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40] 약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 - 고린도전서 1:26~3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10-15 22:24
조회
1264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10월 15일 / 최형묵 목사


제40강 약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 - 고린도전서 1:26~31



1. 약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 - 1:26~29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약함을 역설한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각자 저마다의 처지를 돌아볼 것을 말한다. 애초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라는 것이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실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미약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다. 물론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사도 바울 시대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예컨대 고린토의 재무관 에라스토, 롬 16:23; 회당장 사도행전 18:8). 하지만 초기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노예들 또한 적지 않았다(7:21). 바울이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처음의 처지를 잊고 저마다 각기 지혜를 자랑하는 것으로 분파를 형성한 고린도교회에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환기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단순히 사실로서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사회적으로 유력하지 않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오히려 세상의 유력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상황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같은 조건이 진정으로 구원의 사건에 동참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요체라는 것을 말한다. 결여된 존재들로서 완전한 구원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신학적 통찰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이다. 우리가 공동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적 구조나 질서 또는 제도와는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현실로 존재하는 그 질서는 결여를 참지 못한다. 그 질서는 누구에게든 뭔가 자격을 갖추어야만 한 자리를 내어 준다. 그 질서 안에서 결여된 존재는 아예 배제의 대상이 되거나 기껏해야 동정의 대상, 시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질서 안에서 결여된 존재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히려 그 결여를 진정한 공동체의 존립여건으로 삼는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그 결여를 스스로의 존립여건으로 삼는다.

사도 바울은 결여를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조건이라고 선포하는 셈이다. 스스로의 결여를 통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결국 나아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원리이기도 하다. 세상 어떤 것도 자족적인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결여를 채워주고, 서로가 서로를 떠받쳐 주며 살아가는 것이 생명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떠받쳐 주는 삶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며,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구원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2. 진정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 1:30~31


바울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의미를 역설한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지혜가 되며, 의가 되며, 거룩함이 되며, 구원이 된다. 여기에 배열된 의미들은 구원의 특별한 의미를 구성한다. 그리스도가 지혜가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유대인이 추구하는 것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것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어떤 도를 재삼 환기시킨다. 그런 것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났다는 이야기이다. 그 지혜를 따를 때에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인간 스스로의 업적에 의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바로 앞에서 ‘비천한 것’, ‘멸시받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이 선택하였다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사회의 법칙은 업적에 의해 인정을 받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바울에게서는 주로 도덕적인 정화를 의미한다. 의롭다 인정받고 나아가 윤리적 주체로서 당당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인 정화 역시 전반적인 문맥에서는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삶 자체가 거룩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적 의지를 배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렇게 거룩하게 되는 가능성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길 안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말미에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것들이 갖는 의미를 구성해 주며 동시에 구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드러내준다.

구원이 어떤 대가를 치름으로써 이뤄진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진술이 바울서신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6:20) 이 문맥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없다. 속량의 개념에 대해서는 그 개념이 등장할 때 더 깊이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큰 대가를 치렀다는 것에 대한 유비적 표현일 뿐 전통적 의미의 제의적 효과를 유념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는 구원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은 아예 배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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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10 08:26
    역사적 사건 개입으로서의 기적과
    rn깨달음의 득도(지혜) 사이에서
    rn우리가 가야할 길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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