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낡은 시대의 종교에서 벗어나야 - 사도행전 17:22~3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4-25 20:05
조회
13192
2021년 4월 2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낡은 시대의 종교에서 벗어나야
본문: 사도행전 17:22~34



오늘 우리는, 바울의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연설을 전하는 본문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 본문말씀은, 우리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의미를 새삼 되새겨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의미심장하고 흥미진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고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는 신전이 서 있는 언덕으로, 성소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할 만한 장소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아니라 그 아래 남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아고라 광장입니다. 시장과 행정기관이 자리잡은 아고라 광장에는 항상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그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날마다 토론을 즐겼습니다(행 17:17). 그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행 17:21). 사도 바울도 바로 이 광장에서 아테네 사람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철학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행 17:18).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아고라 광장 사이에는 하얀 대리석의 언덕이 있습니다. 아레오파고스(아레오바고) 언덕입니다. 그곳에서 시비를 가리는 재판이 열렸던 까닭에 아레오바고 법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고라 광장에서 벌어진 바울과 아테네 사람들의 논쟁은 결말을 짓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말쟁이’이자 ‘외국 신을 선전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더 깊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파고스 법정으로 인도하여 논쟁을 계속합니다. 오늘날 그 언덕에 오르면 그 때(주후 51년) 바울이 그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다른 문화권과 접촉할 때 그 전파와 수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접근방법을 함축하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다른 문화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야 하는지, 또한 그 다른 문화권 안에서 복음의 뜻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구약성서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과 달리 전혀 다른 사고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고자 하였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배타적이거나 정복주의적인 관점에서 그리스 문화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로서는 그럴 힘도 없었겠지만요. 그들의 전통과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이 점은 정복주의적인 근대의 기독교 선교활동과 오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독단적인 전도방식을 반성하게 해줍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리스인들에게서나 유대인들에게 공통되는 종교인식 내지는 신앙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동시에 빠지는 종교적 함정을 뛰어넘어 진정한 구도의 과정으로서 종교 내지는 신앙을 역설했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언덕이요 권위의 상징으로서 아크로폴리스와 시민들의 광장이자 언덕으로서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고라와 아레오파고스의 대비되는 의미처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기존의 권위적인 가르침과는 명백히 대조되는 새로운 차원의 깨우침이었습니다.

바울은 과연 무엇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지향했을까요? 바울은 처음 아테네에 이르러서 분노했다고 합니다.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17:16). 격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스스로를 절대화한 종교제도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특히 다신교는 사물이 신적 주체로서 절대화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기에 인간을 사물화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보편적인 윤리의식이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그 점을 꿰뚫어 보고 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그렇게 격분하는 감정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와 같은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당대의 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굳이 바울은 분노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풍부한 종교성이 갖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풍부한 종교심을 존중합니다. 비아냥이 아닙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정작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그 사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열어두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아는 데서는 진정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의 지식을 전부라고 착각하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서 그 진정한 신앙의 가능성, 참 진리에 이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신의 실체를 알려줍니다. 그 신은 사람들이 지은 신전에 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굳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온 우주에 편만하신 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이 강조점은 성서의 지혜를 환기하는 것인 동시에 역시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도 깨우치고 있는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를 지정해 그곳에 거룩한 집을 지어놓고 그 안에 신이 거한다고 생각하며, 그 집을 신전 또는 성전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성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일 뿐입니다(고전 3:16; 고후 6:16). 교회당은 결코 배타적으로 거룩한 공간으로서 성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모이는 집일뿐입니다. 신전에 집착하는 종교, 성전에 집착하는 종교, 제도의 권위를 내세우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전부로 아는 미숙한 종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을 그 안에 가둬둔다는 점에서 위험한 종교입니다. 바울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그 하나님은 사람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야기하는 진실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이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당시 통속화되어 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신관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합니다. 마치 절대 권력자처럼 인간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는 존재로서 신에 대한 거부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제왕적인 권위로 치장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제왕적 권위로 치장하는 것은 구시대 낡은 종교적 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받들어진 신은 마치 공예품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신에 불과합니다. 권위로 군림하는 인간질서의 속성을 하나님에게 부여한 결과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 앞에 그 신도들을 줄 세우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며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살리는 분입니다. 그 지도자를 마치 독점적인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교회나 종교, 그래서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흉내를 내는 교회나 종교는 구시대의 악습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는 어울릴 수 없습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이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해주셨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그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는 시대와 그 경계가 다르다고 해서 그 속성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의 사람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주전 3세기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바울은 이처럼 낡은 시대의 종교, 곧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신을 믿는 종교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도 충분히 공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인들도 깨우치고 있는 진실에 공감하는 가운데 그렇게 설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30절에 이르러 바울의 입장은 반전됩니다. 엄밀히 말해 반전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굳이 반전이라 한다면, 이 대목에서부터 그리스인들이 말뜻을 잘 알아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구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시대를 종식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정한 하나님이 환히 드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진리 독점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신전, 가시적인 교회질서와 종교제도, 위엄 있는 사제와 종교지도자, 명문화된 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살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사람들을 살려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들은 아테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부활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모양입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알고 영혼의 불멸을 믿었던 그리스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의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라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은 때로는 정중한 사양을 뜻할 때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 비웃었다는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정성이 담긴 반응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충분히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곧 맹목적 믿음과 동일시될 때가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그런 믿음이 가장 순수한 믿음으로 칭송받아 왔습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 성찰이 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자기중심적 욕망의 확장을 전도로 알고, 부흥으로 아는 것은 그와 같은 믿음의 풍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레오파고스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잘못된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며, 진정한 진리의 세계로 안내해줍니다.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이렇게 반응한 사람들은 그 진리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복음의 전파와 진정한 복음의 수용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태도에서 가능합니다. 새로운 신앙의 형성은 그 자리, 그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옹졸한 게 아닙니다. 인류역사에서 등장한 위대한 통찰들을 멀리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찰들과 중요한 가치규범들을 배제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감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훨씬 깊어지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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