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믿음 - 고린도후서 6:1~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3-06 17:45
조회
7500
2022년 3월 6(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믿음
본문: 고린도후서 6:1~10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새기는 사순절 첫 주일 오늘 우리는 고린도후서 본문말씀을 마주합니다.
고린도전후서는 매우 첨예한 쟁점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교회 상황의 복잡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크게 세 가지 문제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분파간의 갈등(1:12), 두 번째는 기존의 성적 역할의 혼란 상황, 세 번째는 주인과 노예,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더불어 이 밖에도 보다 더 세부적인 갈등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본문말씀은 첫 번째 갈등, 곧 분파간의 갈등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모욕을 당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일단락되었고, 고린도교회 교우 모두가 잘못된 것을 깨달아 다시 바울을 열렬히 지지하게 되었습니다(2:5~7; 7:6 참조). 그 어간에 사도 바울은 아마도 격한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 전한 소식은 그처럼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이 포함된 고린도후서는 그 기쁜 소식을 듣고 난 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욱 자신 있게 자신의 진심을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어떤 사심이 아니라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 어떤 세속적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존하여 그렇게 합니다. 수사의 형식으로 보자면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어법도 이를 닮아 있지만, 거꾸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갖 세속적 권위와 욕망을 정당화할 뿐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철저한 입장과는 명백히 다릅니다.
바울에게서 중요한 점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그의 주장이 자신의 삶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어떤 다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의 삶 자체로 진정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6:4-8a)
이 고백은 사도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입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일행은 남들이 보기에 즐거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와 그 일행은 한결 같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그 어떤 영화를 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사도와 그 일행은 자신 있게 그 일을 감당하는 자신들의 자긍심을 내세울 수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b~10)
놀라운 역설의 진실입니다. 도대체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진실을 입증하는 데는 연역, 귀납, 변증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등장하면서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됩니다. 역설입니다. 헬라어에서 Paradox는 두 의견이 대립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있는 상태입니다. 상식적인 논리로 역설은 진실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결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설을 진실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논리로 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 죽어야 산다는 고백,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역설입니다. 이 역설은 사실 이미 소크라테스가 진실을 설파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았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것이 삶의 진실입니다.
역설은 모든 상식적 논리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며, 그 상황을 말하기도 합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의 진실을 표현합니다. 무한한 대립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바꿔 말하면, 역설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뻔히 예견되어 있는 결론을 기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판단하기를 중지하는 태도가 아니라 끝까지 진실을 위해 달려가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립 3:12) 그 신비한 경지를 향해 달려가는 삶,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고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매이거나 의탁하지 않고 궁극적인 것을 향해 달려가는 삶입니다. 끝내 그 궁극에 도달하리라는 믿음, 그렇게 구원에 이르리라는 믿음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믿음이,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허망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참담한 현실에 대한 거짓 위로를 구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 현실을 뒤집어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 말이 뜻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 믿음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가치의 근본적 전환을 뜻하며, 동시에 그 기존의 가치에 따라 부추겨진 욕망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보장하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되묻고 진정한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더불어 병행본문의 하나로 제시된 마태복음 4:1~10 말씀은 예수께서 시험받은 사건을 전합니다. 그 의미는 누차 나눴고 또 기회 될 때 다시 나누겠지만,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간략히 그 의미를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빵의 유혹에 대한 거부는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할 때 그 사람은 배터져 죽고 다른 편의 사람은 배곯아 죽는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말씀의 정의 없는 경제성장의 허구를 말합니다. 두 번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는 기적의 유혹에 대한 거부는, 특별한 기적이 없어 보이지만 한 순간 한 순간 영위하며 지속하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 없이도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세 번째 권세의 유혹에 대한 거부는 권력을 향한 욕망의 끝은 결국 벼랑 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를 굴종시키는 힘은 결국 더 큰 힘을 만날 때 굴종 당하게 되어 있고, 강력한 저항에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사람을 섬기는 진실을 새겼습니다.
예수께서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생각하는 가치들이 사실은 사람을 고단하게 만들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는 것을 깨우치고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은 것 같지만 살아 있는 삶, 근심하는 것 같으나 기뻐하는 삶, 가난한 것 같으나 부요한 삶의 역설을 깨우친 것이 곧 그리스도의 길,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치의 전환이요, 욕망의 재구성을 뜻합니다. 가치기준을 바꾸면 다른 삶의 의미와 재미가 가능합니다. 그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믿음은 이 세상을 떠나 이뤄지는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하듯, 바로 이 땅 위에서 이뤄져야 할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참여하는 가운데 그 뜻을 땅 위에 이루고자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결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사회적 체제 가운데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을 조금 더 선하게 해야 할 막중한 정치적 사명이 있습니다. 그 역시 우리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5년 전 촛불 이후 그야말로 전환기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국민의 일꾼을 뽑는 선거입니다. 민주적 헌정국가 안에서 대통령에게 어떤 예언자적 역할이나 메시아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것을 정책으로 구체화해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이번 대선을 ‘비호감’ 대선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평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우리는 대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정치인으로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개인적 덕성보다도 정치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칠 정책을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과 그 파급효과에 대한 예측 능력,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입니다. 이른바 심정윤리의 차원과 구별되는 책임윤리의 차원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 전환기 한국사회의 과제를 꼽는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를 일궈냈지만, 그 명암이 너무나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데 필요한 정책들이 무엇일까요?
첫째 세계 공통의 과제로서 기후위기에 대응한 정책이 절실합니다. 기후위기는 단지 생태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체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체제 전환의 가능성을 함축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경제위기의 논리는 기만이요 허구입니다. 문제는 불평등이며, 따라서 사회적 위기라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불평등의 심화로 야기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대처하여 한국형 복지국가를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셋째 사회적 불평등에 편승하는 사회적 차별을 극복해야 합니다. 모두가 안전한 삶을 보장받고 존중받는 사회를 형성하는 과제입니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 15년이 지나도록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보여주듯, 누구나 안전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는 뒷전으로 밀려 있고 오히려 혐오의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장차 심각한 사회적ㆍ정치적 위기로 비화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차단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넷째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은 두말할 것 없는 숙원과제입니다. 지금 긴장을 고조시키며 안보불안 심리를 조장할 때가 아닙니다. 일관된 평화의 의지와 더불어 담대한 상상력으로 남북관계를 타개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섯째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국력의 위세를 과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과거 지정학적 위치로 불리했던 조건을 거꾸로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끝으로 그 과제들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내적 조건으로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강화를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는 재벌, 금융, 행정, 사법, 언론 등 여러 분야의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선출권력을 무력화하는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지금 그 기득권 카르텔이 급조된 대표를 내세워 합법화의 외양을 갖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밑바닥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전문가 엘리트의 지배는 서민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 것입니다. 국민의 기본권과 대표권을 강화하며 동시에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절박하게 모색되어야 합니다.

누가 과연 이런 전망에 근접해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지 우리는 분별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선택과 그 결과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지향하는 희망과 일치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지향하는 바와 가까운 정치적 선택은 가능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한 순간의 기적으로 뒤바뀌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 한 땀 한 땀 이어가는 바느질이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지금 우리는 근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삶의 여정을 기쁨으로 알며 믿음을 지켜나가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이 지금 당장 우리 세대의 삶을 결정짓고, 미래 세대의 삶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정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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