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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노회 교토교구 제8회 교환프로그램 보고서 / 後藤正敏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9-25 20:22
조회
1284
2015년 8월 12일(수) ~ 18일(화) 일주일간 진행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제8회 교류프로그램 참가 보고서를 고토 마사토시 (後藤正敏 / 京都上賀茂教会)목사께서 보내오셨습니다. 번역하여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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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제8회 교류프로그램 보고서

2015년 8월 12일(수) ~ 18일(화)



고토 마사토시 (後藤正敏 / 京都上賀茂教会)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14~22)


한국에 다녀왔다. 인구는 5,000 만명, 국토는 일본의 4 분의 1, 수도 서울은 1 천만 명이 넘는 대도시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150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대전이라는 지역이다.


 대전노회, 정확하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전노회라 불린다. 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의 교류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10월 대전노회로부터 교토교구로의 방문이 있었다. 대전노회는 해외선교위원회를 설치하고 평소부터 해외, 그 가운데서도 일본교회와의 교류를 모색하고 있었다. 마침 양 교구와 노회를 잘 아는 안드레아스 호프만-리히터(Andreas Hoffmann-Richter) 선교사(독일 EMS)의 중개로 대전노회로부터 교류제안이 있었고, 양 교구와 노회의 만남이 준비되었다.

참고로 호프만-리히터 선교사는 민중신학 연구자이고, 교토교구에도 체재하였다.

이듬해 1997년 교토교구는 제안을 받아들여 상호방문을 거듭하며(4월과 7월) 소위원회를 결성하여 준비에 임했다. 그리고 1998년 6월 30일에 양 교구와 노회의 조인이 이루어진다. (그 날을 기념하여 6월 마지막 주일은 조인을 기념하여 양 교구와 노회를 생각하는 날로 삼고 있다). 교토교구에서 대전노회를 방문하여 「상호교류를 위한 동의서」에 조인하였다. 아울러 교토교구는 「상호교류를 시작하면서 - 사죄와 의지 표명」을 동의서에 첨부하였다. 또한 1999년 5월에는 대전노회로부터 일행(노회장, 해외선교위원회 위원장 및 서기)이 교토교구를 방문하여 제63회 교토교구 총회(장소 헤이안[平安]교회)에 참석하여 상호간에 문서를 교환하였다. 이후 18년 양 교구와 노회의 교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나는 제8회 교류프로그램(8월 12~18일)에 의장을 대신하여 참가하였다. 참가자는 4명. 고토 마사토시(後藤正敏)와 나가타 마유미(永田真由美)씨, 미구치 유리코(美口由里子)씨, 통역으로서 정부경(鄭富京) 목사가 동행하였다. 나가타씨와 미구치씨는 모녀관계로 탄바신세(丹波新生)교회에 속해 있다. 2인이 더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메르스(MERS)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염려 때문에 취소하게 되었다.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그러나 한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불러졌던 이웃나라도 이제는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불러지게 되었다. 일본의 언론에서는 정치경제에서부터 예능ㆍ사건 등, 물론 그 화제가 밝은 것에서부터 어두운 것, 가벼운 것에서부터 무거운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한국과 북조선 등 한반도와 관련된 뭔가의 화제가 일상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7년 여름이었다. 한국이 아시아경제위기에 내몰려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당시는 공항 내에 총을 지닌 군인이 배치되었던 시대여서 시내를 걸어 다니는 데도 나름대로 긴장감이 있었다. 그로부터 18년, 한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고층빌딩도 즐비하고 거리도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특히 도로망이 잘 갖춰진 것과 그 편리함은 놀라울 정도이다.  

최근의 한일관계는,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겨울연가’에서 시작된 ‘한류’를 통하여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이야기되었지만, 최근의 언론은 ‘차가워진 한일관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문제’ 등 역사인식을 배경으로, 한국에서 2013년 2월에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수상 사이에 수뇌회담이 아직까지 실현되고 있지 않다. 한국의 법원이 잇달아 내놓은, 식민지하의 피해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판결은 ‘반일’의 상징처럼 보도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헤이트 스피치는 멈출 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는 어느 때보다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교정상화(1965년)가 이뤄질 즈음에는 연간 1만 명 정도가 양국을 왕래했지만 지금은 하루 1만 명이 넘는 시대가 되었다. 이번 교류프로그램에 참가한 미구치 유리코(美口由里子)씨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한류 드라마에 빠져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고, 항상 유튜브로 한국의 방송을 보고 있다고 한다.

때마침 아베 수상의 ‘전후 70년 담화’가 한국에 있는 동안 공표되어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와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교토교구와 대전노회의 교류는 18년이 되고 있다. 곧 20년을 맞이할 만큼 세월을 쌓아온 데에는, 서로의 교류를 화기애애하게 받아들여 마치 이웃집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가 있었다.

  

1. 대전과 교토: 공동의 역사 지역

대전의 서쪽에는 부여(扶余)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옛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곳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6세기에 이른다. 실은 부여는 아스카(明日香) 지역과 자매도시 관계에 있다. 아스카 지역은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지만, 본래는 물론 부여이다. 도래인(渡来人)이 한국에서와 유사하게 도시를 만든 것이다. 이어 그 문화는 나라(奈良), 교토(京都)로 계승된다.

나는 홋가이도(北海道)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래서 혼슈(本州)를 ‘내지’라고 말했다. 나는 ‘외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하게 있었고, 대학 진학 즈음에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선택한 것은 학교가 교토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토는 일본문화의 중심도시이다. 그것이 이번 여행에서 겹쳤다. 교토, 나라, 아스카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부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국의 묘는 둥글게 성토가 되어 잔디가 촘촘하게 덮여 있다. 그 형태는 모태를 본뜬 것이라고 하는데, 왠지 부드러운 형태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태에 감싸여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것은 마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2. 독립기념일을 한국에서

8월 15일(토)을 한국에서 맞이했다. 딱 70년 전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 일본에서는 ‘종전의 날’이라 한다. 왠지 ‘패전의 날’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 날 정오 텔레비전을 통하여 ‘묵도’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1분간 침묵이 강요된다. 국화로 장식된 커다란 제단이 스크린에 비치고 검은 상복차림의 황족과 대신이 경건한 제단을 향하여 머리를 숙여 겉치레 말을 한다. 거기에 화려한 장식은 없다. 흑백의 세계이다. 왠지 그 때의 텔레비전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8월 15일. 한국에서는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축하한다. ‘겨레의 집’ 앞 광장에서는 대규모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콘서트장 같았다. 사람들은 이 날을 ‘광복절(光復節)’로 축하한다. 연도에는 많은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광장을 매운 시민들이 이 날을 축하하고 있다. 그 장식의 아름다움과 현란함은 같은 8월 15일인지 혼동하게 할 정도였다. 나에게는 흑백에서 컬러의 세계로, 장례식에서 결혼식으로 무대가 바뀐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맞았다. 아베 수상의 ‘전후 70년 담화’도 바로 전 날 발표되었다.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3. 한복을 입고 예배에

8월 16일(일)의 예배는 천안살림교회에서 드렸다. 최형묵 목사의 교회이다. 최 목사는 8월 2일(일) 가미카모에서 설교를 하였다. 같은 8월 중에 일본과 한국에서 강단을 교환하게 된 것이다.

공주의 시장에서 개량한복을 샀는데, 이것을 입고 예배 설교를 할까 했더니 최 목사는 자주 한복을 입는다고 했다. 예배의 흐름은 일본의 그것과 거의 같았지만, 피아노 반주에 장구가 함께 했다. 장구는 대표적인 한국 악기이다. 주악(奏楽), 그리고 찬양 소리가 컸고, 거기에 장구의 울림이 더해지니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다. 설마 한국의 교회에서 한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않았다. 그 만큼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설교에서는 윤동주(尹東柱)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회중 가운데는 국문학 교수가 계셨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물론 시집의 편찬과 발행에 이르기까지 그 전말을 알고 계셨다. 윤동주의 시는 순수 그 자체로, 대개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지만 한국어로 시를 쓴 것이 문제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은 모국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 행위조차 금지되었다. 그래서 체포되고 투옥되어 살해당한 것이다.

그 점에 대해 국문학 교수께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리나라는 모국어에 대한 존경이 결여되어 있다, 옛날에는 중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것이 일본어로 바뀌고 영어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언제쯤 되어야 한국어에 대한 존경이 회복될 것인가라고.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4.개성이 풍부한 목사들

나와 같은 세대의 목사들을 많이 만났다. 그 가운데 몇몇은 개척교회를 하고 있었다. 20년 전에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는 교회 임지가 많지 않아 많은 목사들이 처음부터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는 기성교회에 만족하지 않은 젊은 목사들이 많았다. 그 목사들이 20년 또는 30년을 거쳐 교회를 만들고 교회당을 세워 각기 독립하여 목회에 힘쓰고 있었다. 실로 활기찬 개성으로 넘쳐나서, 이른바 고정된 목사의 패턴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노회의 3역도 개성이 풍부했고, 방문한 교회의 목사들도 각기 그 존재감이 넘쳤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목사들이 많다고 느꼈다.  


5. 통역의 존재

이번에는 정부경(鄭富京) 목사가 동행해줘서 매번 정확한 통역이 이뤄졌다. 통역의 존재는 크다. 단지 말을 번역하는 것뿐이 아니고 상황을 숙지하고 목사로서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교토교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경 목사의 배우자인 이상경(李相勁)도 마찬가지다. 이 목사의 경우 양 교구와 노회의 교류 초기부터 통역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이 목사는 때로는 어려운 교류문서를 작성하고 조인하는 데에도 입회하였다. 뛰어난 통역자를 가진 양 교구와 노회는 행복하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양 교구와 노회의 교류가 지속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6. 이후를 향하여   

이것도 정 목사의 활약에 관한 것이지만, 프로그램 사흘째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슬슬 잠을 자야 할 즈음에 정 목사가 양 교구와 노회의 교류 20주년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자리를 같이한 나와 최형묵 목사는 그 열의에 압도되어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이 다가오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그 결론은 교류의 원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전노회에서는 ‘민주화투쟁’이, 교토교구에서는 ‘전쟁책임고백’이 그 원점이라 할 만하다. 양 교구와 노회의 가교가 된 안드레아스 호프만-리히터 선교사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20년간 교류를 맡아왔던 양 교구와 노회 목사들의 좌담회 또는 코멘트를 구하고 싶다. 그것이 20년 후로 이어질 것이다. 2017년 20주년을 맞이하는데, 대전노회와 교토교구에서 각각 기념식을 열면 어떨까. 책자를 만들면 좋겠다 등등.

또한 ‘전쟁책임고백’을 둘러싸고 지금 일본기독교단에는 이 고백을 당시의 의장 스즈끼 마사히사(鈴木正久)의 독단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최 목사도 정 목사도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문서든 공식화하기까지는 찬성도 반대도 있다. 근소한 차이로 승인되는 것도 많다. 하지만 일단 공표된 이상 교단의 고백으로, 의장의 이름이 붙는 것이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교단의 전쟁책임고백을 접하고 교단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한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한국 교회는 일본 교회로부터 정신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자매이다. 역사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때로는 맞물리고, 때로는 떨어지며 우리를 태우고 전진한다. 기본을 놓쳐서는 안 되며, 원점에서 눈을 떼어서도 안 된다. 때로 우리는 지엽적인 것에 문을 빼앗겨 줄기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7. 기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에베소서 2:14) 이 말씀을 모두에 내걸었지만, 이 성구가 한글로 기록되어 액자로 만들어진 것이 교구 사무소의 회의실에 걸려 있다. 양 교구와 노회 교류시 한국으로부터 기념품으로 증정되었다. 그것은 1999년 5월 제63회 교토교구 총회(장소: 헤이안[平安教会]교회)에서였다.

그것과 똑같은 글자체로 된 액자를 우연히 마주쳤다. 교류프로그램 6일째 반석위에세운교회를 방문했을 때 입구를 들어가 정면 벽에 그 액자가 있었다. “제가 썼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성작가와도 만났다. “교토교구 사람들은 항상 선생의 글자를 보고 있어요”라고 말해주자 무척 기뻐하셨다.


그 밖에 또 떠오르는 것으로는 정보의 교류 속도와 그 양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것은 10년 전과 격세지감이었다. 예를 들면, 나는 이번 교류에서 천안살림교회의 설교를 의뢰받았다. 8월 16일(일)의 예배 설교를 맡았다. PC에 송신기록이 남아 있어 추적해보니, 8월 11일(화)에 이상경 목사에게 설교원고를 첨부자료로 하여 보냈다. 원고는 이 목사로부터 최형묵 목사에게 전해져 교인이 번역하여 16일(일) 예배에 늦지 않게 맞춰졌다. 내가 일본어로 말하고 통역하는 분이 한국어로 말했다.

귀국하고 며칠 후 천안살림교회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내 얼굴 사진과 함께 일본어와 한국어 양쪽으로 모두 설교를 읽을 수 있었다. 내 음성도 재생된다.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조회 수도 알 수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접근 가능하다. 이것이 당연한 시대이다. 당연하다고 해도 역시 놀랍다.


<번역: 최형묵>


* 최형묵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10-30 20:30)
첨부파일 : 8thReportGoto.pdf
전체 1
  • 2015-10-04 08:25
    두 교구가 위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