장치가 있어서 여기에 강한 자기장을 걸어주면 전자들이 원형궤도를 그리며 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직접 볼 수는 없다. 전자는 너무도 작아 육안은 물론 아무리 배율이 높은 현미경으로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리관 속에 특정한 기체가 아주 낮은 밀도로 살짝 담겨 있으면 이 전자들이 이 기체 분자들과 충돌하여 파란 불빛을 내게 되는데, 여러 개의 전자들이 원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으므로 그 원형 궤도 전체가 파란 빛을 내게 된다. 그러니까 전자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자들이 그 궤도 안에서 기체 분자와 부딪치면서 내는 불빛을 보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충돌이 궤도 전체를 따라 무수히 발생하므로 마치도 전자의 궤도 자체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전자의 궤도를 눈에 드러나게 해주어 다들 무척 신기해하던 실험 장치였는데, 그만 내 순간적인 실수로 인해 전류가 과도하게 흐르면서 유리관 속에 들어있던 회로의 일부가 녹아 끊어져버렸다. 이 유리관은 영구적으로 봉쇄된 것이어서 수선할 방법이 없고 오직 교체를 해야 하는 데, 이것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고가의 품목이었다. 결국 이 실수로 인해 물리실험실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장치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 내게 책임추궁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일로 인해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실험실에서의 사소한 부주의라는 것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구나 하는 것이었고, 내가 만일 앞으로 이러한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며 평생을 부주의에 대한 경계를 의식하며 살아야 할 입장에 놓인다면, 이것이야말로 내 생애를 얼마나 옥조이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고를 계기로 내가 이후 물리학자가 되더라도 평생 실험실을 지켜야 할 실험 물리학자는 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인슈타인도 대학생 때 실험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낸 일이 있다. 그는 이 사고로 몸에 상처를 입고 한 쪽 팔에 몇 바늘이나 꿰매는 치료까지 받았고, 그 후 대학에서는 그에게 더 이상 실험실을 자유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결국 그로 하여금 그토록 즐기던 실험에서 손을 떼고 이론 물리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인지는 현재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계속 실험에만 매달렸더라면 아마도 오늘 우리가 아는 아인슈타인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험이 위험해서 혹은 이 위험을 끝없이 경계하며 사는 생활 자체가 지겨워 이 길을 기피한다는 것은 다분히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자세로 비치기도 한다. 나 자신이야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실험실이 있을 바에는 누군가가 그 작업을 담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왜 우리가 꼭 그 위험한 실험들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묻고 싶다. 물론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이에 관련된 지식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고, 이것은 다시 이것들을 통한 물질적 활용 곧 물질문명의 진전을 더디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물질문명을 그렇게도 빨리 진전시켜야 하는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이러한 물질문명의 진전이 오히려 더 큰 폐해를 가져오지는 않는가?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한 사람의 실험 물리학자가 더 생기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이론 물리학자가 더 나타나 자연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것이 오히려 개별적 사실을 더 발견하여 활용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 것보다 나은 일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도 아인슈타인이나 내가 굳이 실험 물리학자로 한 생애를 마쳤던 것보다는 이론 물리학자로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명의 추이를 살피고 예견할 수 있는 한 사상가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보람된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방향의 전환이 실험실에서의 이 작은 사고들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이 사고들이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효과를 가져 온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일본 동부를 강타한 지진, 해일, 그리고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는 그 자체로 몹시 불행한 일이지만, 이를 단순한 천재 혹은 인재에 해당하는 사고로 보지 않고 우리 문명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면 이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일수도 있다. 이제 어째서 그러한지 그 이유를 한 번 살펴보자.

  

<태양에너지 문명과 핵에너지 문명>


  지구상에서 활용 가능한 에너지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보면 태양에 기원하는 에너지와 지구 자체에 기원하는 에너지, 이렇게 둘로 갈라진다. 태양에 기원하는 에너지는 햇빛을 직접 활용하는 경우 뿐 아니라, 녹색식물이나 녹색플랑크톤 등에 의해 영양물질로 변형된 생체에너지, 이들 가운데 일부가 동식물의 잔해로 굳어져 화석화된 석유, 석탄 등의 화석에너지, 그리고 햇빛이 물과 공기의 순환체계에 흡입되면서 만들어진 수력, 풍력 등의 운동에너지 등 매우 다양하다. 반면 지구 자체에 기인하는 에너지는 대표적으로 지열을 활용하는 지열 에너지와 지구 운동에너지의 일부가 변형되어 나타나는 조력(潮力) 등이 있고, 그 외에 우라늄 등 방사성 물질에 갇혀있는 핵에너지가 있다.

  한편 지구상의 생명체계는 전적으로 태양에너지의 소산이다. 뜨거운 태양에서 차가운 지구로 에너지가 전달될 때 그 에너지의 일부가 자유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으며, 이렇게 전환된 자유에너지가 만들어낸 매우 진기한 ‘자체촉매적(自體觸媒的) 국소질서(局所秩序)’ 체계가 바로 지구 생명체계이다. 태양에서 방출된 햇빛이 지구상의 풍요로운 물질체계에 흡입되면서 여기에 동적 교란을 일으키고, 이렇게 교란된 물질체계가 그 안에 변이(變異)가능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이 다시 여러 형태로 서로 결합되어 변이가능한 ‘상위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들을 계속 만들어나감으로써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생명체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즉 지구 생명체계는 상대적의 풍요로운 지구의 물질체계와 태양에서 오는 빛에너지가 정교한 상호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내고 있는 높은 수준의 한 질서체계이다.

  인간 또한 이러한 생명체계 안에 존재하는 한 무리의 자체촉매적 국소질서이다. 이러한 인간이 이 생명체계 안에서 주체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이 물질체계와 유동 에너지의 일부를 조정하여 자신의 생존여건에 유리하도록 변형시키려 노력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문명이다. 이때 인간이 조정하는 에너지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거의 전적으로 태양에 기원한 것이었다. 물론 지열을 비롯한 약간의 지구 에너지도 활용되어 왔으나 이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이 문명을 일러 ‘태양에너지 문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핵에너지의 활용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태양에너지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강력한 새 에너지원이 등장했고, 이것이 본격적으로 문명의 한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핵에너지 문명’이라 부를만한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핵에너지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태양에너지 문명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원시림’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생활여건과 ‘실험실’로 대표되는 또 하나의 생활여건을 대비시켜 생각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태양에너지 문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원시림 안에서 삶의 여건을 개선해나가는 노력에 해당한다. 이는 곧 수 백 만 년간 인류가 살아나온 환경여건을 바탕으로 삼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인위적 여건을 추가해나가는 생활방식이다. 여기에 반해 핵에너지 문명은 처음부터 극도로 정교화 된 실험실 여건이 마련된 것으로 보고 이에 맞추어 모든 생활 수칙을 설정해 나가야 하는 전혀 이질적인 생활방식이다. 이 두 문명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핵에너지를 활용할 경우 물리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기존의 생활방식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불연속적 장벽이 가로 놓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라늄 등 무거운 방사성 물질의 핵반응을 통해 발산되는 핵에너지는 햇빛이나 혹은 이에 바탕을 둔 다른 형태의 에너지들과 달리 지구 생명체계의 형성과정에 그 어떤 기여도 한 일이 없다. 그리하여 이것은 여타의 에너지와는 전혀 이질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위 입자가 지니는 에너지 량이 너무도 큰 것이어서 실제 생명체계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핵에너지는 지구 생명체계와 진화적 공존을 경험한 바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매우 파괴적인 독소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이 둘 사이는 분리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보는 핵에너지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지니고 있는 이 무서운 에너지를 어떤 형태로든 뽑아내어 활용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정상적인 생명체계와 핵 시설 사이에 뛰어넘기 어려운 무거운 장벽을 쳐놓으면서도 또한 일정한 통로를 만들어 드나들어야 하는 지극히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원시림’으로 상징되는 정상적 생태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지극히 인위적이고 위험스런 ‘실험실’ 상황을 설정하고 여기에 맞추어 최대한의 긴장 촉구성 행동규범을 마련해 살아나가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일부 종사자 혹은 전문가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관련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또 그 정책을 심판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이 결국 국민의 최종 판결과 연관을 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위험한 시설을 지켜낼 사회적 보안이 요청되며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모든 사람이 이에 대처할 심정적 그리고 현실적 대응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시설을 하나 유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지극히 위험한 실험실 언저리에 모여 이의 안전을 위해 모든 삶의 자세를 바꾸어 나가야 하는 아주 이질적인 생존방식이 됨을 의미한다.


<핵에너지는 원천적으로 위험하다>


  설혹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여 핵에너지의 안정적 관리가 가능하다면 이는 수용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핵에너지는 ‘원천적으로’ 위험하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아무리 인위적 안전을 꾀한다 하더라도 이 에너지는 원천적으로 우리의 관리 능력을 벗어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첫째는 지구 자체가 핵에너지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구는 단기간 존속되는 소규모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률적 안전성’이 높은 곳이다. 예를 들어 유한한 수명을 지니는 한 개인은 그의 생존기간 내에 천재지변을 당하지 않고 생애를 마칠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장기간 존속되는 대규모 존재에 대해 지구는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예컨대 몇 십만 년을 존속하는 대륙 규모의 존재는 결단코 대규모의 천재지변을 피해갈 수 없다. 긴 시간과 큰 규모에서 보면 지각의 단편들이 무작위로 움직이면서 엄청난 힘으로 서로 간에 충돌을 빚고 있다. 히말라야와 알프스가 모두 이렇게 해서 솟아오른 것이고, 백두산과 한라산 또한 이러한 지각변동의 산물이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지각변동은 쓰나미와 같은 무서운 부수효과를 동반하기도 한다.

  한편 핵에너지 발전 시설은 결코 단기간 존속되는 소규모의 존재가 아니다. 원자로 자체는 수 십 년간 사용하고 폐쇄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남긴 유해와 핵폐기물들은 거의 영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것들이 지닌 유해 방사능 가운데는 수 만 혹은 수 십 만 년의 반감기를 지니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또 핵 발전시설은 소규모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자로 한 기 한 기가 차지하는 공간 자체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지만, 이것은 이미 세계 도처에 수 백 기가 건설되어 있으며,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수 천 기가 들어설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시설 하나하나 모두 매우 정교한 수 천, 수 만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구나 이것들이 남기는 핵폐기물들은 날이 갈수록 쌓여갈 것이고 설혹 발전 시설 자체가 폐기된 이후에도 이는 무제한의 기간 동안 존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핵 발전시설 혹은 이들이 남기는 핵폐기물들은 필연적으로 지구적 규모의 불안정성에 노출될 것이며, 이는 곧 대규모의 핵관련 사고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둘째는 인체는 물론이고 인간이 만들어 조작하고 있는 모든 기구들이 핵 발전에서 나오는 강력한 방사능에 원천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시설 자체가 노후하며 이를 교체하는 작업 또한 간단하지가 않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사람 또는 장비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일단 접근한 모든 물체는 그 자체가 다시 방사능을 지니게 되어 위험물로 바뀌어버리므로 그 위험의 범위는 항상 늘어만 간다. 한 마디로 핵 발전을 위해서는 그 소재의 측면에서도 안전한 시설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인간이 지닌 성품과 주의력의 한계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시설의 안전성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시설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를 관리할 능력에는 원천적 한계가 있다. 이를 관리할 인간의 성품과 주의력은 그 자체가 진화의 산물인데, 이 진화의 과정에는 이러한 종류의 관리 작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진화의 과정에서는 기껏해야 개인의 부주의가 자신의 상해나 사망으로 이어질 뿐 인류멸종을 포함한 생태적 재해로까지 이어진 경험은 담겨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 본연의 성품과 주의력을 넘어서는 과제를 수행하자면 인간은 부단한 고역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역은 이것이 설사 실수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 삶 그 자체를 비참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이러한 결정적 실수로 자멸에 이르거나 설혹 생존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그 생존 자체가 극도로 참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대안은 없는가?>


  그렇다면 이것이 인간이 부딪쳐야 할 운명적 상황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구 생명체계는 삼사 십 억년에 걸쳐 태양에너지만으로 가동되어왔다. 인간 또한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 만년에 걸쳐 태양에너지 문명 안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해왔다. 이것이 바로 원론적인 대안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 복귀해야 한다.

  이는 곧 그간의 진전을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했던 진전이 무엇을 향한 진전이었던가를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인류의 과거는 원시림에서 출발하기는 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원시림으로부터의 탈출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시림 그 자체는 오랜 기간 인류가 부딪쳐 온 친숙한 여건이기도 했지만, 그리하여 인류는 여기에 여러 모로 잘 적응해온 생물종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이것은 인류가 안간 힘을 다해 극복해 내어야 할 여건이기도 했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두려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천둥과 번개, 가뭄과 홍수, 이렇게 인류의 앞에는 생존을 위해서만도 극복해야 할 난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인간은 그러나 자신이 지닌 신체 기능 그리고 몸 안에 비축된 근육의 에너지만으로 이를 해결해야할 여건에 놓여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향으로의 노력 그리고 이러한 방향으로의 심적 지향성들이 기나긴 진화의 과정 그리고 또 긴 문명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능과 가치관 속에 깊이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즉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배고픔을 채우려는 본능적 성향이 되새겨졌고 또 인간의 문화 코드 안에는 이러한 성취를 촉구하고 숭상하는 가치 의식이 담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향상 부족한 상황에서 부족을 경감하려는 시도 속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러한 지향성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만 나가는 일방적, 선형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극복을 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좋은 것이며 물자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 만큼 더 갚진 것일 뿐, 적정선을 감지한다든가 지나침에서 오는 부작용들이 이들 본능과 문화 코드 속에 각인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지능의 발달과 함께 도구를 사용하게 되고 다시 협동적 (때로는 착취적) 사회제도를 마련하여 근대적 문명을 이끌어냈으며, 여기에 다시 고도의 과학기술을 접목시킴으로써 오늘 우리가 보는 형태의 첨단적 기술문명을 이루어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처하게 된 주변의 여건은 크게 달라졌으며, 많은 경우 부족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잉을 염려해야 하고, 환경의 극복을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환경의 훼손을 걱정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 안에 각인된 본능적 욕구와 인간의 의식 속에 담긴 문화적 코드마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생리적으로 거의 고정된 것이거나 아니면 매우 느린 형태의 변화만이 가능한 것이어서 이런 급격한 여건 변화에 대처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오직 인간의 지성만이 이를 감지하고 경고를 발휘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자신을 그리고 사회를 움직이기는 역부족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사회는 이미 에너지 과잉 문명을 이루어 그 부작용이 온 천지에 진동하고 있지만 오로지 직선적 성장만을 지향하는 본능적 욕구와 문화적 코드로 인해 이러한 진단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부작용의 원인이 상황 여건을 넘어서는 과잉의 성장욕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부작용만을 의식할 뿐 그 원인 진단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요즘 이러한 사람들이 내걸고 있는 구호가 흔히 ‘지속가능한 성장’ 혹은 ‘녹색성장’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녹색을 상실한 것이 바로 성장 때문인데, 여전히 녹색을 내걸고 성장을 하자는 것이니, 이는 곧 ‘동쪽을 향한 서쪽’이라거나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을 이루고 있는 자기기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늘의 상황에서 ‘대안’을 찾아 앞으로 더 나갈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쳐 온 ‘원안’이 어디쯤 있었는가를 되돌아보는 것이 옳다. 우리는 오로지 성장이냐 아니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적정선이 어디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공장의 생산품은 끝없이 늘려나갈 수 있지만 살아있는 생물체는 적정의 크기까지만 성장한다. 적정의 크기에 못미처도 걱정이지만 이를 지나쳐도 문제이다. 내일을 걱정한다는 사람 그 누구도 인류가 지향할 물질적 여건의 적정선이 어디인지를 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더구나 우리가 이미 적정선을 지나왔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들은 모두 앞으로만 내달리라고 하고 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나가기 어려운 여건(이른바 ‘석유 정점’이 그 하나이다)에 부딪치자 이번에는 그 보다도 더 위험한 낭떠러지(핵에너지 문명)로 돌진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옛 서구 사람들은 오랫동안 비천한 물질들을 변형시켜 그들이 소망하는 값진 물질로 바꿀 비법을 찾고 있었다. 이것이 연금술이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이르러 그들은 드디어 연금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여 크게 흥분했다. 원자핵 반응에 의해 한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꾸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몇 십 년이 지나, 우라늄과 같은 방사성 물질의 핵분열 과정에서 엄청나게 큰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고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인류가 그 전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새 형태의 에너지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물질과 새로운 에너지의 출현! 그러나 이것은 축복이기 이전에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새로운 물질은 지구 생명체계를 형성해 온 안정한 물질과 거리가 멀었고, 이 새로운 에너지원은 지구 생명체계가 익숙한 태양에너지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희구하는 이상향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나마 지켜내고자 하는 지구 생명체계의 건강을 하루아침에 붕괴시킬 무서운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무서운 가능성이 현실로 표출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새 에너지원이 발견되고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것은 전대미문의 무서운 무기로 돌변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사실 초토화(焦土化)시켰다는 말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이는 모든 것이 불타서 빈터가 되었다는 뜻인데, 단순히 타고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방사능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사람이 발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재앙의 장소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인간의 언어 속에서 형용할 말조차 찾을 수 없을 처참한 재앙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길한 전조였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미명 아래 등장한 핵에너지 문명의 유혹이다. 이것이 특히 위험한 것은 이것이 에너지에 대한 끝없는 수요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에너지 그 자체는 적정의 량이 적정의 형태로 활용될 때에만 유용한 것이다. 마치도 지나친 약이 독이 되듯이 지나친 에너지의 활용은 생태계를 무너트리는 위험한 파괴력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인간에 대한 핵에너지의 재앙이라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지구 생명체계에 대한 핵에너지의 재앙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인간은 아직 지구 생명체계의 바른 생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과도한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사실 인간은 일상적 의미의 불(나무를 태워 얻는 식물의 생체 에너지)이나마 현명하게 사용할 지혜를 가졌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이 불을 사용한 지난 30만 년 이래 포유류의 다양성이 급격히 감소했는데, 이는 인간이 이들을 차례로 멸종시킨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인간이 화석 에너지를 넘어서 핵에너지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꽃과 열매, 벌과 나비로 상징되는 생태질서가 파괴되고 있다는 징조이다. 이는 곧 우리 생태계가 ‘육백만불의 사나이’로 변신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 한 드라마 시리즈에서, 특정의 사고로 두 다리와 오른 쪽 팔, 그리고 왼쪽 눈을 잃은 한 사나이가 육백 만 불을 들여 인공수족과 인공 눈을 해 넣은 결과 놀라운 괴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이가 인기를 끌었다. 우리는 지금 건강했던 멀쩡한 생태계를 불구로 만들어 인공 시설과 인공 에너지만으로 움직이는 괴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돌아갈 곳, 우리가 지향할 세계가 과연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파이프 관을 통해 음식물을 날라다 줄 실험실 상황인지, 아니면 꽃과 꽃 사이로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며 감미로운 열매를 맺어주는 원시림의 상황인지, 이것들이 모두 아니라면 과연 우리가 지향할 곳은 그 어디쯤에 위치할 것인지, 우리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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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5-1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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