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의 기도, 예수의 믿음 - 요한복음 17:1~5; 25~2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4-10 13:22
조회
10070
2022년 4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의 기도, 예수의 믿음
본문: 요한복음 17:1~5; 25~26



우리에게 ‘주의 기도’는 익숙하지만, ‘예수의 기도’는 익숙할까요? 주의 기도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반면 예수의 기도는 예수께서 직접 드리신 기도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의 기도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 기도의 내용이 소개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와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 정도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드리는 기도,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 해당하는 기도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본문말씀인 예수의 기도는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맥락, 곧 고난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 있기는 하지만 그 성격은 무척 다릅니다. 극적인 순간의 슬픔과 고통의 기조보다는, 예수의 삶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실존을 포괄하는 내용으로서 장중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예수의 믿음과 삶의 의미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기도의 첫 번째 대목과 마지막 결론을 본문으로 삼았는데, 요한복음 17장의 그 기도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1~5)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그 뜻을 온전히 성취하게 해달라는 청원, 두 번째 대목은(6~19)은 그 뜻을 알고 동참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 세 번째 대목(20~24)은 제자들을 통해 그 뜻을 알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마지막 대목(25~26)은 결론으로서 기도의 요체를 집약하고 예수의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관된 논리에 깊이를 갖고 있는 예수의 기도가 함축하는 의미를 제한된 시간에 한 구절 한 구절 따라가며 세세하게 음미하기는 어렵고 그 큰 뜻을 새겨봅니다.
첫 번째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목적을 온전히 성취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마침내 당신의 삶의 목적을 온 천하에 드러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온전한 사랑의 삶의 귀결을 보일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귀결이 무엇일까요? 이 기도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고별사에 이은 기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귀결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까닭은, 그 뜻을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세상의 대비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닥친 그 일을 알고 온전히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 곧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을 떠나게 되는 마당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려가겠다고 기도하지 않고 그들이 세상의 악한 자 또는 악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기도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초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로 거룩하여지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영생의 길을 아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예수의 기도는 긴장감을 자아내는 문제의식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과 그것을 모르는 세상의 대비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현실을 나타냅니다. 예수의 목적은 그 세상에서 제자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악으로부터 보호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세 번째 대목에서는 기도의 범위가 확장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곧 신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내용은 더욱 구체화되면서 동시에 깊어집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제자와 신도들이 온전히 하나 되는 삶, 곧 사랑의 삶에 대한 기도입니다. 그 사랑의 삶을 세상이 알게 해달라는 기도가 덧붙여집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에 이르러 예수께서는 기도의 내용을 집약함으로써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당신의 믿음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우리(예수-제자-신도)는 하나님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의 삶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종결됩니다. 긴 예수의 기도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우리는 ‘예수의 믿음’을 주목함으로써 그 진정한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일종의 교리적 명제를 믿는 것이 그 진정한 의미일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은 종종 주술적 믿음으로 오도합니다. 예수의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의미입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 예수의 믿음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사랑의 삶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실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뜻하며, 그것이 곧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기도의 마지막 결론이 제시하고 있듯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삶은 사랑 안에 있는 삶을 뜻합니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아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의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기고 있지만, 그 요체와 더불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생각해야 할 특별히 중요한 하나의 초점을 주목합니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앎과 믿음에 관한 중요한 진실입니다. 예수의 기도에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중요한 문제의식으로서 진실을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세상의 대비가 있다면, 이 기도는 그와 겹쳐 아는 것과 믿는 것, 앎과 믿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앎과 믿음, 지식과 신앙은 그 차원이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차원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예컨대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말하기를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 지식의 온갖 빈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나는 무엇을 믿는가>). 진화론은 알고 있는 반면 창조론은 믿고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 경우 앎과 믿음은 분명히 다릅니다. 앎은 사실관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며, 믿음은 마땅히 이뤄져야 할 지향으로서 어떤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본문말씀 예수의 기도는 끊임없이 앎과 믿음의 깊은 상호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3) 진실을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사랑의 삶을 이루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8) 앎과 믿음은 배척되는 관계가 아니라 병행되고 있습니다.
바른 앎은 바른 믿음으로 이끈다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 앎을, 신앙이 지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은 높은 학식이나 현란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것인지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 그리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른 모든 신도들이 사랑의 삶을 이루는 것, 그것이 곧 제대로 알고 믿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세상이 알게 해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한다.” 알면 길이 보입니다. 알면 사람이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 저런지 핀잔만 하거나 비방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길을 함께 찾고 그 가운데 사랑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자 하는 물음을 불신앙으로 정죄하고 그저 믿으라는 교회가 어째서 권력을 지향하는 삶과 가까운지, 어째서 혐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정치세력과 가까운지, 어째서 사랑의 삶과는 거리가 먼지 여기에서 그 비밀이 풀립니다. 영원한 생명, 진정한 삶, 사랑으로 구체화되는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와 같은 격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재앙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와 같습니다. 자기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합니다.’”(도마복음 102).

예수의 기도에 담긴 예수의 믿음을 제대로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이루기를 바랍니다.
다른 어떤 세상의 가치에 견줘 우리 삶을 평가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입으로 공정을 말하면서 누군가 배제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능력주의를 부추기는 사람들과 그 세상, 자기편의 힘을 모으기 위해 누군가를 표적 삼아 책임을 전가하고 그렇게 편을 가르는 사람들과 그 세상은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과 그 세상의 기준에 기대어 우리의 삶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세상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그에 편승하는 교회를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산다는 자긍심, 최소한 그 삶을 지향한다는 자의식이 없이는 감히 그리스도인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는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이라는 예수의 기도가 말하는 진실을 알 수 있을 때, 곧 사랑 안에서 서로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스스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누리고 있다면 어떤 세상 권세라도 우리를 뒤흔들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 삶을 거부했지만,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그리스도의 길과 세상의 길을 분명히 분별하여 참 생명을 보장하는 길을 알게 해 주신 고난의 의미를 새기는 한 주간입니다. 그 한 주간 오늘 말씀이 우리의 진정한 푯대가 되어 위로를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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