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민중신학과 맑스주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45
조회
5135
* 제1회 맑스 코뮤날레(2003.5) 발표논문  / 각주 포함한 전문은 별첨


민중신학과 맑스주의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신학)


1. 기독교와 맑스주의: 대결에서 협력으로  


신학과 맑스주의와 상관성을 논하는 일은 처음부터 상당한 편견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도대체 초월적 신을 전제하는 신학과 무신론을 전제로 물질세계의 합법칙성을 규명하는 맑스주의 또는 유물론이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이 가장 원초적이며 고전적인 의문이 그 편견의 시발점이다. 종교를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보고 있는 맑스주의 전통에서나, 맑스주의를 그저 무신론의 한 갈래로 치부해버리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보면 그와 같은 편견은 사실상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사실상 지배체제와 동일시되어온 서구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악연' 또한 그와 같은 편견을 정당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그 악연과 편견으로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확실히 대결관계를 맺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맑스주의 관계가 대결의 관계로만 고착되어 온 것은 아니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한편으로 대화와 협력의 관계를 꾸준히 모색해 왔다. 양자 사이의 대화와 협력의 모색은 기존의 편견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양자 사이의 대화와 협력의 모색은 양 진영의 자기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우선, 맑스주의 진영의 변화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의 붕괴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사실상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던 스탈린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DIAMAT)이라는 이름으로 맑스주의를 교조화하였다.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된 맑스주의는 하나의 완결된 철학적 세계관으로 인식되었고, 그와 같이 닫힌 체계로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기독교 신학은 도무지 접목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전투적 무신론과 종교비판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 사후, 그리고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사회주의 혁명전략의 다원화가 추진되었고, 동시에 교조화된 맑스주의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균열현상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맑스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대화와 협력 모색의 동인은 기독교 진영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예비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사실상 서구 역사를 지배해온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맑스주의를 분명히 기독교의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였다. 처음 기독교가 맑스주의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에도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서보다는 경쟁의 상대로 인식했을 뿐이었다. 맑스주의를 가장 강력한 세속적 메시아니즘으로 보고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관심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서 진일보한 태도였다. 적어도 기독교의 전통적 메시아 신앙이 무력해진 데 반해 세속적 메시아 사상이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비로소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체제의 무자비함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점에서 기독교는 맑스가 종교비판을 해야만 했던 진의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그 관심은 여러 계기를 통해 표명되었다.

1891년 중세 이후 교황의 최초의 '사회적 회칙'인『새로운 것에 대하여』(Rerum Novarum)에서 교황 레오(Leo) 13세는 사회주의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계급투쟁 역시 거부하였지만, "고용주들의 무자비와 고삐 풀린 경쟁의 탐욕에 유기되고 소외되었으며,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온" 노동자의 현실에 주목하였다. 그로부터 40년 후 교황 비오(Pius) 11세는 새로운 회칙『40년』(Quadragesimo Anno)에서 여전히 사회주의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의문과 함께 소유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에 대해 깊이 고려하였다. 중세 이래 서구 지배세력을 대변해온 카톨릭 교회의 이와 같은 변화는 1960년대 교황 요한(John) 23세에 이르러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맞이한다. 그는 회칙 『어머니와 선생』(Mater et Magistra, 1961),『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등을 통하여 전임자들보다 훨씬 급진적인 원칙들을 제시하였다. 노동자들이 공정한 임금을 받을 권리를 역설하는 한편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말했고 최후 수단으로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표현과 함께 국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사회주의와 무신론에 대한 비난을 삼가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 가능성까지 언급하였다. 1967년 교황 바오로(Paul) 6세의 회칙『시민의 개발』(Populorum Progressio)은 자본주의를 준엄하게 고발하면서 현대 세계경제의 빈부격차는 혁명의 가능성을 용인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카톨릭교회의 입장 변화는 맑스주의에의 '감염' 예방효과를 노린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맑스가 제기하였던 종교비판의 진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맑스주의와의 긴밀한 협력을 시도한 남미의 해방신학 역시 그러한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개신교 편에서도 교황 레오의 회칙이 등장할 즈음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응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종교개혁 이후 사실상 시민의 종교로 자기 위상을 정립해 온 개신교 안의 중요한 변화였다. 이른바 기독교사회주의운동이라 일컫는 운동이었다. 영국의 루드로우(J. M. Ludlow)와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 등을 선구로 한 기독교사회주의운동은, 기독교 교회가 점점 더 지배계급과 동일화해 가는 반면 교회로부터 벗어난 노동계급이 성장해 가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 운동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 비판과 함께 노동자들을 재기독교화 하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운동이 유럽 대륙에서도 일어났다. 1899년 독일의 저명한 목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의 사회민주당 입당을 선구로 시작된, 유럽 대륙의 기독교사회주의운동은 1920년대 전후 스위스의 헤르만 쿳터(Hermann Kutter)와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 그리고 칼 바르트(Karl Barth)와 폴 틸리히(Paul Tillich) 등으로 이어졌고, 훗날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로 대표되는 미국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기독교사회주의운동은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보다는 민족과 전체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이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결국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이 추구한 민주적 진화적 사회주의 속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그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오늘 서구 기독교의 급진적 신학에 그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제2차 대전 후 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컬운동으로 표명되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책임사회' 이념을 제창했는데, 이 이념은 정의와 자유의 균형을 강조함과 아울러 공공질서 안에서 책임성을 자각한 주체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의 일종의 윤리적 규준으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나, 혁명적 사회 상황 가운데 있었던 제3세계 교회들의 부상과 더불어 그 타당성을 의심받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유 민주주주의 이념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결국 급진적 혁명의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이 될 수 없는 추후 적응논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그와 같은 관심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몫을 하였고, 거기에서 급진적 전환은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1969년 세계교회협의회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동협의(사회ㆍ개발ㆍ평화에 대한 임시위원회: SODEPAX) 과정에서 구티에레즈(G. Gutierez)가 해방의 모티브를 강조함으로써 해방신학의 단초를 제시한 것은 그 새로운 인식의 구체적인 한 계기가 되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혁명에의 요구를 수용한 해방신학이 맑스주의적 인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이러한 전환의 기회를 통해서였다. 이와 같은 과정이 시사하는 바는, 적어도 전통적인 편견으로 기독교가 맑스주의를 배척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발을 내딛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서로 다른 이념 및 진영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어쨌든 그와 같은 기독교 내부의 꾸준한 변화 과정과 맞물린 소련의 스탈린 체제의 붕괴는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새로운 관계 모색에 중대한 전환의 계기를 부여해 주었다. 특히 유럽에서 맑스주의자들과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 대화가 활발해졌다. 1964년 프랑스 리용에서는 프랑스 공산당 대표들과 신구교 대표들이 함께 모여 "맑스주의와 초월성"을 주제로 하여 토론하였다. 이 대화에서 가로디(Roger Garaudy)는, 국가권력과 화폐경제가 상존하는 한, 또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는 한 종교는 오늘날 인류를 위한 그 객관적 존재 가능성을 인정받으리라고 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도 1963년 이래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논제로 한 연구모임이 지속되었는데, 이 모임들에서는 주로 각기 자신의 존립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필요하면서도 또 시대적 제약을 받고 있는 자신의 전통이 문제시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적인가, 또는 무신론은 맑스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인가 하는 것 등이 문제되었다. 유럽에서의 이와 같은 일련의 대화 시도는 1967년 마리엔바트(Marienbad)에서 독일의 바울협회(Die Paulus Gesellschaft)와 체코 과학아카데미가 주최한 협의회를 통해 하나의 이정표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 협의회는 그간의 맑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설정되어 왔던 전선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은 국가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현세적 유의성을 밝히려고 노력하였고,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종교비판을 수정하고 소외되지 않은 초월성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에 대해 물었다.

그와 같은 관심의 초점은, 사회적 혁명을 정당한 요구로 인식하고 있던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또 다시 새롭게 전화되었다. 니카라구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창설자 카를로스 폰세카(Carrlos Fonseca)의 말대로 "피압박 민중을 위해 투쟁한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와 토레스(Carmilo Torres) 신부가 함께 총을 들어 만들어낸 통일"이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시사하듯,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기존의 편견을 뛰어넘어 협력을 하는 차원에 이르렀다.


2. 민중신학과 맑스주의의 만남


오늘 우리가 기독교와 맑스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전제한다. 곧 완결된 세계관으로서 기독교, 역시 완결된 세계관으로서 맑스주의의 관계문제를 따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유의성의 차원에서 양자가 어떤 관계에 있을 수 있는가를 따지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완결된 세계관으로서 기독교 또는 맑스주의를 전제하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예수쟁이'가 다양한 만큼 '맑스쟁이' 또한 다양한 것이 현실이다. 유일무이한 기독교도 없으며, 유일무이한 맑스주의 또한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나 맑스주의는 당대에 의미 있는 기독교이거나 맑스주의일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 칭해지고 '맑스주의'라 칭해지는 것은 저마다 고유한 것이라 여겨지는 어떤 핵심을 계승하고 재해석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고유한 것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논란이 제기되겠지만, 그 논의는 유보하겠다. 현실적으로 어떤 필요성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였는가 하는 점에 한정하여 양자의 관계를 검토하려 한다.

여기에서 특별히 다루려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하나로서 민중신학과 맑스주의와의 상관관계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맑스주의와의 상관관계이다. 민중신학이 맑스주의의 현실적 유의성을 주목했을 때 맑스주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기독교 신학에서 어떤 유의성을 발견했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기독교 신학, 그 가운데서 민중신학을 하는 입장에서 맑스주의의 유의성을 판단할 따름이다. 나는 그 논의를 민중신학 세대론을 따라 전개하려 한다.


1) 제1세대 민중신학의 경우: 반신학과 맑스주의

한국 민중신학이 처음부터 어떤 '학문적' 충격으로 태동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민중신학은 상징적 의미에서나 실질적 의미에서 '민중사건'에서 출발하였다. 그 '민중사건'에 대한 자각은 구체적으로 1970년 '전태일사건'에서부터였다. 훗날 민중신학자들로 불리게 될 이들은 그 사건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그 사건이 한국에서 해방 후 노동문제를 제기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다. 민중신학자들은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공감하였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였다.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사적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그 사건을 신적 구원의 사건으로 인식했다. 신적 초월의 지평을 거부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신적인 구원사건으로 인식한 신학의 발상이 오히려 그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신적 구원의 사건으로 인식한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로 신학적 인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전환으로 신학 자체의 재구성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민중신학이다.

예컨대, 한 노동자의 죽음을 전통적 신학에서라면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당시에도 실제로 제기되었던 논란이고, 이후 80년대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극한적인 분신투쟁으로 자기의 목숨을 버렸을 때에도 기독교계에서 재연되었듯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교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 사건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사적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고, 심지어는 구원사적 사건에 역행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조금 나아가 다소 온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아마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사건 정도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그 사건을 '예수사건' 곧 신적인 구원사건으로 인식해버렸다. 민중신학은 전태일의 죽음에서 예수의 죽음을 보았다. 전태일이 자살했다지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 사회 자체 그리고 그 상황을 방기하고만 있었던 모든 사람이 결국 그를 죽인 것이었다. 예수의 죽음은 명백히 타살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언행을 스스로 일삼았다면 그것은 과연 타살일까, 자살일까? 문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상황이다. 그 죽음이 말하는 진실, 그것이 바로 신적인 구원사건이라고, 민중신학은 인식한 것이다.

당연히 민중신학은 전통적 신학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중신학자들 스스로 언명하듯이 민중신학은 '반신학'(反神學)이요, '탈신학'(脫神學)이다. 반신학, 탈신학은 이전의 신학들과 달리 새로운 인식, 새로운 언어를 요구하였다. 민중신학이 맑스주의의 유의성을 인정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스스로 '크리스챤 맑시스트'라고 자임하였던 서남동에게서 그러한 인식은 가장 뚜렷하였다. 물론 과연 서남동이 자신이 말한 대로 '맑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그와 같이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스스로 맑스주의적 인식을 명시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점이 민중신학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서남동은 당대의 혁명ㆍ정치ㆍ해방의 신학이 맑스주의의 도전에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맑스주의와의 대화와 경쟁으로 기독교가 잃었던 활력을 되찾아 민중의 종교로 복귀하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서남동이 맑스주의적 인식을 수용한 흔적은 그의 민중신학 구상 전반에 나타난다. 그는 매우 빈번히 '사회사적 해석', '사회경제사적 해석' 또는 '물질주의적 해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와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제약조건"을 분명히 밝히고, 나아가 "자기 역사와 운명의 주체가 될 민중의 정체"를 포착하기 위한 방법론을 지시한 데서 그와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와 같은 개념들이 맑스주의 유물론을 유념하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70년대 또는 80년대 초반 우리 사회에서 맑스주의는 공공 담론 영역에서 금기에 해당하였다. 기독교 신학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말할 것 없었다. 앞서 살펴 본 대로 60년대 이후 이미 서구 급진적 정치신학에서는 맑스주의와의 대화 문제가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었지만  우리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신학이 스스로 '맑스주의' 표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은 부담스럽고 때로는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서남동을 비롯한 당대의 모든 민중신학자들이 아카데미즘에 몰두해 있던 학자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역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위험 부담은 더욱 컸다. '용공'의 딱지가 붙으면 그 어떤 주장도 금압되고 말았던 상황 때문이다. 더욱이 냉전 분단구조하에서 세계의 그 어떤 기독교보다도 철저하게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 현실에서는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맑스주의를 직접 지시하는 개념보다는 그와 같은 우회적인 표현을 즐겨 썼던 것이다. 때로 서남동은 민중신학이 맑스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애써 주장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민중신학은 맑스주의와의 상관관계를 떠나서는 그 전모를 이해하기 어렵다.

서남동은 사실상 맑스주의적 인식을 의미하는 '사회사적 해석' 내지는 '물질주의적 해석'을 기존 신학의 전제들을 비판하고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신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인식론으로 삼는다. 그것은 "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제약조건"을 밝힘과 아울러 "역사와 운명의 주체가 될 민중의 정체"를 포착하겠다는 데서 드러난 의도이다. 그래서 서남동은 신의 '계시' 자체가 물질적 하부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이 개념은 서남동이 맑스주의의 유물론적 인식을 얼마나 비중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 개념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계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의 계시는 '사회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물질적 계시'라고 본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의 선택을 받은 '가난한 사람' 곧 민중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가 아니라 계시의 구성적 요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착상에서 시작하여 서남동은 "하부구조에서(몸)에서 유리된 상부구조(이념)만의 전통적 신학"은 "유령이요 아편"이라고 단정지었다. 여기에서 서남동은 확실히 맑스의 종교비판 이후의 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남동과 함께 민중신학의 또 다른 정초자인 안병무에게서도 맑스주의의 영향은 미묘하기는 하지만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물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말함으로써 맑스주의적 인식의 유의성을 직접적으로 언명한 것은 80년대 초반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격랑을 거친 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서학자로서 성서에 대한 사회학적 내지는 사회사적 연구 방법론을 적용한 것은 그 전부터 맑스주의적 방법론의 수용 가능성에 열려 있었다 할 것이다. 물론 성서에 대한 사회학적 내지는 사회사적 해석이 곧바로 맑스주의적 유물론적 인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조건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의 선구자로는 막스 베버가 꼽히고 있고, 신학 특히 성서학에서는 그의 방법론이 널리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많은 경우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러나 성서연구에서 '신학적' 해석의 차원만이 아닌 '사회학적' 해석의 차원의 수용은 또 다른 입장의 사회학의 수용 가능성으로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진행된 성서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은 그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안병무가 유물론적 해석을 지향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중사건 안에서의 예수와 민중의 동일시를 말했던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 지배세력과 대별되는 민중의 정체를 인식하는 문제는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서남동이 말했던 "계시의 하부구조"로서 민중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지향했던 사회사적 해석은 맑스주의적 방법론과의 친화성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민중을 옭아매는 '죄'의 실체를 사회 구조악으로 인식하고, 동시에 자본주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신학적 입장도 은연중 그 친화성을 시사한다. 서남동과 같이 맑스주의 수용을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 정신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 결과 비로소 "물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말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인정한 것이다.

민중신학이 영향을 받거나 또는 명시적으로 수용했던 그 맑스주의적 방법론을,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맑스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러나 민중신학, 특히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그의 신학적 인식의 중요한 부분이 상당 부분 맑스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결국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민중신학의 중요한 명제를 더욱 분명히 함과 아울러 민중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서남동은 민중에 대해 말하기를, "땅을 정복하고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ㆍ억압되어 천민ㆍ죄인으로 전락"했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돌리고 하느님의 공의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입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소외의 표현으로서 종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 준다. 민중의 소외 현상으로서 종교가 아니라 민중의 역사 주체성의 회복으로서 종교를 말함으로써, 민중신학이 맑스의 종교비판 이후의 신학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와 같은 민중신학은 맑스주의와의 경쟁적 대결의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맑스의 종교비판의 진의를 충분히 헤아림과 동시에 맑스의 현실인식 방법을 진지하게 수용한 결과이다. 요컨대, 민중신학이 맑스주의의 유용성을 인정한 것은 다른 어떤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민중의 주체성을 해명하려는 관심사 때문이었다 할 것이다.  


2) 제2세대 민중신학의 경우: 정치경제학적 현실분석과 신학적 성찰의 결합

역사 주체로서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는 민중신학과 맑스주의의 관계 모색은 1980년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급성장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운동 양상과는 구별되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으로 조직적 발전 양상과 함께 과학적 인식의 대두였다. 운동의 조직화는 전체운동과 부문운동의 관계 정립을 요구하였고, 운동의 과학화는 새로운 현실인식과 이념적 선택을 요구하였다. 바로 그러한 두 가지의 요구에 부응하여 맑스주의의 수용이 이뤄졌다. 당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전위적 집단에 수용된 맑스주의가 사실상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불리는 스탈린주의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한국사회에서 해방 이후 단절된 맑스주의 전통의 재현이 갖는 의미는 중대하였다.

운동의 조직화와 과학화는 당시 민중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운동 진영에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우선 운동의 조직화는 기독교운동에는 사실상 위기를 의미했다. 민중운동이 미분화되었던 1970년대 기독교운동은 기독교 조직이 갖는 여러 장점으로 인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조직화와 더불어 진행된 각 부문운동의 활성화는 민중운동에서 기독교운동의 고유성이 과연 무엇인지 심각한 의문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활동가들이 기독교 내지는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현상이 현저해졌다. 한편 운동의 과학화 현상으로 수용된 맑스주의 유물론과 기독교 신앙의 길항은 그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미 민중신학이 일정하게 맑스주의의 현실분석 방법을 수용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강원돈의 '물(物)의 신학'이었으며, 소위 제2세대 민중신학이었다.

조직적 사상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던 기독청년학생운동 활동가들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응답하여 등장한 제2세대 민중신학은 우선 기독교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다시 묻는 시도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과제는 아니었다. 이미 민중신학 1세대의 시도를 더욱 철저화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그와 같은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은, 박성준이 제기한 "두 개의 기독교"론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지배자의 종교가 아니라 민중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재설정하려는 시도였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그와 같은 문제제기는, 이전의 역사적 기독교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고, 친미 반공주의의 포로가 된 현실의 지배적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더욱 철저하게 수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그간의 기독교 신학이 근거로 삼아 왔던 형이상학에 대해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였다. '물의 신학'은 그 소산이었다.

'물의 신학'은 민중주체의 변혁운동이 전개되고 그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에서 기독교 신학의 한 대안이었다. 그것은, 전체 민중운동의 일부분으로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운동이 민중운동의 사상적 통일에 이바지하고,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신학적 내용의 형식을 확립해야 하는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 신학은, "정치경제학적 현실분석과 신학적 성찰의 결합을 방법론적 기축으로 삼은 해석학의 일반이론"으로서 자기 성격을 분명히 했다. '물의 신학'은 이전의 민중신학이 사회현실의 분석과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구로서 맑스주의 유물론을 수용한 데서 한 발자국 더 전진하였다. 역시 맑스의 종교비판이후의 기독교 신학을 건설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맑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응답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 신학과 맑스의 유물론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는데, '물의 신학'이 전제하는 유물론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첫째는 맑스주의에서는 세계관과 방법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통일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물의 신학'은, 맑스주의적 현실분석과 세계관을 일단 구분해놓고 현실분석 방법론만 채용하는 남미 해방신학의 맑스주의 수용모델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둘째는, '물의 신학'이 전제하는 유물론은 '유물론적 존재론'과 구별되는 '실천적 유물론'이라는 점이다. '유물론적 존재론'과 '실천적 유물론'의 구획선은 의식과 존재의 매개ㆍ통합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과 방식의 차이에 있다. 맑스가 표방한 '실천적 유물론'은, 인간과 대상의 세계를 결합시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감성적이고 물질적인 활동으로서 노동이라고 본다. 맑스에게서는 노동과 무관하게 사물의 본질이나 실체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유물론적 존재론'은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대상들, 곧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존재론적 형식을 제시하려 했다고 본다. 엥겔스로부터 시작하여 플레하노프, 레닌을 거쳐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정식화된 이 경향은 교조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골간이 되고, 결국에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지배 엘리트에 의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본다. '물의 신학'은 그와 같은 두 경향이 나름대로 독특한 정치투쟁과 사상투쟁의 맥락에서 형성되었음을 주목하며, 그 정식들을 실천의 자리에서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본다.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문제삼는 실천의 자리에서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물의 신학'은 당대의 운동 현실에서 다급하게 수용된 맑스주의의 한 경향을 매우 주의 깊게 성찰하면서, 맑스주의의 원자리를 회복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이 이해된 맑스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종합이었다. 기존의 형이상학에 입각한 기독교 신학은 의당 존재론, 곧 신 존재증명을 필수적인 것으로 전제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기독교의 정체성의 모색은 기존의 신학적 전제를 파기한다는 것을 이미 1세대 민중신학에서도 분명히 한 바였다. 실천적 유물론을 전제하는 물의 신학은 그에 걸맞게 실천적인 신 인식론 또는 신앙론을 필요로 한다. '물의 신학'은 유물론적 세계관과 기독교 신앙의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적 신앙 내용의 핵으로 "하느님이 육신(Sarx)이 되었다"는 '성육신론'(成肉身論)을 지목한다. 성육신론은 예수운동을 함축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그때 그때의 사회에서 물질적 관계들 안에서 또한 물질적 관계들을 매개하여 전개된 하느님의 운동을 총괄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원점이며, 또한 창조론을 재해석할 수 있게 하고 하느님 나라 대망으로 압축되는 종말론의 새로운 해석을 이룩하게 하는 관점이라고 본 것이다. 기독교의 성육신론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 살았던 예수를 통해 신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신의 섭리, 곧 역사의 진실을 깨닫는 신앙의 이해방식이다. 고립된 개별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서 민중과 함께 했던 그의 삶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예수운동'이라 명명한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민중이라는 집단적 인격의 대표로 본다. 그러므로 예수운동은 곧 민중운동이다. 성육신론은 예수운동 곧 민중운동을 통해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실천적인 신 인식론인 것이다.

이 점에서 '물의 신학'으로 대표되는 제2세대 민중신학은 제1세대 민중신학의 핵심을 당대의 상황에서 더욱 철저화하였다. 예수와 민중을 동일시하고, 신학의 하부구조를 말했던 민중신학의 핵심은 실천적 유물론과의 결합을 통해 물의 신학으로 재현되었고, 그것은 1980년대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운동의 주체들에게 분명한 하나의 신학적 대안으로 몫을 감당하였다.


3. 해방 담론으로서의 민중신학과 맑스주의


아마도 민중신학이 맑스주의를 필요로 했던 그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의의는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민중운동의 지형이 달라짐과 함께 민중신학과 맑스주의와의 접합관계 또한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운동의 현실과 직결된 작업이었기에 그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민중운동 진영에 상당한 사상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어쩌면 1980년대에는 거의 '유일한' 맑스주의를 상정해 왔는데, 현실 사회주의와 붕괴와 더불어 맑스주의 자체의 유의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 내지는 붕괴가 곧바로 '맑스주의의 위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위기는 다양한 맑스주의의 분화를 예기할 뿐이었다. 그간 단일한 체계로만 여겨졌던 맑스주의는 이제 매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맑스주의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는 이미 다양한 해석의 경향이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한국의 현실에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 현상이 이제 비로소 한국 사회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백가쟁명의 시대라 할만큼 199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맑스주의 조류들이 이입되어 그 현실적인 유의성을 실험 받고 있다.

민중운동 진영의 사상적 혼란과 그에 이은 다양한 맑스주의 조류의 대두는 비단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동시에 민중운동 자체의 전화과정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개화와 함께, 민중운동의 다양한 분화 현상이 함께 나타났다. 1980년대 초반 민중운동의 분화 발전 양상이 단일한 대오로 수렴되는 경향을 띤 반면 1980년대 후반 민중운동의 분화는 일종의 발산 양상을 띠었다. 그것은 크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균열양상으로 나타났고, 이전의 계급적 민중운동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다양한 소수자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다양한 맑스주의의 대두,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사회이론의 등장은 그와 같은 양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민중신학이 민중운동의 현실에서 출발한 만큼, 그와 같은 양상은 민중신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그 나름대로 맑스주의를 수용하는 고유한 논리가 있는 만큼 다양한 맑스주의 논의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일정 부분 과연 어떤 맑스주의인가를 따지는 논란이 신학 안에서도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우선 신학이 사회과학을 수용하는 데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따지는 논의부터 제기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민중신학 역시 하나의 민중신학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반신학' 또는 '탈신학'의 계보와는 달리 민중신학을 다시 신학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났다. 민중신학을 민중운동의 신학으로서보다는 기독교의 신학 또는 교회의 신학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그러한 시도는 당연히 전통적 신학의 개념과 체계를 손상시키려 하지 않고 그에 맞춰 민중신학의 의의를 재해석하려 한다. 그 시도는 민중신학이 맑스주의 또는 사회과학을 수용하려는 시도 자체를 위험시한다. 신학의 고유성이 침해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민중신학의 핵을 제거해 사실상 무장해제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신학적 인식의 고유성에 관한 문제를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애초 '반신학', '탈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의 고유성에 주목하는 입장은 오늘 현실에서 그 의미를 더욱 철저하게 묻는다. 이른바 민중신학 세대론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이 입장은 오늘 제3세대 민중신학을 형성시키면서 여전히 민중해방의 담론으로서 민중신학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이미 민중신학이 발전시켜온 맑스주의 또는 사회과학과의 만남의 전통을 폐기하지 않는다. 어떤 맑스주의냐, 어떤 사회과학이냐를 따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의 민중신학과 구별되는 제3세대 민중신학은, 오늘 민중운동의 다양화 현상과 맑스주의의 다양화 현상을 그 신학 자체 안에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제3세대 민중신학 안에서 '정치경제학적' 인식과 '문화정치학적' 인식의 타당성을 묻는 물음은 운동과 이론 지형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그와 같은 논의는 민중운동 자체의 전개과정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이 맑스주의의 유의성을 인정했던 맥락은 해방의 담론으로서의 그 몫 때문이다. 신학은 맑스주의적 인식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기존의 도그마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고, 나아가 민중의 해방에 기여하고자 했다. 오늘 다시 새삼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신학의 고유성 문제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과연 신학적 인식이 어떤 의미에서 해방적일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일단 형식논리적으로 보면 신학은 언제나 신에 관한 물음을 기본 전제로 한다. 어떤 면에서 민중신학은 그 신에 관한 물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였다. '존재자'로서보다는 운동 속에서의 '존재방식'을 물은 것이다. 그 어떤 개념과 논리로도 사실상 확증하기 어려운 대상을 무모하게 규정하려 하기보다는, 신에 관한 언명이 필요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당대의 인식으로 따진 것이다. 당대의 인식을 따른다는 의미는 또 다른 상황에서 그 인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물음으로 신에 관한 물음을 폐기하지 않는 것은 그 차원을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신학적 인식의 독특성 때문이다.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영역은 '궁극적 가능성'의 차원이다. '궁극적 존재'라기보다는 '궁극적 가능성'이다. 그것이 '초월'의 지평이다. 궁극적 가능성으로서의 초월은 언제나 현재 상태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파기하도록 한다. 진정한 혁명의 가능성이다. 바로 그 궁극적 가능성 앞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신학적 인식의 고유성이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신학적 인식은 끊임없는 해방을 추구한다. 만일, 변혁을 위한 현실 분석과 판단을 과제로 삼는 사회과학이 신학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면,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일 것이다. 도그마에 대한 한 맹신으로서 신학적 인식이 아니라, 궁극적 가능성 앞에 자기를 열어두는 의미에서의 신학적 인식이다. 맑스주의가 사실상 국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와 같은 의미의 신학적 인식이 사회과학 또는 맑스주의에도 분명히 유의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맑스주의가 그와 같이 개방적일 때 서로가 진정한 해방의 담론으로서 역사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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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