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베드로의 부활체험, 삶의 전환 - 요한복음 21:15~1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5-01 17:53
조회
9662
2022년 5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베드로의 부활체험, 삶의 전환
본문: 요한복음 21:15~19



부활절 셋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 사명을 맡기는 장면을 전하는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물음과 대답이 세 번 반복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반복됩니다.
이렇게 세 차례 반복되는 대화 장면을 보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세 차례 반복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언행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되갚으려는 것일까요?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냐? 내가 이렇게 물으니까 너의 심정은 어떻냐?’ 그런 뜻일까요? 다시 세 차례 반복되는 이 대화는 확실히 세 차례에 걸친 베드로의 부인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대화가 꼭 되갚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흔히 ‘삼 세 번’이라고 하는데, 성서에도 이렇게 ‘삼 세 번’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의미는 ‘온전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베드로가 온전히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이번에는 온전히 예수님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세 번 반복해서 예수님께서 물으신 뜻은 지난 잘못을 온전히 반성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명예회복인 셈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 차례 반복되는 물음과 답변은 전인적인 차원에서의 온전한 승인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경험하고, 알고, 깨닫는 모든 차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유념하며, 다시 한 번 그렇게 세 번 되풀이되는 말씀을 환기해볼까요?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습니까? 그 삶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그 삶으로 양들을 인도해라!”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저는 주님의 가르침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래, 그렇다면 그 가르침으로 양들을 인도해라!”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그 어떤 경우라도 이제 다시는 주님을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온 몸을 바치는 삶으로 양들을 인도해라!”

베드로는 이 대화의 과정을 통해 다시 온전히 예수님을 승인하고, 동시에 스스로의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대화의 마지막 대구에서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오늘 특별히 이 말씀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본문은, 이 이야기가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사실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시 로마에서 피신하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발길을 돌려 로마로 가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 영화 <쿠오바디스>는 베드로의 그 전설에 근거한 영화입니다. 베드로가 피신하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로마로 간다.” 그 말씀에 베드로가 발길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어,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임에 틀림없지만, 과연 본문말씀이 그 사실을 예언한 것일까요? 특별히 ‘팔을 벌리고 묶어서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는 묘사 때문에 그렇게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전설이 유포된 것은 2세기말, 3세기초 이후의 일입니다. 이 말씀은 후대에 유포된 베드로의 죽음의 방식을 암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활체험 이후 중대한 삶의 전환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주목합니다. <새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개역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당시 근동 사람들의 행장에 관한 묘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르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인데, 젊어서는 스스로 하지만 늙어서는 다른 사람이 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이 허리에 띠를 두를 수 있게 하려면 팔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장을 갖추는 상황을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젊어서와 늙어서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젊어서는 스스로 원하는 곳을 갔지만 늙어서는 스스로 원하는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곳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근동의 속담, 곧 “어렸을 때는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면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속담의 속뜻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합니다.
남의 손에 의해 행장을 갖춰야 하는 것도, 결국 남의 손에 이끌려 가는 것도 철저한 수동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삶의 가치 전환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든 거룩한 신비체험이 갖는 수동성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비체험이란 항상 일방적입니다. 내가 미처 예기치 못했는데, 내게 다가오는 놀라운 체험입니다.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소명체험을 했던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피하고 싶었으나 결국 고난의 여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뜻을 그렇게 헤아릴 수 있다면, 사실 팔을 벌리는 행위의 상징적 의미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품기 위해 팔을 벌렸다는 묘사와 상통할 것입니다.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이사 64:2) 백성을 품는 행위요, 타인을 품는 행위입니다. 물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팔을 벌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의 의미를 간략히 줄여 말하면 이렇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남이 원하는 대로 살 것이다.’ ‘젊어서는 너 자신을 위해 살았지만, 늙어서는 남을 위해 살 것이다.’ 젊어서는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늙어서는 그 모든 차원을 뛰어넘는 세계에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함축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해설 부분, 곧 죽음을 암시한 것이라는 해설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맞이할 죽음의 형태를 암시한다기보다는 타인을 품는 삶의 여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죽음을 맞고 이제 진정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의 삶의 전환을 말합니다. 결국 본문말씀은, 하나의 실증적 사실로 예수의 부활을 베드로가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길을 한 때 부정했던 베드로가 죽었다가 예수의 길을 인정한 베드로로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베드로의 놀라운 부활체험을 전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서른에 일어섰고(立), 마흔에는 의심할 일이 없어졌고(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고(知天命), 예순에는 귀에 거슬리는 일이 없어졌고(耳順),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좇더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欲不踰矩)”(『論語』「爲政」 2:4). 젊어서는 자신의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도 거슬리지 않고, 마침내 그것이 도리어 내 의지와 같이 되었다는 말 정도로 새겨봅니다.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남이 원하는 대로 살 것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주체적인 삶에서 남에게 끌려 다니는 단지 수동적인 삶으로 후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너의 관점에서 생각해도 거리낌이 없을 만큼 편해지는 지경을 뜻합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단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타자를 위한 삶”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의무감으로만 느껴지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경지에 이를 때 진정한 신앙이 체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체현할 수 있을 때 사람들 사이에 공의가 이뤄지고 피차간에 법도에 어긋남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반복되는 대화 끝에 베드로에게 깨쳐준 진실은 그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우친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공동체를 이끌라는 사명이었습니다. 각자도생의 원리가 공정으로 둔갑한 현실,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유치한 상태에 머무르며 성숙해질 수 없도록 강요하는 사회의 현실과 교회의 현실에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진실입니다. 사람들이 각자도생으로 허덕일 때 권력자들은 그들을 다스리기에 편해집니다. 타인과 연대 없는 삶은 사람들을 노예의 길로 이끕니다.

5월 1일 어린이주일이며, 또한 노동절입니다. 그 의미를 기리는 것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대, 다른 구성원의 삶을 생각하자는 뜻입니다. 송경동 시인의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집과 건물이 / 깨끗하기를 바랍니다 //
그만큼 / 우리를 대하는 당신들의 인성도 / 깨끗하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당신들의 삶과 생활이 / 더 윤택하고 빛나길 바랍니다 //
그만큼 /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도 / 환하고 기름지길 바랍니다 //
우리는 노예나 종이 아닙니다 / 당신과 나의 권리는 서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
이 세상의 모든 불의를 바르게 정돈하고 /잘못된 구조와 모순을 뜯어고치는 일은 / 우리 모두의 일이어야 합니다 //
우리는 쓸겠습니다 / 당신은 닦으십시오 //
부디 / 우리가 치워야 할 쓰레기가 / 당신들이 아니길 바랍니다 //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면, 부활의 진실을 믿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삶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 삶의 전환을 위해 부단히 애쓰는 한 사람 한 사람, 우리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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