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47] 고린도교회 교우들과 사도들 - 고린도전서 4:6~1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3-04 21:56
조회
1365
천안살림교회 2015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5년 3월 4일 / 최형묵 목사


제47강 고린도교회 교우들과 사도들 - 고린도전서 4:6~13


1. 무엇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4:6~7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강조한 바울은 재삼 그 태도를 자신과 아볼로에게 적용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고의적으로 다른 사도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아볼로만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아볼로의 입장의 동일성을 재삼 확인해주는  한편 그렇게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가르침을 두고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라” 하는 격언을 환기하며 한쪽 편을 옹호하고 한쪽 편을 얕보는 태도를 질책하고 있다. 여기서 원문에 불완전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격언은 해석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대체로 통용되는 번역상의 격언은 이른바 ‘성서문자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오용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기록된 말씀’은 통상 구약성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그것은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서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이해된다면 그것은 문자로서 율법조문의 폐해성을 강조한 바울의 입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그 격언의 의미는, 지금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가 마치 자신들의 입장을 절대적 기준으로서 ‘캐논(canon)’과 같이 여기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이든 아볼로이든 어느 한편을 높이면서 다른 한편을 낮추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이 격언을 환기하고 있다.

바울은 다시 자신들이 취한 입장을 강조한다.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일 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것을 촉구한다.      


2. 고린도교회 교우들과 사도들의 대비되는 태도 - 4:8~13


바울은 자기 정당성에 매몰되어 자족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격하게 꾸짖기 시작한다. 바울은 그들의 교만함을 꾸짖으며, 그들의 교만함과 대비되는 사도의 처지를 말한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 성취한 것으로 생각하는 착각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은혜를 망각한 삶이다.

벌써 배가 불렀고, 부자가 되었고, 왕이 된 듯 다스리려 한다고 질책한다. 여기서 부자나 왕은 바라는 바 최고의 목표를 나타내는 은유에 해당한다. 그것은 곧 종말론적 완성의 상태를 말한다. 장차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지만, 결코 그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행세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이미 완결된 세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 분열과 갈등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존재로 서 있는 듯이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착각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한다. 자신들은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마치 하나님께서 사도 자신들을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신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들의 진실한 모습과 착각 속에 빠진 사람들을 대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들은 약하나,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강하다. 사도들은 천대를 받고 있으나,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영광을 누리고 있다.

사도들 스스로의 처지를 말하는 대목은 더더욱 절절하다. 서신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것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라 아니라 사도들이 처한 실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들은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일하면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복음전파의 사역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복음전파의 사역과 동시에 생계를 위한 노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이가 다른 생업을 갖고 있다는 것은 미덕이 될 수 없었다. 아마 고린도교회 교우들도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정황 가운데 있었다. 그 만큼 분투하고 있는 실상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지 사도들이 직면한 고충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부유하고 왕다운 태도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11~13절) 이것은 분명히 사도들이 실제 겪고 있는 처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끊임없는 삶의 지향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자도 왕도 아니면서 부자와 왕의 행세를 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삶의 지향성을 말한다. ‘세상의 쓰레기’가 되고 ‘만민의 찌꺼기’가 되는 자기인식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부유해지고 진정으로 권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다.  

진정한 부자,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쓰레기, 만민의 찌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역설은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실에서 영영 어떤 합치점을 찾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설은 세상의 모든 자기만족적인 정당화의 논리와 완결된 세계의 논리의 허구성을 끊임없이 들춰낸다.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을 꿈꾸게 만든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동성이 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