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희로 부르신 공동체 - 마태복음 16:13~20[이성철 전도사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2-03-13 22:10
조회
4709
2022년 3월 13(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너희로 부르신 공동체
본문: 마태복음 16:13~20
이성철 전도사



이 시간 청년주일로 모여 함께 예배드릴 수 있어 참 기쁘고 떨립니다. 교회에서 청년들과 시간을 보내며 함께 준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기쁘지만 과연  청년들의 고민과 마음을 함께 나눌수 있을지 두려워 떨리기도합니다. 욕심을 덜어내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의 고백이라는 소제목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을 세우겠다는 말씀을 남긴 본문으로 익숙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가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라는 말씀을 통해 “메시아 비밀”을 이야기하는 본문으로 전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갔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먼저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가 땅을 밟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닐때,  제자들은 몇 걸음 뒤에서 예수를 따라 걸었습니다. 토라를 배우는 제자들이 늘 경외심을 가지고 랍비의 뒤에서 간격을 두고 따라갔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면에서 예수의 제자는 랍비의 제자와 달랐습니다. 랍비의 제자들은 토라를 배우기 위해 스승을 스스로 고르고 찾았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랐던 것은 토라를 배우러가 아니라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함께 걸었습니다. 이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빌립보 가이사랴”는 헤르몬산 남쪽, 갈릴리 바다에서는 약 30km 북쪽에 위치한 이방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기원전 20년에 헤롯 대왕이 아우쿠스투스 황제로부터 지역을 하사받은 것을 기념하여, 신전을 짓고, 황제를 기리기 위해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름에서부터 알수 있는 것처럼 이 도시는 황제 숭배가 문화인 곳이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도착했을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3절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마가복음은 “나”라고 하는 표현을 마태복음은 “인자”로 바꿔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자”는 예수가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장차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어서 14절에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보고 있다고 전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엘리야, 예레미야를 말하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이어서 이제 예수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동안 만나고 지나쳐왔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줄곧 자신을 따라왔던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기는 처음이나, 이미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는 처음부터 메시아로 전제되어있었습니다. 이런 예수의 메시아임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는 베드로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어떤 특출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확증이었습니다. 이 구절들이 교회의 유일한 계승자, 수위권을 베드로에게로 돌리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베드로가 죽은 후 이 역할이 어떤 방식으로 계승되어 넘겨진다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담당하던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이어져왔습니다. 이 말씀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집단을 대상으로 말한것입니다. 이야기 상으로는 매고 푸는 권한이 제자들에게 약속되지만, 문맥에서 보면 이 권한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지역교회 전체에게 주어진것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에서 그리는 베드로의 모습은, 교회를 맡기기에 충분한 제자였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마태복음 14장에는 밤중에 예수가 물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께 “나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말하였고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 예수가 있던 물위를 걷지못하고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ㅡ쩌면 당황하고 답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맡겨야한다니 말이죠.

예수를 따르는 제자처럼 되기를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오히려 불안하고 위태위태하지만 그 뜻을 이어나간 제자들의 모습에서 살림교회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단일하지 않고 또 매주 출석하지 않고, 이만큼이면 가까워졌다 싶을 때 또 새로운 낯선 모습들을 보여주는 청년들에게서 오히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의 모습이 겹쳐보였습니다.

제가 교회에 처음와 인사드린 날이 1월 2일 주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교회 창립주일이었죠. 약간 긴장한 탓에 그날의 예배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목사님의 말씀나누기보다도 말씀 후에 함께 봤던 영상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여러분은 천안살림교회를 왜 사랑하시나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영상이었죠. 한분 한분이 살림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를 나눠주시면서 공감과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는 그 영상을 보며 ‘아, 참 좋은 교회’에 왔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몇번 영상을 다시 보면서 저에겐 영상의 시작이었던 홍윤표 선생님의 질문이 다시 남았습니다. 그 질문은 젊은이들은 왜 천안살림교회를 사랑하는가?였습니다. 오늘 청년주일 예배를 준비하기 전부터 많은 분들께서 청년들에게 많은 기대와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는데요. 청년들끼리 교회에 모여서 별거 하지 않는데도 참 즐겁습니다. 이런 청년들이 왜 교회에 나오는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영상속에서 다시한번 찾아봤는데요. 청년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자율적인 문화가 있어서, 편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을 강조하는 목사님의 말씀이 맞아서, 어릴때부터 다녔으니까, 그리고 왜 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살림교회를 사랑하는 현재 그것이 중요하다. 라는 대답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답들이 참 좋았습니다. 살림교회는 참 편안하고 안전한 신앙공동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간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의 경험, 함께 밥을 먹고 삶을 나누는 경험이 주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우리를 다시 이곳으로 모이게 만들어 줍니다. 공간은 그 자체로 사회관계가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사회적 공간’입니다. 그 안에는 계층,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연령, 장애와 같은 다양한 사회관계가 응축되어 나타납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 태도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함께 교회에 있지만 저마다의 믿음과 신앙의 고백도 다양합니다. 이런 다양함은 단순히 나이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처음에 두렵다고 말한 이유 중 하나는 과연 내가 정말 청년세대가 맞나? 라는 생각부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게 무슨 소리냐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성행해온 세대 담론들에게서 왠지 모르는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청년세대 담론이 이야기하는 정상의 청년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느끼며 청년 담론에조차 포함되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좌절할 시간도 주지 않고 MZ세대와 이대남, 이대녀 등의 틀 안에 우리를 규정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에 대한 대답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청년이란 존재에게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기발랄함과 톡톡튀는 아이디어를 장착한 “청년”이란 존재가 이 사회에서 어떤 지표를 나타내기를 바라는 것만 같습니다. 단,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채, 이해 가능한 범위 안의 변화와 균열을 일으키길 사회 전체가 요구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를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청년은 자신들을 알아가고 성찰하기보다 살아남기가 더 시급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한주 많은 분들이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복잡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떤 존재들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먼저 생존을 위협당하는 시간을 마주하였습니다. 대선 결과이후 SNS 실시간 트렌드 상위권을 ‘호신용품’이라는 단어가 차지했습니다. ‘무고죄 강화’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한 후보자 당선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투표하기까지도 정말 많은 혐오와 차별을 감내하고 고민했던 2030 여성들은 투표 이후엔, 생존을 고민했습니다. 혐오와 차별, 폭력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방식과 우리가 그 폭력을 반응하는 차분하고도 무서운 방식의 단편을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청년주일예배를 고민하면서는 왜 굳이 청년들은 살림교회에 나오는가를 묻고 싶었습니다. 신앙생활은 개인의 신앙과 삶을 유지해나가는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인 우리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유지하는 것일텐데, 참 좋은 가치와 태도를 공유하는 살림교회 청년들을 어떤 단일한 무언가로 묶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완벽한 대답을 끄집어내는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부를 묻는일이며 믿음 안에서 우리의 관계를 다시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관계를 지속한다는 건 나와 다른 상대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타인에 대한 존중은 어느 순간 끝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는 나와 다른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 던져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나의 정체성만 내세우며 고집해서도 안됩니다. 한 마디로 계속해서 쉬운 답을 피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태도이며, 살아가기 위해 서로를 엮어가는 놀라운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림 청년들은 가장 어려운걸 계속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가졌던 질문이 잘못됐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동일한 하나의 대답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청년들이 함께 쓴 기도문처럼 우리 모두의 기도가 대답이자 이유입니다.

어쩌면 예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때, 더 멀리서부터 따라온, 제자의 발이 아파서 대답할 힘이 없던건 아니었을까요? 혹시 모두가 너무 지쳐서 그 모든 질문에 베드로가 대신 힘겹게 대답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힘겨운 대답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숨을 고르고 “너희”인 우리를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오래오래 서로의 용기가 되어 이천년전의 대답과 오늘의 대답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이어짐을 늘리고, 이 이어짐을 통해 서로 쓰러지지 않게 하길 바랍니다. 다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서로를 돌보며 느리지만 우리의 온기로 함께 피는 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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