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4/19 온라인 가정예배] 새 힘을 얻으리니 - 이사야 40:25~31[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4-18 20:01
조회
27980
2020년 4월 19일 부활절 둘째 주일, 장애인주일, 4.19혁명기념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 피아노 백수현 / 장구 정문자 / 찬양 김광식 김성윤 서윤아 이민영 이지수 / 음향 이장희 / 촬영 최시내

* 오늘 예배를 위하여 수고하여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잘못으로 재난이 끊이지 않고
오늘 여전히 코로나19로 위기에 처해 있는 가운데서도
놀라운 섭리의 손길을 펼쳐 주시어
온갖 지혜를 모아 위기에 대처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지난 주간 나라의 일꾼들을 뽑는 선거를 통해
놀라운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펼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새기게 하여 주십시오.
저마다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온 생명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새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내 주님은 살아계셔”(새찬송 170 / 통일찬송 16)/ 다같이


묵상과 성찰/ “은혜가 깊은 시절”(류형선)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 / 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나영주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이사야 40: 25~31 / 홍은영 교우


말씀나누기/ 새 힘을 얻으리니 / 최형묵 목사


2020년 4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새 힘을 얻으리니
본문: 이사야 40:25~31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부활의 의미를 함께 났는데,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새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이 허황된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믿는 것 또한 허망한 환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간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총선결과가 놀랍습니다. 겸허히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 민심이 무엇인지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 순간에 벌어진 사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침 4.19기념일기도 합니다만, 가깝게는 촛불항쟁, 멀리보자면 100여년 이어온 저항의 역사, 그야말로 지치지 않고 지속해온 저항의 역사, 그 가운데 지켜온 질긴 믿음이 정말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 아닐까요? 이번 선거 결과가 그간 질기게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수구세력을 뒷전으로 물리게 되는 계기가 될지는 그 의미를 제대로 새기고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장차 결정 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근본적으로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근원적인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믿는 잘못된 가치관, 절대화될 수 없는 것을 절대화하는 착각, 그것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우리가 궁극적 목적으로 두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자리를 마땅히 인정하는 믿음이 어떤 삶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두드러진 ‘신학적 거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사도 바울이라는 신학적 거인을 통해 형성되었다면,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상당 부분 이사야라는 신학적 거인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의 선포 첫머리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바빌론에 포로로 복역 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해방을 알리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선포하며,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몇 가지 핵심적인 사상을 전하였습니다. ‘창조의 주’이자 동시에 ‘역사의 주’인 하나님을 선포하였고,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진 ‘수난의 종’으로서 메시야 사상을 선포하였습니다.
본문말씀이 포함된 이사야 40장은, 아직 바빌론의 포로로 붙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외치며, 이 세상의 창조자이며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믿을 때 해방의 구원을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은 몇 가지 차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역설합니다. 첫 번째(12~14) 산과 바다, 온 세상을 보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을 역설합니다. 두 번째(15~17) 뭇 민족, 뭇 나라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 다음(18~22)은, 그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신학적 사색이 아닙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외치고 있는 선언입니다. 강대국 바빌론의 포로로 붙잡혀 두려움과 낙담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무력하시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포로로 붙잡힌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민족들의 역사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23~24)는 구체적으로 힘 있는 인간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드시며, 땅의 지배자들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신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사회가 쌓은 권력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 세상의 지배자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선포입니다. 그 하나님을 과연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네 번째 초점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바빌론의 신들인 일월성신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역설합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빌론의 종교를 부정하는 이 선언은 결국 그 종교에 의해 뒷받침되는 바빌론 제국의 질서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바빌론에 포로로 붙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 둘러싸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자의식이 희미하게나마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 당장 자신들을 붙잡아 둔 것들만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애초부터 어찌해볼 도리 없는 자연, 언제나 자신들보다 큰 힘으로 자신들을 짓누르는 나라와 민족들, 호령하는 통치자와 지배자들, 그 모든 것을 발아래 두고 있는 바빌론의 신들은 포로로 붙잡힌 이스라엘 백성에서 어찌해볼 도리 없는, 압도적인 조건들이었습니다.
그것들에 매여 있는 백성에게 예언자 이사야는, 이 세상의 창조자요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역설하며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지금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들과도 동일시되지 않고, 그 어떤 것들과도 비교되지 않은 하나님을 선포함으로써 백성에게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사야의 이 선포는 피조물의 하잘 것 없음과 인간의 무력함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지금 포로로 붙잡혀 있는 백성에게 위로를 선포하고 구원의 희망을 선포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 새로운 역사의 세계, 새로운 인간의 세계를 강조하는 데 근본 뜻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새로운 돌파구가 없이 자족적인 세계,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이 없는 폐쇄적인 세계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지금 보이는 것을 신적인 질서로 알고 있고, 그 세계 안에서 체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사야는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고 있고, 지금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압도적인 현실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바로 그 현실을 근본적으로 상대화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과도 동일시되지 않고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부름에 따라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그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며, 이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 그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는 이들의 적극적인 삶을 뜻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오늘 세계적인 차원에서 끊임없이 문명의 위기 상황이 나타나고 있고, 지금 너무나도 깊게 절감하고 있는 코로나19 위기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는 이유가 뭘까요? 누차 성찰하고 있지만,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과신, 무한한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내달린 인간 삶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자연을 소유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심지어 인간사회 안에서도 힘있는 인간이 힘없는 인간을 지배와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데 인간사회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을 계발하는 것을 거부해야 할 까닭은 없지만, 거기에는 항상 절제의 미덕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온 생명 안에서 인간의 몫을 알고 선용하는 절제의 지혜, 인간 세계 안에서 더불어 공존하기 위해 각 개인의 욕망을 절제하는 지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돈밖에 믿을 게 없다고 믿는 맹신의 세계,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뭐든 해도 좋다는 몽매한 세계는 하나님을 망각한 세계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우상숭배의 세계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동안 뼈저리게 겪어왔지만, 국가안보를 핑계로 인간안보 곧 인권과 생명을 뒷전에 미뤄두고, 경제성장을 이유로 자연과 사람의 삶 자체를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당연시해온 세력과 그 체제를 이제 자신있게 밀쳐낼 수 있다는 국민적 의지의 징후로, 이번 선거결과를 이해하면 지나칠까요?
저는 그렇게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신뢰감을 주었고, 그것이 이번 선거에 반영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집권여당에 힘을 실어주어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라는 요구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신뢰를 보내게 된 근본 밑바탕, 그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정책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선거 다음날 4.16 6주기를 맞아 대통령이 이야기했습니다.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와 대책 속에는 세월호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누구도 속절없이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사회적 책임’을 유산으로 남겨준 아이들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이야기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 실제로 능동적인 국가의 대처를 보여준 태도에 대한 신뢰가 이번 선거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코로나19가 모든 의제를 묻어버린 측면보다, 그 엄중한 위기에 국가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데 대한 국민적 신뢰의 표현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적극적인 방역뿐만 아니라 세계적 팬데믹 상황 가운데서도 전국적인 선거를 치른 유일한 나라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뜨겁고, 국민들의 자긍심 또한 높습니다. 그것은 정부의 일방적 역할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국민적 동의와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일련의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부터 이번 제21대 총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보면서,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운 장면을 곧바로 연상했습니다. 그 군중이 모인 자리에 혼란은 없었습니다. 들어가고 나가는 대열도 질서 정연했습니다. 나를 나되게 하지 못하는 세력에 대항해 100여년 이어온 저항의 역사, 그 역사의 자양분 덕에 이제 피어나는 꽃들과 나뭇잎새처럼 싱싱한 활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정말 진실한 것인지는, 오늘의 벌어진 사건을 보며 그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실현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의지와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옭아매고, 위아래를 구분하여, 결국 사람들을 우상숭배에 빠트리는 낡은 질서, 낡은 세계를 밀쳐내고 모든 생명이 진정으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 힘을 얻어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살림의 노래 245)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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