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 가운데 오신 평화의 그리스도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2-05 21:05
조회
287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회보 2022년 12월호 성탄절 특집 원고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 가운데 오신 평화의 그리스도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4세기경 로마제국의 군사 저술가 베게티우스(Vegetius)의 격언이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가하던 로마제국은 그 격언에 충실했다. 그 로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던 로마제국은 결국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붕괴하고 말았다.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그 격언을 따라 군사적 우위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 충실하다. 역사가 입증하듯 그 결과는 언제나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통치자들은 그 믿음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그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지만, 바로 지금 당장 현실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올해 200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였다. 단기간에 사태가 종료될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종전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사실상 진영을 대리하는 전쟁양상으로 번져 지속되고 있으며, 식량과 에너지 문제까지 야기하며 세계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군사적 대결을 추구하는 전쟁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로 인해 세계인들의 일상적 삶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두말할 것 없이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반도의 군사적 위험상태와 직결되어 있다. 전쟁의 경제적 파급효과로 일상의 삶이 위협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군사적 긴장상태가 고조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왔던 남북간의 화해 기조가 더 이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이르는가 싶었는데, 올해 5월 정권이 바뀌면서 군사적 대결의 긴장이 격화되고 있다. 중단되었거나 축소되었던 한미 연합훈련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고, 심지어는 일본군까지 끌어들인 군사훈련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에 맞대응하여 북측은 연일 무력시위를 거듭하고 있다. 남측의 강화된 군사훈련은 북측의 무력시위를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빈번하고 강도 높은 도발을 야기하는 상황이다. 군사적 충돌을 억제할 수 있는 외교와 협상은 볼 수 없게 되었고, 서로 상대를 자극하는 험한 말과 행동이 지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명백하게 힘의 우위에 의한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믿음의 길을 걸어 왔다. 바로 ‘로마의 평화’가 정점에 이른 그 시기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믿음을 따르는 길이다. 그 길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따르는 길이다. 그것은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는 태도로 이루는 평화이다. 사랑으로 이루는 평화요, 정의로 이루는 평화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공통적으로 그 탄생을 로마의 평화와 대극되는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적 안목을 가진 누가는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처음부터 그 의도를 분명히 한다. 예수가 탄생한 시점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위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막연한 배경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통치와 예수의 탄생이 대극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숱한 전쟁 끝에 로마의 평화를 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으로 인구조사가 실시되고, 평온하게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부산히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길 떠난 그곳에는 편히 쉴 만한 방도 구하기 어렵다. 그저 바람만이라도 막아줄 처소인 외양간에서 마리아는 예수를 낳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두고 누가는 구원자로 선포한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여겨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진정한 구세주요, 그로부터 이룩된 로마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마태는 아기 예수의 탄생 배경을 헤롯왕의 통치시기로 설정하고 있다. 헤롯왕의 통치는 로마제국의 지배와 직결되어 있다. 헤롯은 로마의 유대 분봉왕으로서 가혹한 조세정책으로 민중들을 수탈하여, 그 재물을 로마 황제와 귀족들에게 바쳤고, 쉴새없는 건축사업으로 그 건축물들을 로마 황제에게 헌납하였다. 그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로마군의 힘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마태는 누가와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전한다. 동방박사의 등장은 로마의 평화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 질서의 탄생을 고대하는 당시 세계 사람들의 열망을 나타낸다. 마태는, 그들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접한 로마제국의 분봉왕 헤롯왕이 불안해했다는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로마의 평화가 파열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흔히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극적 평화일 뿐이다. 보다 적극적 의미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삶 전반에 폭력이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 이 때 평화의 반대말은 폭력이다. 그 폭력은 단지 개별적 차원에서 가해지는 완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구조적 폭력, 나아가 문화적 폭력까지도 포함된다. 구조적 폭력은 정의가 부재한 상황이다. 문화적 폭력은 그 구조적 폭력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술책이다.
많은 경우 전쟁 없는 평화를 추구하는 전략은 사실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오용된다. 이 때 평화란 소극적 평화로서조차도 의미를 지닐 수 없고 그저 기만적 평화, 허구적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란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체감하는 평화이다.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삶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 일상의 삶이 전쟁터와 같지 않은가? 총포가 날지는 않지만, 총포처럼 몸이 뛰어다니며 총포가 빗발치는 듯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평화의 그리스도로 오신 아기 예수를 맞이하며 진정한 삶의 평화를 간절히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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