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52] 그리스도인의 자유 - 고린도전서 6:12~2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4-22 21:18
조회
1278
천안살림교회 2015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5년 4월 22일 / 최형묵 목사


제52강 그리스도인의 자유 - 고린도전서 6:12~20


기본적으로 사도 바울의 중심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로 집약된다. 율법을 따르는 데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데서 누리는 자유를 사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본문 또한 그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남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자유를 온전히 제대로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딱 줄여 말하면, 자유란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바울은 단지 그 상식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해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구체적인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구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첫째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라는 명제에 이어 바울은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명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역설한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그 스스로 받아들일 만한 명제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 명제는 바울이 걱정하고 있는 어떤 경향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경향은 아마도 영지주의적 윤리관과 관련되어 있다. 영적인 지혜를 소유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육체적 삶을 경시하였던 영지주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윤리적 태도를 낳았다. 한편의 사람들은 육체의 쾌락을 억제하는 금욕주의를 따랐고 또 한편의 사람들은 육체적 삶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다고 보고 일종의 쾌락주의를 따랐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특별히 유념한 것은 후자의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 되었지 육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고,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좋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대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라는 명제가 다시 반복되고 있지만 바울의 대구는 앞과는 다르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언뜻 볼 때 대구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논법이다.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 곧 ‘자유롭다’는 것과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면, 그 말의 실질적 의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 대구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태도가 실질적으로 어떤 제재를 받는 처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삶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어떤 것에 매이게 만드는 현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든다면 ‘중독’ 현상을 들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어떤 행위가 결과적으로 나의 의지에 의해 선택된 행위가 아니라 거꾸로 그 행위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현상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목적 없는 자유의 남용은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명제는 매우 구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의미는 아리송해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음식물 내지는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먹는 것의 문제가 끊임없는 논란거리였다. 바울은 음식에 대한 금기를 부정했다. 이 명제는, ‘음식은 음식일 뿐으로 그것이 저마다의 배에서 받아들여진다면 못 먹을 것이 어디 있느냐’는 뜻이다. 음식에 대한 금기의 부정이다. 이에 대해 대구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도 일단 그 명제의 의미를 긍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이 규정한 금기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내용상 진정한 대구에 해당한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역시 아리송해 보이는 구절이지만, 바로 여기에서 바울의 의중이 드러나 있다. 초대 기독교에서 음식물에 관한 사항이 중요한 논란이 되었고, 바울 역시 이에 관해 누차 의견을 밝혔지만, 이 대목에서 음식물에 관한 태도는 일종의 비유적인 차원에서 언급된 것일 뿐, 바울이 정작 말하고자 한 것은 ‘음행’이라고 한 데 있다. 바울이 진정한 자유가 아닌 방종의 가장 심각한 현상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음행’이었다는 것을 이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와 대비되는 창녀의 지체는, 본문의 전후문맥을 볼 때 단순히 비유적인 대비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우들 가운데 발생한 실제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 본문을 전후로 5장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주로 언급하는 내용들이 성 문제와 남녀간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니다.

그리스ㆍ로마 문화권에서는 이런 속담이 통용되었다. “고린도는 매일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린도가 환락의 도시였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로서, 자유의 남용으로서 방종이 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교회 교우들 가운데서도 육체의 환락을 거리낌 없이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영혼이 구원받았으면 육체는 아무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본문은,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남용되어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왜 자유가 방종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될까? 첫 번째로 한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본문이 강조하는 진정한 의미로서, 개인의 자유는 스스로의 몸을 해치는 것이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몸은 단지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 바울이 몸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전인적 주체로서 인간을 뜻한다. 바울은 그 몸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를 이루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곧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인격적 주체로서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죄를 짓는다는 것 역시 자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역시 관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자유가 자기만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온 몸의 유익함과 건강함을 위해 선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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