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욕구충족의 경제를 넘어 필요충족의 경제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4-13 00:29
조회
41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ㆍ크리스챤아카데미 공동기획 연속토론회
코로나19 이후 한국사회와 교회: 7차 “코로나19와 대안적 경제-정의로운 복지국가를 향하여”
2021년 4월 12일(월) 오후 6시 / 기독교회관 조에홀


욕구충족의 경제를 넘어 필요충족의 경제로
-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경제를 넘어선 신학적 상상력


최형묵(한국민중신학회 회장 / 기독교윤리학)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위기의 성격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은 오늘의 자본주의적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생태계의 교란을 야기한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그것이 일회적 사태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유사한 형태로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예측 또한 모두가 어렵지 않게 공감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겪고 있는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경제체제가 모색되어야 한다는 진단이 제기된 지 오래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여러 전염병 확산 사태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위기 현상을 통하여, 또한 직접적인 결과로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현상을 통해 오늘의 자본주의적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예측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이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면, 그것은 비로소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위기의 실체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미 지난 1년여 기간 동안 세계 각국 정부들과 시민들은 비상한 조치를 취하는 가운데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상한 조치들은 대부분 코로나19 위기 이전으로의 회귀를 기대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을 뿐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토론회(“코로나19 이후 한국사회와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위기가 문명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데 깊이 공감하였으며, 따라서 진정한 문명전환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방식과 단절되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가운데 있다. 지난 6회에 이어 이번 7회 토론회는 코로나19 위기와 더불어 가장 직접적으로 절감하고 있는 경제위기의 성격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발제는 이미 제안된 경제ㆍ사회정책 제안에 공감하며, 그간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넘어 대안적 경제체제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경제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의의를 되새기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 발제의 문제의식은 지난 6회 토론회에서 제기된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역할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로부터 자극받았음을 밝힌다.


필요 충족의 경제와 욕구 충족의 경제

인간사회는 오랫동안 필요(needs)의 충족을 위한 경제생활을 영위해왔다. 그와 같은 경제생활이 영위되는 동안 필요의 충족을 넘어 무한한 욕구(wants)의 충족을 위해 부를 축적하거나 돈을 모으는 것은 악덕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경향은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특히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필요를 넘어선 부의 축적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사회 경제생활에서 욕구와 필요의 경계는 모호해졌으며, 끊임없는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경제성장이 오히려 권장되고 있다. 욕구의 충족을 위한 부의 축적은 더 이상 악덕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권장해야 할 덕목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는 자본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이뤄졌다.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하면,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은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의 결합 속에서 이뤄졌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자본의 축적을 위한 투자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금욕주의 윤리가 무한한 욕구의 충족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고 마침내 필요의 한계를 무너뜨린 경제생활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지만, 금욕주의 윤리를 따른 끊임없는 생산적 활동이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초기 자본주의 형성의 정신적 기초를 형성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경제생활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윤리의 한 전환을 뜻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은 교회 자체의 변화만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변화와 그리스도교의 경제관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자본주의 이전의 필요 충족의 경제와 그리스도교

성서는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정의(zedakah)’의 관점에서 인간사회 안에서 이뤄져야 할 온전한 관계와 그에 따르는 경제생활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 물론 하느님의 ‘정의’는 신실한 인간의 실존을 형성하는 모든 것, 곧 평화, 해방, 속죄, 은총, 구원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의 삶의 차원에서 그것은 경제생활과 직결되는 가르침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성서에서 신실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로서 정의는 억압받는 백성을 선택하여 그들과 약속을 맺는 것을 중요한 거점으로 한다. 성서는 일관되게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한 하느님의 신실한 행위를 환기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져야 할 정의를 강조한다. 출애굽 사건의 맥락에서 제시되는 계약법전(출애 20:22-23:33)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정신은 이후 신명기 법전(신명 12-26장)과 성결법전(레위 17-26장) 등에서도 재삼 확인되고 있고 예언자들의 선포에서 또한 반복되고 있다. 그 정신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누가 6:20)라는 예수의 선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다.
이러한 성서의 정의관은 오늘날 여러 윤리적 가치관을 형성시킨 근본 모티프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성서는 그와 같은 정의관을 밑바탕으로 하여 경제생활의 중요한 규범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부와 가난을 상관관계로 보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몫을 보장하는 것을 정의의 실현으로 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몫은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몫으로, 성서는 어떤 경우이든 그것이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의 기도(마태 6:9-13, 누가 11:2-4),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 등은 그 모티프를 전해 주는 중요한 전거들에 해당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에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졌으며 그것은 축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부의 축적 자체를 거부하고 누구나 필요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나의 모티프는 주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주의 기도의 첫 번째 기원 곧 하늘을 향한 기원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대목에서 땅에서의 기원으로 전환한다. 하늘의 정의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원은 인간이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조건들로부터 결핍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각기 다른 시간 동안 일을 한 노동자들에게 하루 생계비에 해당하는 동일한 임금을 부여한 포도원 주인의 원칙이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는 것으로 선포된다. 이 비유는 업적에 따른 분배정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노동의 기회 또는 노동의 시간과 상관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최후심판의 비유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절실한 필요의 요구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절실한 필요의 요구에 직면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 또는 배제된 이들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성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곧 정의를 이루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성서의 관점은 업적의 논리를 일체 배격하는 바울의 인의론(認義論)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정의, 동시에 땅에서 구현해야 할 인간의 정의는 그 어떤 업적을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고 누구나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일차적인 요건으로 한다. 성서의 전망을 따른 정의의 필수적인 요건은 업적에 무관하게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보장받을 만큼 사회적 재화를 분배받는 것을 일차적으로 포함한다.
초기 교회와 교부들 또한 축적된 재물의 불의함을 경고하고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나눔을 강조하였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4세기의 교부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무스(Ioannes Chrysostomus)는 부와 가난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가운데 부의 근원은 어떤 불의에 기초한 것이며 따라서 누군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죄악이라고 하였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배타적 축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토지와 자연 만물에 대한 공유를 역설하였을 뿐 아니라 부자들의 재산상속마저도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축적된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탄식과 사회적 정의의 요구를 외면한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보다 재물에 의지하려는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중세기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필요를 넘어선 욕구로서 탐욕의 죄악성을 주목하였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욕구(wants)를 필요(needs)에 묶어두기를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입장에 공감하였다. 또한 아퀴나스는 소유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까닭에 종종 그 견해가 오늘날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기도 하지만, 아퀴나스의 소유권 개념은 사용권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어 재산에 대한 소유자의 배타적 권리를 옹호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소유권과는 명확히 구별된다. 아퀴나스는 재물에 대한 소유가 인간의 권한 밖에 있고 인간은 단지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소유란 일정한 인간사회의 질서 안에서 필요의 충족을 위한 사용을 효과적으로 이루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또한 대부에 따른 이자를 취하는 것 또한 위법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사람을 죄에 빠트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상과 같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이전의 필요 충족의 경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중세말기의 상업의 발달 등 경제의 변화와 더불어 무력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에 종속되는 경제적 질서, 다시 말해 인간이 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제관은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의 경제관의 목표로서 남아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다는 막스 베버의 명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베버는 종교개혁의 결과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었다든가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가 종교개혁의 결과라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특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 사이에 어떤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을 뿐이다. 베버가 주목한 것은 여러 가지 신앙고백이 혼재하는 지방의 직업통계에서 자본주의적 직업군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그것이 현저하게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에토스와 자본주의 정신의 관계를 주목하였다. 여기서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무제한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것과는 구별되며, 그것은 오히려 비합리적인 충동을 억제하거나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베버가 정의하는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한 이윤 추구, 즉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윤인 수익성의 추구와 동일시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그 정신적 기초가 됨으로써 양자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것이 베버의 통찰이었다.
베버는 먼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성서 번역에서 처음 등장한 Beruf(직업ㆍ소명)라는 독일어 단어에 종교적 표상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 의미는 원전의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속적인 직업에서의 의무 이행을 최고의 도덕적 행위로서 존중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 의미는 세속적 일상 노동이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는 표상을 초래하였다. 다시 말해 수도원적 금욕을 통해 세속적 도덕을 능가함으로써가 아니라 각 개인의 사회적 지위 안에서 자신의 ‘직업’이 되는 세속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통해 신이 기뻐하는 삶을 산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대결하는 가운데 수도원 생활을 세속적 의무를 회피하는 이기적인 냉혹함의 산물이라고 하는 한편 그와 대조적으로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이웃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루터는 세속적 의무 이행은 모든 상황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직업생활에 도덕적 특성을 부여한 것은 종교개혁, 그 가운데서도 루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업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루터의 직업 개념이 베버가 말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친화성을 가졌는지는 의문시된다. 루터의 직업 개념이 세속적 노동에 대한 도덕적 강조와 종교적 보상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은 정작 루터에게서는 전통주의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루터는 자신의 필요를 넘어서는 물질적 이익의 추구를 은총을 받지 못한 상태의 징표로 간주하고, 또한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보았다. 루터는 한편으로는 직업노동의 의미를 강조하였지만, 그것이 신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운명’ 사상에 상응하는 전통주의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즉 각 개인은 근본적으로 신이 정해 준 직업과 신분에 머물러야 하며, 그의 지상에서의 노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회적 지위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결국 루터는 새로운 원칙에 입각해 직업노동과 종교적 원리를 결합시킬 수 없었다. 루터와 그 동시대인들의 입장은 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이전 자연경제로서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계층구조에 의해 제약되어 있었다.
루터가 강조했던 세속적 직업노동이 경제활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그 경제활동에 어울리는 종교적 가르침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의 진전과 함께 칼뱅주의가 확산되는 과정에서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출구를 열기는 하였지만 루터주의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어 기존의 권위를 존중하고 또한 개인적 경건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었다면, 칼뱅주의는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운동으로서 개인의 정화(淨化)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의 재건, 그리고 공사(公私) 모든 삶의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을 강화하여 사회를 쇄신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루터주의가 배경으로 하였던 농촌사회와 달리 상업과 산업이 발전을 주도한 도시사회를 배경으로 한 칼뱅주의는 새롭게 등장한 자본주의적 경제현상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으며 무역과 산업 종사자들을 향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설파하였다. 칼뱅주의의 가르침은 자본, 신용과 은행업, 대규모 상업과 금융, 그리고 기업세계의 여러 현실적 사실들의 필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출발하였다. 쟝 칼뱅(Jean Calvin)과 그 추종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경제적 이익에 집착하는 것을 비난하는 전통과 결별하였다. 그들은 중세의 사상가나 루터라면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을 법한 교역과 금융에서의 이윤을 노동자의 소득과 지주의 지대와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그러나 칼뱅주의의 그와 같은 입장이 경제생활에 대한 윤리적 규율을 포기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칼뱅주의는 상업 및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조건 안에서 바로 그 조건들에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의도하였다. 칼뱅주의는 경제적 동기가 작동하는 삶의 모든 영역을 영적인 삶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자본가를 이웃의 불행을 이용해 부자가 된 사람으로 불신하지 않았으며,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경제적 삶의 전반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뱅주의 안에서 문제가 된 것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방종과 과시를 위한 부의 남용이었다. 칼뱅주의의 가르침이 추구한 이상은 근면한 노동으로 자신의 성품을 단련하고, 신이 용납하는 직무에 전념할 줄 아는 사람들이 균형 잡힌 진지함으로 부를 추구하는 사회였다. 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생활 자체를 하나의 종교적 행위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려는 목적을 지녔다. 그것은 교회에 복종하며 개별적 선행이나 종교적 의례를 통해 세속적 삶을 속죄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과거 세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 전체를 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각자의 성품을 단련하고 더불어 사회를 재조직화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회와 국가 모두를 아우르는 현세적 삶 가운데서 윤리적 이상을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막스 베버는 칼뱅주의의 그와 같은 윤리적 이상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에 ‘예정론’ 교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예정론은 신의 전적인 주권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결국 인간의 공로에 의해 그 결정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적ㆍ성례전적 구원을 폐지하는 것을 뜻했고, 그것은 곧 일체의 주술적 구원 수단을 배격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 교리를 신봉하는 신자들은 교회든 사제든 그 어떤 수단에도 자신의 구원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에 빠진 신자들은 나는 과연 선택되었는지,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하는 끊임없는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은총을 입은 상태의 인식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구원의 확실성’이 중대한 의미로 부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예정론이 신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선택된 자들’의 일원임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칼뱅주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은 선택받은 자로서 금욕주의 윤리를 실천하고, 그 금욕주의 윤리의 구체화된 형태로서 부단한 직업노동을 수행하는 것을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선택으로 간주하였다. 이 금욕주의적 생활양식은 신의 의지를 지향하고 그에 입각해 개인의 현존재를 합리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생활양식은 더 이상 세속 밖의 수도원이 아니라 세속과 그 질서 안에서 구현되었고, 세속의 삶을 합리적인 삶으로 변형시켰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러한 세속적 금욕주의는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우고 소비를 억압하는 한편 전통주의적인 경제윤리의 장애로부터 재화 획득을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윤추구를 합법화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신이 직접 원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전통주의적 경제윤리의 질곡을 분쇄해버렸다. 그로부터 나타난 외적 결과는 금욕적 절약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이었다.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즉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그 통찰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프로테스탄티즘이 전통적인 경제관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확실히 경제에 대한 윤리적 가치 기준을 변화시킨 하나의 혁명이었다. 부의 남용 대신에 부의 선용을 권하는 윤리적 가치 기준은 확고했지만 부의 축적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음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충족시키는 필요 충족의 경제 개념은 이제 진부한 것이 되었다. 금욕주의 윤리가 필요 충족의 경제를 넘어 결과적으로 필요를 넘어선 욕구 충족의 경제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지만, 자본주의 형성 초기 국면에서 그 모순관계는 인지되지 않은 가운데 전통적인 경제관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관을 형성시켰다.


종교적 뿌리를 상실한 자본주의, 그리고 종교화한 오늘의 자본주의

베버는 자신이 관찰한 역사적 현상에 대한 가치판단을 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말미에서 종교적ㆍ윤리적 뿌리를 상실한 자본주의 현상을 언급함으로써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베버는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ㆍ기계제 생산의 기술적ㆍ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다”고 지적한다. ‘강력한 우주’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강고한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형성되면서 인간의 운명 또한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정신이 하나의 망령처럼 인간의 삶을 겉돌게 되었을 때, 마침내 종교적ㆍ윤리적 의미를 박탈당한 영리추구 행위는 마치 스포츠의 특성처럼 순수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한다고 베버는 지적하였다.
베버는 그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지 옛 사상과 이상이 다시 부활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신없는 전문인, 가슴없는 향락인’에 지나지 않는 마지막 단계의 무가치한 인간들이 인류가 지금까지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상상할 것이라며 탄식조로 말한다.
사실 막스 베버가 탄식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분석은 그보다 앞서 칼 마르크스(Karl Marx)에 의해 훨씬 근본적으로 이뤄졌다. 마르크스는 이전에 신성한 임무로 간주되었던 노동이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그렇게 미화될 수 없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신비’를 벗겨낸다. 그저 자기 상실에 지나지 않는 ‘소외된 노동’의 비참한 실상에 대한 주목은 결국 자본주의적 상품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고 이로부터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분석이 이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기본적으로 교환을 위한 방대한 상품의 축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상품의 교환을 원활히 하는 수단으로서 화폐가 통용된다. 사실은 화폐 역시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까닭에 특별한 욕구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 화폐는 단순한 교환수단으로 유통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유통되면서 자본으로 전화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몸집을 불린다. 상품의 생산과 교환, 그리고 자본의 축적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노동의 몫이다. 그런데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의 끊임없는 이윤추구로 노동의 착취가 강화되고, 노동자들이 비인간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1권에서 분석한 요체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상품관계에서 나타나는 물신성(物神性)에 대한 통찰이다. 그것은 상품과 화폐, 그리고 자본이 독자적인 힘을 가진 실체로 오인되고 심지어 절대적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은 사적 소유권에 바탕한 노동분업의 맥락에서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이 생산되고 유통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적 소유권이 전제된 조건에서 교환을 전제로 하는 상품의 생산은 사전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윤 동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렇게 해서 쏟아져 나온 상품들은 이제 저마다 서로 가치를 견주는 가운데 교환되고 유통된다. 여기에서 상품은 마치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오인되고 급기야는 숭배되기에 이른다. 그 상품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폐,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유통되는 자본의 물신화는 그 메커니즘 안에서 완성된다.
그것들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부는 종교개혁을 통해 제한된 조건 안에서 허용되었던 것인데, 종교적 뿌리를 거두어치우면서 이내 부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마침내 종교 자체로 승격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야말로 ‘자본-교’ 아래서 하나가 된 현실을 살고 있다(Paul Lafargue, La religion du capital). 여기서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기존 종교는 사실상 새로운 종교에 영합하거나 기생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에 입각해 윤리적으로 경제를 규율하고자 했던 전통은 사라지고 오히려 경제 현상에 편승해 종교가 존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리스도교 경제윤리의 과제

이런 현실에서 그리스도교 윤리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여기서 두 가지 접근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경제에 관한 가르침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경제관, 즉 인간이 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제관에 바탕한 접근 방법이며, 또 하나는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변화하는 경제 현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윤리적으로 규율하고자 한 접근 방법이다. 전자가 인간의 물질적 삶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오랜 지혜의 전통이 일깨워준 윤리적 이상을 함축한다면 후자는 그 윤리적 이상이 구현되어야 할 변화무쌍한 현실의 조건에 대한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 자본주의 경제 현실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적 진단과 대안의 모색에서 그 두 가지 접근방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에 대한 가치판단의 근거가 분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에 따라 윤리적 규범을 적용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부의 축적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나아가 그럼으로써 그 자체로 종교와 같이 승격된 현실에서 그리스도교 윤리의 과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그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들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로 오늘의 그리스도교 윤리는, 필요 이상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의 삶에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경제생활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그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였던 과거의 지혜를 다시 생각하는 과제를 포함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생활에서의 정의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제를 포함한다.
두 번째로 오늘의 자본주의 현실에 대처하는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미 종교화된 자본의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그 허구성을 드러내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오늘의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한 방편으로서 경제체제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 됨으로써 종교화되었다. 자본주의가 종교화되었다는 것은 그 나름의 형이상학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오늘의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자연적 질서일 뿐 아니라 곧 신의 섭리로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앞서 말한 경제 차원에서의 문제점들에 대한 극복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제질서를 자연적 질서이자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형이상학의 철폐를 동반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물신숭배에 관한 분석 이래 신학에서도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지금 말한 두 가지 차원의 과제 모색은 이미 자본주의의 폐해가 본격적으로 노정된 시점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꾸준히 시도되어 왔다. 가톨릭교회의 일련의 사회적 회칙들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에는 교황의 발언을 통해서도, 또한 개신교의 에큐메니칼 논의의 지평에서도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 현실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이 늘 중심적 주제가 되어 왔다. 이 발제는 그러한 시도들의 중요성을 새삼 환기하고, 그 시도들이 함축하는 의미가 오늘의 교회 안에서 실천적 윤리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경제를 넘어선 신학적ㆍ실천적 상상력

이상에서 확인한 그리스도교 경제윤리의 접근 방법을 전제할 때, 오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경제를 넘어서는 대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색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그리스도교의 경제윤리의 두 가지 접근 방법을 유념한다면, 그 대안은 필요 충족의 경제를 지향하되 그것이 오늘의 기술적ㆍ물질적 발전의 조건 가운데서 구체화하는 방안이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발생한 사회적 위기와 경제적 위기를 넘어선 정상의 회복이 코로나19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가 아니듯, 오늘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경제를 넘어선 대안이 자본주의 이전의 농경사회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일 수 없다. 그 대안은 이미 성취한 기술적ㆍ물질적 조건의 기반 위에서 자연과 사람을 더 이상 착취하지 않는 경제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착취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을 뜻하며, 그와 동시에 기존의 관계에 매여 있는 인간의 욕망을 재배열하는 것을 뜻한다. 앞선 논의에서 검토되고 제안된 여러 사회정책들과 제도적 방안들은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자연과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경제, 무한한 욕구를 자극하지 않고 적절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경제를 위한 관계의 재구성은 역시 정치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준다. 지구적ㆍ지역적ㆍ국가적 살림살이를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방안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이를 제도화하는 정치의 중요성이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한편의 무능한 정치(미국과 유럽 등)와 또 다른 한편의 권위주의적인 정치(중국)를 넘어서는 대안이 요청되고 있는 점을 통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말하는 바와 같이(Pandemic! COVID-19 Shakes the World, 2020) 그 대안을 일종의 ‘전시 공산주의’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진정한 효율성을 함축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비상한 대안의 절박함은 비단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드러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노정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이 비로소 자본주의 경제 위기를 빚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드러난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킨 계기로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볼 때,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위기의 진단과 대안의 모색은 여전히 귀담아 들어야 할 가치를 지닌다. 예컨대 “과연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지?”를 묻는 근본적 물음(Robert SkidelskyㆍEdward Skidelsky, How Much Is Enough?: The Economics of the Good Life, 2012)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성취한 기술적ㆍ물질적 조건 위에서 인류를 해방하고 지구 생태계를 지키는 대안을 꿈꾸는 상상력(Aaron Bastani,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 2019)에 이르기까지 그 지혜를 모으며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미 앞서 이야기한 바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인간의 살림살이에 관한 오랜 지혜들을 갖고 있다. 욕망의 절제와 이타적인 나눔의 삶을 그 요체로 하는 지혜이다. 지금이야말로 그 지혜를 우리의 삶 전반에 실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체제와 그 삶의 방식이 파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이지만, 그것은 확실히 새로운 대안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명의 전환 기회일 수 있다. 비로소 전 지구적 ‘인류애’를 실감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이웃의 문제가 곧바로 나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 절감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적 이해관계로 얽힌 차원에서 나아가 생명 그 자체가 서로 얽혀있다는 자각에 기반하고 있다.
또한 오늘 겪고 있는 위기가 특정한 인간문명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진단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비관의 근거만이 아니라 동시에 희망의 근거일 수도 있다. 그 위기는 인간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에 동시에 극복의 실마리 또한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이든 특정한 경제적 삶의 방식은 그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뤄진 사회적 질서의 일부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대안 역시 인간의 선택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성취된 기술적ㆍ물질적 조건 위에서 결핍으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더 이상 인간이 자연과 다른 인간을 착취하지 않는 경제적 살림살이에 대한 전망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선택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천진난만한 낙관론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인간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더욱 겸허히 되새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을 깊이 새기면서도 선택 가능한 최선의 방안을 찾아간다면 최소한 오늘 자본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는 경제질서에 다가설 수는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 또한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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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