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불안 너머 진정한 삶의 기쁨 - 골로새서 2:8~1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4-24 16:50
조회
8831
2022년 4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불안 너머 진정한 삶의 기쁨
본문: 골로새서 2:8~15



골로새서는 초기교회가 직면한 신앙의 혼란 가운데서 매우 중대한 문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저 일반적인 교훈으로 지나쳐버릴 수 없는 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친서인지 아니면 바울의 사상을 잘 알고 있는 제자의 작품인지 논란이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골로새교회가 처해 있는 정신적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골로새교회에 어떤 ‘철학’이 문제되고 있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8절) 여기서 ‘철학’은 일관되게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 ‘사람들의 전통’, 그리고 ‘세상의 유치한 원리’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철학 자체가 그렇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특정한 한 경향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라는 말은 헛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전통’ 또는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뭘까요? ‘사람들의 전통’은 신약성서의 다른 문맥에서 볼 때 낡은 관습 또는 인습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에서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이르는 말로도 통용되었습니다(마가 7:8).
‘세상의 유치한 원리’라는 말은 직역하자면 ‘세계의 원소’를 뜻합니다. ‘세계의 원소’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의 한 견해를 곧바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흙, 물, 불, 공기 네 원소로 세계가 구성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 원소들의 순환으로 세계가 생성되고 운동한다는 나름 진지한 철학적 견해였습니다.
그런데 그 철학적 견해가 통속적인 신앙과 결합되었습니다. 그 원소의 배후에는 일종의 각기 정령들이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몸을 벗고 영혼의 순수한 세계에 들어가려 할 때 그에 붙잡히면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이 해탈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윤회의 사슬에 매이게 된다는 불안감입니다.
그리스문화권 안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견해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그 관념이 구약성서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신앙적 관념들과 융합하게 됩니다. 이 숙명적인 원소들의 순환에 매여 있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금욕’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순수하다면 곧바로 달까지 승천하게 되지만 영혼이 순수하지 못해 지상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면 다시 세계의 원소들 가운데로 하강한다는 믿음입니다. 또 어떤 영혼들은 반신적(半神的)인 영이 된다는 믿음도 동반했습니다. 악마 또는 천사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 안에 형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금욕을 구원의 방편으로 안 믿음은 먹고 마시는 것을 가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상의 원소들과 천상을 오가는 영에 대한 믿음은 초승달 축제나 각종 절기에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 관습을 낳았고, 천사숭배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하는 잘못된 신앙 양태였습니다.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16절 이하는 그 양태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믿음을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런 믿음을 헛된 속임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 역시 그런 허황된 믿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어떤 실체나 진실에 상관없이 자기 편한 대로 엉뚱한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세계관을 구성하여 판단하는 태도는 그 허황된 믿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창조과학도 그 한 예이며, 특정한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기초하여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퍼뜨리는 것도 그 예이며, 자기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확증편향이 그런 것입니다. 지옥의 불안을 조장하여 천당을 갈망하는 신앙 또한 그렇습니다. 잘못된 세계관은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낳습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 헛된 속임수를 떨쳐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것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도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또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과 육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9~14)
제법 장황한 말씀이지만, 그 요체는 분명합니다. 부활의 신앙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헛된 것에 매일 것 없이 지금 구원의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사원소설을 허황된 믿음과 결부시켜 불안감에 떨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허황된 믿음의 실체는 불안감이라는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그 불안감을 달래는 방식이 뭡니까? 영혼의 자유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각종 금기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묘한 신앙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금기만 지키면 나머지는 모두 허용된다는 믿음으로 오히려 물질적 욕망을 탐하는 경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지금 여기에서의 적극적인 삶을 향유하라고 일깨웁니다.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9).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역시 그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그렇게 축복받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떨어질지 불안해하지 말고 지금 삶을 온전히 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충만함을 누리는 삶은 부활의 삶으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뜻을 함축합니다.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린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구원받는 백성에 함께 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의례를 부정하고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된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비록 손으로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죄에 매인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할례의 의미는 세례의 의미로 다시 강조됩니다. 거듭남입니다.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진실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진실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 역시 부활의 삶 가운데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적 인과관계 차원에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언제 죽었고 언제 묻혔습니까? 그런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삶, 그 삶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끝내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의미를 재차 강조합니다. 빚 문서를 다 없애버렸으니 더 이상 걱정할 일이 무어냐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여기에서 삶을 온전히 누리라! 이 말씀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로마 6:5~8)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삶을 청산하고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육체를 떠나 순수한 영혼으로서 맞이하는 삶이 아닙니다. 지금 몸을 지니고 있으되, 죄에 매여 있던 몸이 아니라 신성을 지닌 부활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철학에 매여 몸과 분리되어 영혼의 승천을 구원으로 바라보면서도 불안해하고 있는 현실에서, 부활의 믿음 안에 있다면 지금 지닌 몸으로 진정한 삶을 누리고 있는데 무엇을 불안해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더욱 놀라운 진실을 전합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15)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환상 아닌가요? 이 선포는 로마의 황제가 개선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개선장군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로마제국의 체제 안에서 완전히 배제당한 자들의 사형틀인 십자가가 어떻게 승리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당시 세계의 법칙에서 볼 때 오히려 처절한 패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사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 사건은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주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진리를 압살하는 것이요 사람들의 삶을 압살한 사건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무고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이 세상 권력자들과 통치자들의 무모함을 폭로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악한지 몰랐을 때는 그들을 구원자로 착각했습니다. 그 때는 그들이 정해놓은 질서와 무관하게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는 예수가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서야 사람들은 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깨닫습니다.
그 실체를 알지 못할 때는 헛된 환상으로 기대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갖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될 때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고 따라서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감춰진 의도는 사람을 기만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지만, 드러난 의도는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에게 기만당할 까닭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었고,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이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들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마당에 더 이상 미혹될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진정한 인간의 삶을 보는,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 믿음은 더 이상 허황된 철학, 허황된 신화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삶에 눈길을 돌리게 만듭니다. 권력자들의 기만과 그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가운데서 일어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길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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