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 - 요한복음 16:23~33[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5-26 15:24
조회
11701
2019년 5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
본문: 요한복음 16:23~33



허! 어쩌자고 이렇게 심오한 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을까요? 본문말씀 가운데 몇 가지 단편적 구절들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전체 문맥을 헤아리고자 할 것 같은 쉽게 들어오지 않는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요한복음의 전체 문맥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제자들을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23~33절까지만 읽었습니다만, 사실은 16절부터, 더 나아가 16장 전반에 걸쳐 연결되어 있습니다. 16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매우 특징적인 대비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고 옴, 슬픔과 기쁨, 고난과 평화, 요청과 수락, 봄과 보지 못함, 비유와 공개적인 말, 불신앙과 신앙, 세상과 하나님이 계속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 대비는 이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성격을 분명히 해 줍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반전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이 말을 두고 제자들은 설왕설래합니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유로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의미를 다시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지금 너희가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고난을 겪고 마침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 다시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죽임을 딛고 일어선 부활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 예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 희망이 이뤄지리라는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25절이하의 말씀에서는 비유 대신에 당신이 말씀하신 말씀의 의미를 긴 설명을 덧붙여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줄여 말하면 예수께서 아버지께 돌아갔다가 되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이해하자면 예수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의 육체적 삶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현실, 보이지 않지만 덧없이 사라진 어떤 사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현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순간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방황의 순간이요, 시련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33절에서 예수께서는 선포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오늘 본문말씀은 시련으로 절망하기보다는 장차 맛볼 기쁨을 바라보며 용기를 갖고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집약하면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선언은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이 단호한 확신은 특별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6~27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특별한 증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요한복음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로고스가 싸르크스가 되었다,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인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어떤 세상 권세에 의해서도 짓밟히고 휘둘릴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문에 해당하는 17장 가운데 15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구체화됩니다. 요한공동체의 또 다른 성서인 요한1서 4장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체의 전반적인 이 믿음에 근거해 볼 때, 오늘 본문말씀의 단호한 확신은, 우리가 그 사랑을 체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 서로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삶, 그것이 그 누구에 의해 파괴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요한공동체의 믿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처럼 구체성을 띠고 있습니다.

요한공동체가 사랑의 진실을 역설한 데는 특별한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요한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유대전쟁 이후 자기 정체성을 강화해가는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인의 퇴출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련과 박해에 대응하면서 생존해야 했던 교회가 서서히 제도화되는 가는 과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맥락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의 제도화에 대한 요한공동체의 대응방식입니다.
교회의 제도화는 직분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직분이 위계적으로 배열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며 인격적 교감을 나눌 수 있고, 따라서 생동감 넘치는 형제애적 공동체로서보다는 조직으로서의 교회의 성격이 강화된 것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여러 지역교회를 아우르는 보편적 교회(가톨릭 교회) 개념이 등장하게 되지만, 긴박하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열정은 잃어버리는 폐해가 발생합니다. 교회는 확고한 제도와 교리에 의해 존속하게 되고, 회중은 그 질서에 복종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알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초기 교회가 처음부터 그렇게 확고하게 제도화되고 교리화된 것은 아니지만, 제도화의 경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그 맹아를 배태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공동체는 거기에 대해 다른 대안을 추구합니다.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 인격과 인격이 교감을 나누며,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지는 것과 같은 생동감 넘치는 교회공동체를 지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친밀한 공동체를 지향하며, 민주적인 교회를 지향합니다.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을 따라 그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완전하게 성취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는 세상 한 가운데 존재하고, 인격과 인격이 신뢰하고 존중하는 관계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사회 한 가운데 존재합니다. 또한 동시에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닮은 제도교회의 한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치 초기 교회들이 여전히 세상의 권세가 지배하는 현실 가운데 존재하며, 제도화되어가는 다른 교회들과의 유대 속에 존재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현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지향하는 바가 과연 그 현실 가운데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회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생동감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당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비춰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을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그것을 우리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겨우 그것을 이루고자 한 것만으로도 버거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교회 지향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친밀한 공동체로서 민주적인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간소화시켰고(폐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권위적 구조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하였습니다. 다음주일로 예정된 제3기 장로피택 절차도 바로 그 취지에 따른 한 가지 방편입니다. 장로제를 채택한 것은 한편으로는 제도교회의 일원이기에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러나 임기제로 하고 그 권한을 최소화한 것(공동의회를 명실상부한 최고 의결기구로 전제하고)은 권력과 권위의 독점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당회에 어떤 기능적 역할을 부여하기보다는 교회의 공동체성 구현을 위한 화합의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누구나 당당한 주체로서 교회를 일궈나가는 공동의 책임의식을 갖자는 취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증거해야 하는 교회의 궁극적 이상에 비춰볼 때 정말 작은 시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정말 그 본연의 목적에 맞게 구현해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일이 진정으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하나의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목회자의 입장에서 긴장이 되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직분을 세우고 나눠 맡는 것이 어떤 불화의 소지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적인 욕망과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염려 중에 오늘 본문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가장 먼저 저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직분을 세울 때 어째서 입후보 절차라든지 이른바 합리적인 절차를 채택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뭘 하겠다는 자세로 임하기보다는 선택받아 맡겨진 일을 겸허하게 감당하겠다는 자세로 나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현실의 교회에서 꼭 그렇게 운영되는 것만은 아니지만요.^^
한 주간 동안 깊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선택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그 행위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생동하는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선택되어 직분을 맡게 된 분은 누구든 겸손하게 그 선택을 따라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세상 널리 전하는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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