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지금 누리는 구원의 기쁨 - 데살로니가전서 5:1~11[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11-08 17:47
조회
8935
2020년 11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지금 누리는 구원의 기쁨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1~11



데살로니가전서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서신으로서, 최초의 바울 서신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전해진 신약성서 가운데 최초의 문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로마제국 시대에는 매우 번성한 국제적인 무역항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래 빌립보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소요사태로 고발당해 빌립보를 떠나게 되었고(사도행전 16장),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도 역시 소요사태로 고발당해 떠나게 되었고(사도행전 17장), 아가야지역의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아테네에서 디모데를 보내 공동체의 정황을 확인한 후 고린도에 머무르는 동안 기록되어(50~52년 어간) 전해졌습니다.
그 내용은,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어려움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온전히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다른 서신들이 상당 부분 논쟁적인 성격을 띤 데 반해 그러한 성격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이 그 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어떤 교리를 설파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초기 교회의 상황 그리고 초기 서신의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대목은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상황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이 너무나도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서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는 교회의 존재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1:2~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 그 믿음을 따라 사랑을 이루는 데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 사랑의 삶이 마침내 온전히 이뤄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그 뜻을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요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실상을 전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본질적 요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전반적으로 그렇게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칭송하고 격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4장 13절에서부터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기까지 구절에서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4장 13절에서 18절까지는 주님의 재림과 죽은 사람의 부활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뭔가 근심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공동체 내의 슬픔과 불안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초기교회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아니 더 실질적으로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도 재림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면 역시 믿음은 헛된 것 아니겠느냐 하는 우려와 불안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불안을 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는다면, 죽은 이들 또한 예수와 함께 살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15~18절에서 바울서신에서는 낯선 방식으로, 곧 환상적인 묘사로 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6~17)
여기에서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로마황제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어들을 그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묘사로 대체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주요 개념들이 여기에 모두 등장합니다. ‘주님’(퀴리오스)은 당시 황제에 대한 극존칭이었고, ‘임재’(파루시아)는 황제가 나타나는 것을 말했습니다. ‘영접’(아판테시스) 또한 황제를 맞이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 역시 황제의 등극을 환호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로마황제에 의해 번영을 누리게 된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이 그 용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되살아남과 영접으로 바꿔 말하고 있을 때, 그 의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시작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삶의 현실을 선포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슨 염려와 걱정으로 슬퍼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이들 때문에 발생한 불안과 염려는 결국 주님의 재림의 때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 상황을 유념하며, 오늘 본문말씀을 덧붙입니다.
바울은 그 때에 대해서 더 이상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먼저 확인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확인합니다. 더불어 양적인 시간(크로노스)의 차원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카이로스)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닥칠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제국의 평화와 안보가 확고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 질서가 극점에 다다른 순간, 거꾸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 많은 사람은 재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이 주는 안전에 의탁하고 있을 때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사도 바울이 정작 선포하고자 한 중요한 진실은 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도둑 같이 닥칠 그 날을 전혀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히 합니다. 이미 ‘빛의 자녀’, ‘낮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때’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가슴막이와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쓰고 어둠의 세력에 대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문제도 여기서 사실상 해소됩니다. 이미 그 삶을 누린 사람들에게 다시 손해 봐야 할 어떤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재림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염려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에서 종말에 대한 기대는 미래의 어떤 일이 아니라 현재 경험하고 있는 어떤 차원을 함축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동요 없이 정진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전반의 내용과 더불어 오늘 본문말씀의 이 마지막 부분은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구원의 현재성을 말합니다. 장차 이어질 어떤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 속에서 이미 누리고 있는 구원의 실재를 말합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염려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가장 손쉽게 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환상적 해결 방법입니다. 해결되지 않았는데 해결되었다고 믿는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원인을 밖으로 돌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사후보상에 대한 기대로 돌려버리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합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누군가 적대자를 만들어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하여 그에 대한 방어의 논리로 스스로 무장하고, 그렇게 무장한 이들만의 안전하고 확실한 내세의 구원을 강조하는 해법이 이런 경우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저 세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불안과 두려움의 현실을 직시하며 삶 가운데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손쉽게 답이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그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방법입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진정한 까닭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내가 해야 할 몫을 찾는 방법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절감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계를 절감하지만 이미 내 안에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낼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불어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길입니다. 이 때 다가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진실이 무엇일까요? 저 세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떨칠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맛보는 구원의 삶, 그것을 지켜내고, 전파하고 확장하는 것이 곧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의, 교회의 존재 의의입니다. 대적해야 할 온갖 대상을 찾아 사탄의 이름을 덧씌우고 자신들만 의롭다 생각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허망한 신앙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불안과 염려가 극복되지 않습니다. 고귀한 삶을 그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그 목적을 위하여 함께 헌신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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