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 이사야 49:1~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9-23 14:05
조회
9012
2018년 9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본문: 이사야 49:1~6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 이 말이 함축하는 뜻을 정말 실감나게 해 준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마침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기쁨을 나누는 주일이어 그 의미가 더욱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한 주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들뜨게 한 백두에서의 기쁜 소식은 제가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남북의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재삼 중요한 합의에 이른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백두산 정상에서 그 평화의 염원을 온 세계에 보여준 것은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어쩌면 날씨까지 그렇게 절묘할 수 있었을까요? 항공위성 사진을 보니 남쪽은 구름이 꽉 차 있는데도 북쪽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감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저는 한라에 있었습니다. 제주에서 열린 제103회 기장총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저는 여러분께 ‘완전무장’한 심정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정말 3박4일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정을 보내고 왔습니다. 그렇게 일정을 보낸 한라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과 더불어 그 기쁨을 나눕니다.
기장총회가 성윤리 강령을 제정하였고, 성폭력 예방을 위한 의무교육안이 가결되었고, 성폭력대책위와 성소수자 연구위 구성을 결의하였고, 성소수자 교인 목회에 헌신한 임보라 목사에 대해 이단정죄를 한 두 교단에 대한 규탄성명을 채택하였습니다. 성폭력 범죄 처벌을 위한 헌법개정안은 부결되었지만,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게 되어 그나마 기장이 체면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단몰이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마당에 그 광풍에 맞받아치는 결의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큽니다.
백두에서 한라에서 전해져 온 소식 모두 난관을 헤치고 마주하게 된 소식이어 그 기쁨이 큽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뜻을 향해 나아갈 때 그 희망이 어떤 열매를 가져다줄지 새삼 되새길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겪은 일들이 갖는 의미를 새기며,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본문말씀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백성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두 번째 이사야(40~55)의 예언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난의 상황 가운데 있는 시점에서 지난 역사를 회고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가 과연 성공한 역사일까요? 실패한 역사일까요? 소위 객관적ㆍ사실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실패한 역사입니다. 한 번도 역사의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는 변방 민족의 변변찮은 역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역사로서 성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성공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실패한 이스라엘 역사가 성공한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해석하고 기록한 성서의 정신세계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위대성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 평등의 추구 등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강렬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 있습니다. 성서는 모든 인간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깊은 의식을 웅변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대한 갈망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의 갈망을 집약한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쓰셨습니다. 본래는 “성서로 본 조선역사”였습니다. 그 ‘성서’를 ‘뜻’으로 바꿔도 아무 문제없고 오히려 그 뜻을 더 잘 드러낸다고 보았기에 훗날 그렇게 바꾼 것입니다. 그 뜻의 요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의 희망입니다.

본문말씀은 성서가 담고 있는 바로 그와 같은 보편적인 구원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을 선포하는 화자는 한 개인인지, 또는 집단적인 주체로서 이스라엘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는 이사야가 말하는 ‘고난의 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그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성찰하는 가운데 보이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본문의 앞 구절(1~3절)은 이 예언의 주인공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여기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그것은 뭔가 중요한 목적을 위해 그 주인공을 벼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4절에 이르면 탄식이 나옵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허비한 것 같았다.” 무슨 뜻일까요? 주인공을 칼로 화살로 만들어준 것은 뚜렷한 목적을 지닌 것이었는데, 그 목적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그토록 정의를 이루도록 외쳤건만 이스라엘은 정의를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이민족에게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예언자는 지금 그 시점에서 이 예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묘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아직 변화된 것이 없는데 예언의 내용은 반전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문익환 목사께서 “통일은 다 됐어!”라고 한 어법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뜻합니다. 우선은 정의를 이루지 못해 심판받은 사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보상해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전히 뼈아픈 실패는 실패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당하게 보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 역사적 실패로부터 마땅히 깨달아야 할 교훈을 깨달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의가 유린되었던 민족의 현실, 그래서 스스로 그 공동체를 보존할 수 없었고 압제를 겪어야만 했던 현실에서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한 목적을 재인식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의가 회복되고 더 이상 압제가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을 확인한 것,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보상입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5~6절에서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5절은 다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한 사실을 확인하고, 이어 6절에서 선택하신 그 뜻을 밝힙니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주인공인 하나님의 종이 선택받은 뜻은, 이제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가져왔던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그 지평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 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미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진정한 역사의 주 하나님의 인식입니다. 보편적 구원의 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하나가 잘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세계 만민이 구원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예언자는 쓰라린 민족의 역사에서 그 중대한 통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역사로부터 얻는 그 교훈, 그로부터 비롯되는 보편적인 구원의 갈망, 그것이 성서를 위대하게 만들고, 그것이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성서가 위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백두에서의 기쁜 소식에 관해서는 더 덧붙이지 않아도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들 한반도가 이제 세계평화의 밝은 빛을 제공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Peace Action, Kevin Martin, 2018.9.21.)
한라에서의 기쁜 소식에 관해서는 몇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3년 김재준 목사의 출교 처분이 계기가 되어 새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하여 헌신하여 왔고, 민족 통일과 평화를 위해 헌신해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문익환, 장준하, 서남동 세 분 뿐만 아니라 숱한 신앙의 선구들이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헌신해 왔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래서 기장총회 로고가 나타내듯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화살촉’ 역할을 한 것으로 자타가 이야기하기도 하고, 종종 우스갯소리로 ‘기장’이 있어야 비행기가 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화살촉이 무뎌졌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서 하나도 자유롭다 할 수 없을 만큼, 과거의 위대한 정신은 퇴색할 대로 퇴색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사안들, 다시 말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교회적 입장을 내기가 무척 어려워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전통이 있기에 여전히 사회 민주화와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관해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민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예컨대 성평등 인식이나 구체적인 삶의 관계 안에서의 평등 인식에서는 남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딱 꼬집는 속칭이 있지요? ‘진보꼰대’^^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번 총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헌의안들이 통과될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성평등 강령과 성소수자 연구위 구성 안건은 3~4년을 끌어온 사안들이었습니다. 반대하는 분의 말마따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폐기되기 기대되었던 사안들이기도 했습니다. 헌의안을 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기에 오히려 이번에는 기필코 통과시켜야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긴장되었겠습니까? 한 두 사안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며 관련하여 제기해야 할 사안은 더 많아졌습니다. 다른 사안들은 놔두고, 특별히 성정의와 관련된 사안만 6건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가운데 1건만 제외하고 5건이 통과되었습니다.
3~4년의 과정도 과정이려니와 이번 총회 3박4일의 일정 자체가 그 결전에 임하는 입장에서는 드라마였습니다. 이 시간 그 과정을 일일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극적 과정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총회가 열리고 환기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만나는 분마다 쟁점 헌의안들이 통과될 수 있도록 애써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중압감이 컸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실 ‘성평등’ 강령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 ‘성수자’ 연구위원회 통과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성평등 강령이 쟁점이 되어 격론이 벌어져 단단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곡절 끝에 통과되었습니다. 겨우 한시름 덜었지만, 정작 성소수자 건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적어도 연구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공감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었고, 성평등 문제로 격론을 겪었던 까닭에 의외로 통과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허락이오.’ 그 한마디로 너무나 평화롭게 통과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아멘, 할렐루야!’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성평등 안건에 대한 격론과 그 결론이 더 이상의 다른 논란을 잠재운 것 같습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의도하지 않았는데 반대자들에 의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단 정죄에 대한 규탄 성명까지 어떤 논란도 없이 채택되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성평등 강령이 제정되고 성소수자 연구위 안건이 대기상태인 중간에는 4.3평화 공원에서 추모예배가 있었고, 추모 탑 앞에서 제가 대표기도를 맡았습니다. 총회가 끝나고 덕담을 나누는 중 한 목사님은, 회의 막바지 모든 안건들이 순조롭게 통과된 것은 그 때 그 기도 덕분이라고 덕담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자격을 갖춘 상태로 기장총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헌의 책임자로서 시종일관 하나도 놓치지 않고 회의의 과정을 꿰고 있었고, 필요한 분들에게는 수시로 협력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미 뜻을 같이한 분들에게는 눈빛 인사로만으로도 충분하였고, 다만 필요할 때 수시로 다음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만... 결국 그렇게 화살촉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때 그 몫을 감당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예기치 않게 너무나 상식적인 성평등 강령이 문제되었을 때 기장 교회들의 성인식에 대해 정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시에 그 반대를 방어하지 못한다면 기대를 걸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공공의 적이 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대응에 나섰습니다. 위기 시에 강해지는 법을 다시 체득하는 기회였습니다. 그 한 번의 선방으로 한 건의 사안을 제외하고 다른 안건들이 줄줄이 해결될 줄이야! 총대 구성원이 상당부분 바뀐 조건에서 모두 마음을 모은 결과였고, 옳은 뜻을 포기하지 않고 외친 간절한 염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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