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하신 예수, 다시 갈릴리에서 - 마가복음 16: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4-17 14:10
조회
14414
2022년 4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활하신 예수, 다시 갈릴리에서
본문: 마가복음 16:1~8



부활의 아침 우리는 부활사건을 전하는 가장 극적인 본문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록상 이보다 앞선 고린도전서 15장 바울의 증언이 있지만, 부활사건의 극적인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체입니다. 오늘 과연 그 부활의 의미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전하는 네 복음서의 기사는 다소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에서 거의 일치합니다. 그 만큼 이 사건이 신앙의 중요한 공동기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체험, 부활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입니다.
부활사건을 전하는 복음서 기사들의 중요한 공통점은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첫 번째는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인들이라는 점, 두 번째는 빈 무덤을 확인한 사실, 세 번째는 부활한 예수께서 갈릴리로 먼저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들은 단순한 현장보도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증언은 그 이야기를 통해 부활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일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등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이 증언은 매우 이례적이고 특기할 만합니다. 이 사건에 이르기 전까지 예수님 주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은 주로 남성 제자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이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변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라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뜻 봐서는 이 여인들의 역할이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대목에서 이 여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결정적 사건의 첫 증인으로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그들의 몫을 말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따라다녔지만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 몫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말고는 다른 남자 제자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이 여인들이 단지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다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사도들’ 또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배우고 따르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이들은 교회의 전통에서 제자 또는 사도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하고 주변적 인물들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그 능력이나 헌신에 상관없이 정해진 질서 밖의 비주류로 간주되던 사람들입니다. 구조적 차별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들의 열성과 헌신을 말하는 동시에 부활사건의 성격을 말합니다. 기성의 질서로 굳어진 사회에서는 배제된 주변부 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부활사건의 현장에서는 선두에 나섭니다. 바로 이 사실이 부활사건의 분명한 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부활사건은 기존의 질서가 뒤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껏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앞자리에 서는 일이 벌어지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성적인 차별을 비롯해 각종 차별로 억눌려 지내야 했던 사람들이 용기있게 일어서는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은 빈 무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이 확인되어야만 예수님의 부활이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오래된 전승인 고린도전서 15장은 빈 무덤에 관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이 한결같이 ‘빈 무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사건이 지니는 성격을 분명히 강조하려는 의도를 지닙니다. 그것은 시체가 소생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논란을 넘어서는 어떤 진실을 말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죽음, 아니 죽임의 권세를 떨치고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의 현장이 곧 부활의 현장이 된 진실을 말합니다. 굳게 닫혔던 돌문이 열렸다는 것은 어떠한 권세도 진실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갇혔던 굴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재생, 새로운 탄생, 거듭남, 진정한 부활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컨대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혔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편협한 자기 민족 중심적 세계관에서 이방인의 세계까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는 세계주의적ㆍ보편주의적 세계관으로 전향하는 거듭남을 뜻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유치한 세계관에서 타인을 인정하는 성숙한 세계관으로의 전향입니다.
더불어 빈 무덤은 역설적으로 존재의 확인을 의미합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없음’(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음’(有), ‘가능성’을 말합니다. 빈 무덤은 이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사람들 가운데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전합니다. 무덤에 있던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를 갈릴리에서 만나리라는 것은, 원점 곧 출발점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그 일행의 출발지,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저 하나의 지역인 것만은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갈릴리’입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기회와 부와 권력이 집중된 중심입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모든 기회와 부와 권력을 중심에 빼앗긴 주변부입니다.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는 본문의 증언과,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뵐 수 있다는 이 증언은 일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 그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민중의 땅, 민중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는,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은 기존의 체제 안에서 배제당하고 상심하였던 이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는 사건, 그들이 다시 일어난 사건입니다. 차별의 고통이 사라진 역사의 현장,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현존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본문은 이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 여인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기존의 언어로 해명이 되지 않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의 환상이거나 그저 막연한 기대감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몸소 체험한 현실입니다. 이걸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이 사건을 말로 해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째 되는 날 살아나서 게바에게 나타나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오백 명의 형제자매들에게, 그리고 야고보와 사도들에게, 맨 나중에는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15:3~8)고 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죽임의 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셨고, 마침내는 바울 자신도 일으켜 세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죽었던 시체가 단순히 벌떡 일어나는 ‘소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특수한 사건으로서 부활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서 부활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 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20~22)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음의 다스림을 받았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된 현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이 허황한 환상이라는 주장에 대해 바울은 계속해서 부활의 의미에 대해 해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의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신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36~38) “죽은 사람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42~44) 이 이상 분명한 답이 어디 있습니까? 부활, 그것은 진정한 거듭남을 말합니다. 이제껏 숨죽이고 살았던 사람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이 전하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 부활사건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사건이 여기서 다시 재현됩니다.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자기 말로 외치는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무런 거침없이 그 말을 다 알아듣습니다. 저 팔레스타인 주변부 갈릴리의 민중들의 언어가 보편적인 세계의 언어가 되는 사건입니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민중의 목소리가 모든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실은 그 사건이 또 다른 갈등과 억압, 소외를 빚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었다’(사도 2:8)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개인의 거듭남이며 동시에 이 사회 전체의 거듭남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 분열의 세력이 틈탈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소망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고통 가운데서 절망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듭남, 분열된 세상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이 사회의 거듭남을 바라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며 그 열매를 맛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오랫동안 한국사회가 욕망해온 세계가 바야흐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다들 보내고 싶어 하고 가고 싶어 하는 학교 학과 출신들이 모든 것을 거머쥐었습니다. 모두가 욕망하는 그 열매가 드디어 맺혔습니다. 모든 기회를 움켜쥔 엘리트들이 통치하게 될 현실을 보고 있으니 이제 곧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그 열매 맛이 어떨까요?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가 있지요?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1968)
동화처럼 들리겠지만 그저 동화만은 아닙니다. 지난 해 정계를 은퇴한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이카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편입니다. 대통령 재임중(2010~2015년) 월급의 90%를 기부했고, 관저는 노숙자에게, 별장은 시리아 난민 고아들에게 내주고, 자신은 쓰러져가는 시골 농가에 살며 낡은 차를 직접 몰고 출퇴근했습니다. 재임중에는 물론 퇴임 후에도 물은 우물에서 길어다 쓰고, 빨래도 직접 하고, 마당에는 화초를 가꾸는 삶을 삽니다. “나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절제하는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최근에는 칠레의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달 11일 최연소(36)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신자유주의의 요람이던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내각인사 24명 중 14명을 여성으로, 30대 장관을 7명이나 기용했습니다. 수도 산티아고 외곽 빈곤율과 범죄율이 가장 높던 지역에 그가 거주함으로써 동네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부활사건은 기존의 언어, 기존의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너무 낯설어 말문이 막히지만 오히려 희열의 탄성이 터져 나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가진 자만이 행복을 맛보는 세계가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불편함 없이 행복을 누리는 세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은 민중들이 누리게 될 그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놀라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을 스스로 살기 위해 애쓰고, 누구나 그 삶을 누리는 사회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운데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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