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구, 새 시대를 향한 갈망 - 누가복음 1:68~79[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2-02 15:18
조회
11326
2018년 12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구, 새 시대를 향한 갈망
본문: 누가복음 1:68~7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에게 또 다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 기다림은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뜻합니다. 이 세상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인간이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기대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면,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대림절이 함축하고 있는 기다림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대림절 첫째 주일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찬가를 함께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와 함께 사가랴의 찬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뤄질 꿈, 곧 메시야의 희망을 절절하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사가랴의 찬가 전반부는 장차 백성들 가운데 오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의 약속을 재삼 확인합니다. 예부터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노래합니다.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70~75).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겠다고 한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노래요, 믿음의 노래입니다.

사가랴의 찬가 후반부는 예로부터 선포된 그 약속을 이루기에 앞서 그 길을 예비하는 몫을 갖고 태어난 예언자 세례 요한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아기야, 너는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먼저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분은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76~79).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뤄질 꿈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노래하며, 그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맡은 예언자의 몫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노래하고 있는 꿈은 성서가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환기되어 왔습니다. 여전히 우리들에게도 꿈의 원천으로서 그 생명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꿈의 실상을 되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이 찬가가 노래하고 있는 꿈이 이뤄지는 과정을 새겨 보는 것은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도래의 희망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고 그 예비절차를 거쳐야 했을까요? 어째서 굳이 그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을 거친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신 걸까요?
그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의 차원에서 해명하자면,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은 사실 때문에 세례 요한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 격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굳이 역사적 사실 관계를 추정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그 길을 예비하는 이로서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실로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였던 역사의 의미, 다시 말해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해석으로서의 역사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 도래의 희망이 이뤄지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로서 역사를 넘어서, 역사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이로서 세례 요한의 등장은 희망을 바라는 사람들 가운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그 희망을 아로 새기는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은 인간의 희망, 그 희망이 이뤄지는 과정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그와 같은 통찰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가장 큰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모세의 퇴장 장면일 것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명 34:7) 눈빛도 형형하고, 기력도 정정하였는데, 어째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요? 그것은 단절의 마디를 지니면서도 연속되는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 새로운 주체의 등장으로 역사를 한 매듭짓고 있지만 그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되는 역사를 성서는 그렇게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가 1:14) 역시 역사의 단절과 연속, 달리 말하면 역사의 질적 전환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갔습니다만,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 그 두 사람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판이하게 다른 점은 그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례 요한은 금욕적이었던 데 반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무것이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광야에서 고결하게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든 즐겨 먹고 마시며 죄인들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즐겼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참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그 기쁨을 바라는 희망을 몸과 마음에 아로 새기는 과정이 인고의 과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인고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기쁨의 열매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26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 12:5~6).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펼친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한 세례 요한의 등장은 마침내 이뤄질 희망의 약속 앞에 있는 인간의 정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세례 요한의 역할을 언급한 대목에서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줄 것이다.”(1:76~77)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삶의 전환 가운데서 맛보는 구원의 내적 체험을 뜻합니다. 이것은 요한이 베푼 세례의 참뜻입니다. 삶의 결단과 전환을 함축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저마다의 인생을 돌아보면 항상 실감하는 굴곡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고비 넘기고 도달한 자리, 그 자리를 숙명적 조건으로 안다면 우리의 삶은 성장을 멈출 것이며, 우리의 역사는 전진을 멈출 것입니다. 한 고비 넘겨 처해진 자리, 그 자리가 최종 기착지일 수 없다는 자각이 다음 고비를 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그 자각을 함축하는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요? 그 자각은 단단한 무장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것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은 그 자각의 과정을 상징합니다. 비상한 의식입니다. 그 비상한 의식, 그 비상한 자각이 마침내 맛보게 될 새 희망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요?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촛불항쟁과 그로 인한 정권교체, 그리고 2018년 남북간의 대화와 평화체제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격변과 희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렇게 변화를 위한 열망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의 삶의 변화는 미처 실감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수구적 기득권세력은 여전히 큰 힘을 쥐고 있고, 촛불의 염원으로 탄생한 집권세력 역시 뒤뚱하고 있는 형세입니다. 일상의 삶의 현실에서 차별은 여전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살벌한 혐오의 목소리 또한 높습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가 무분별하게 폭발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범죄 또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삶의 평화는 아직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볼 때 이 땅의 민중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무려 100년이 넘게 그렇게 분투해왔지만, 놀랍게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한 번도 자신들의 권력을 온전히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민중들의 저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고, 그것이 역사를 올바른 방향을 향하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전진시켜 나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도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그 강고한 민중들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지위와 힘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는 것은 다른 한편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실 그 분에 대한 열망은 높지만 오실 그 분은 아직 저 멀리에 계시는 형국이라고 할까요? 예수께서 오시기에 앞서 그 선구로서 세례 요한을 필요로 했던 역사는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메시야의 선구로 이해할 수 있었던 역사 인식은, 아직 역사의 빛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이대로는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끊임없는 고통의 악순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바로 그 진실을 체감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각을 말합니다. 그 자각이 없는 백성에게 구원의 희망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자각으로 메시야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은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의 앞길을 열어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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