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살림교회에 다니는 이유와 살림교회에 오게된 이야기 - 요한복음 6:9~14[박수환 교우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8-04-15 19:41
조회
10408
2018년 4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살림교회에 다니는 이유와 살림교회에 오게된 이야기
본문: 요한복음 6:9~14
박수환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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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아주 유명한 오병이어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용, 남용되는 내용과 실제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차이를 살펴보면 좋겠지만 그것은 목사님에게 넘겨드리고 오늘 저는 우리 살림교회에 나오는 이유와 제가 살림교회에 오게 된 이야기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살림교회 나오는 이유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재미있다’입니다. 저는 재미없는 것을 싫어합니다. 언어유희든 몸 개그든 삶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즐겁게, 유쾌하게 하자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우리 살림교회는 너무 재미있습니다. 먼저 목사님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유머러스한 것 같진 않지만 평소에는 매우 유머러스한 분으로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오래되었다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 또한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모두 유머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계신 것 같아서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살림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적 불균형이 해소되면서 생긴다’입니다.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성경적 해석에 대한 지적인 불균형, 즉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목사님의 설교나 교우 분들의 삶의 경험과 나눔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읽은 오병이어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어떻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다 먹을 수 있었을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한 줄로 서서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한 마리씩 배급을 하는데.. 도시락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 막 생겨나는건가? 눈 깜짝하는 순간에 보리떡이 막 자라난건가? 매우 다양한 상상을 해보았지만 상상일뿐이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믿어야 하는 저의 어린 시절 신앙의 상황에서는 한낱 없어져야할 의심과 부족한 믿음일 뿐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는 달라졌습니다. 오병이어는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들을 나누고 살아간다면 많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실 수 있게 된다라는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축제를 매년 부활절, 성탄절 등 다양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경험하고 참여하면서 저의 지적불균형을 해소되었습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라는 새로운 지적불균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적불균형이 저를 살림교회에 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살림교회에서 지향하는 바가 마음에 듭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향하는 방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공동체, 선교하는 교회, 다른 교회들과 더불어 힘을 모으는 교회,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지역사회에 필요한 교회, 민주적인 교회, 친밀한 공동체, 희망이 있는 교회, 제가 생각하기에 모든 교회가 우리 교회가 가지는 지향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는 궁금합니다. 살림교회 또한 이런 물음에 자신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완벽한 신앙,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습대로 살아야한다. 죽으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몸과 마음 자라면서 하나님의 말씀, 뜻이 이렇게 지엽적이지만은 않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완벽한 믿음, 신앙은 한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성찰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믿음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재미있으면서도, 지적불균형을 해소하며 유발하는, 교회라면 마땅히 나아가야할 방향대로 나아가는 살림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살림교회에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앞서서 제가 말씀드린 살림교회를 다니는 이유보다도 더 궁금해하실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먼저 이런 자리를 허락해주신 교우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을 준비하면서도 얼마나 울컥하였는지 모릅니다. 사실 결혼하기 전까지 눈물이 없는 사람이였는데 아내를 만나고 살림교회를 다니면서 잃어버린 눈물을 찾은 것 같아서 너무 기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위로하고 희망을 가지게 하는 뜻깊은 시간이였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기억력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차량에 블랙박스 대부분 달아놓으셨죠? 블랙박스에 영상이 저장되는데 용량이 보통 4기가 8기가 정도 됩니다. 촬영된 영상이 점차 쌓이다가 용량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처음에 저장된 영상이 지워지고 새로운 영상이 저장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도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저는 그 용량이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우리 아내를 기준으로 우리 아내가 한 8기가 정도 된다고 하면 저는 1기가가 될까말까한 것 같습니다.
블랙박스에 영상이 저장될 때 일상적인 경우 노멀이라고 저장됩니다. 그런데 사고가 나서 충격이 감지되거나 움직임 감지되거나, 또는 특정한 상황에서 버튼을 누르게 되면 이벤트로 저장이 됩니다. 사람들의 기억도 특별한 일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장기기억으로 기억되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이벤트에 대한 기록 또한 우리 아내를 기준으로 한다면 저는 한 10분 1정도의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옛날 사진을 보는데 같이 찍혀있는 사람과 다른 기억을 가졌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저에게는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좋지만(나쁜일을 빨리 지울 수 있다는 것) 또 매우 슬픈일이기도 합니다.(좋은 기억을 하지 못하니까)
저는 이런 상황이 학습되어져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사건을 연속하여 경험하다보니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냥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견뎌온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살아온, 겪어온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1986년에 경기도 양평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1986년에 조금은 특이하게도 시골 집에서 우리 할머니께서 직접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누나는 병원에서 태어났으나 저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주변에 모든 친구들을 통틀어 집에서 난 사람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산파가 늦게 와서는 기껏해야 탯줄을 잘라주는 일만 하고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만큼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경기도 여주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86년생 치고는 이전세대에서 경험했던 귀한 일들을 경험하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가려면 30분 이상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아침 일을 나가시는 경운기 뒤에 몰래 따라붙어 올라타서 가다가 걸려 동네 어르신에게 혼이 난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나무 난로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상주하시는 분께서 나무를 해주시면 아침에 당번이 나무를 가져가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에게 학교는 재미있는 놀이터였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한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글씨를 못 써서.. 매일 깜지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가방에는 늘 우유팩딱지, 넓적한 돌, 공기, 팽이 등등 놀이감 만이 가득했었습니다. 학교가 끝난 뒤에도 저의 놀이는 쉬지 않았습니다. 여름이면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즐기는 물놀이, 메뚜기 잡으러 다니고 배고프면 수박, 무서리도 해먹고, 겨울이면 비료포대에 눈썰매타고, 겨울 산에서 올가미를 놓아 고라니를 잡아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넘기고 우리는 맛있는 과자를 얻어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정말 천국과 같은 삶이 아니였는가 싶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시절에 대한 저의 감정은 행복함과 편안함뿐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된 해에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3세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누나, 저.. 그런데 그해 여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옆동네로 재혼하여 이사하셨고, 아버지는 괴로움을 못 이기시고 며칠 뒤 주일날 제가 교회를 간 틈에 산에 올라 어머님이 떠나신 곳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끝내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네 대다수의 아버지들이 그러하셨듯이 우리 아버지도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도자기 만드는 고된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저녁 6시까지 들어오지 않으시면 그날은 온 집안이 비상이 됩니다. 결과는 뭐.. 다들 예상하시는 그런 상황입니다. 맞지 않기 위해 보일러실에 숨거나, 옆에 권사님 댁으로 대피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이 정도이니 우리 어머니와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매우 풍족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벌초를 하려고 할머니를 모시고 산소를 찾아다닐 때 하시던 말씀이.. ‘이 산이 우리 거였고, 저 산도 우리 거였고, 저것도, 저것도...’ 여주, 양평에 웬만한 산은 거의 우리 거였다고.. 아버지가 어릴 적에는 집에 일봐주시던 분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매우 풍족한 삶을 사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도 술을 좋아하셨고 주변의 친척들은 큰 돈이 필요할 때마다 할아버지의 재산을 조금씩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서히 가세가 기울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그 당시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입장도 매우 아주.. 매우 안타깝습니다. 물론 이제야 이해하는 것이지만요.. 나중에.. 제가 결혼할 즈음..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야하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나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86년생입니다. 어머니는 66년생이였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2살 많은 누나가 있습니다. 즉 어머니는 매우 어린 나이에 누나와 저는 낳으셨고 시부모님도 모시고 알콜에 중독되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같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어머니의 고향은 제주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 시골에 살던 촌놈이 그래도 비행기타 본 경험이 있는 것은 어머니의 고향이 제주도였기 때문이였는데 힘든 시집살이에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저에게 제주도는 가슴 아픈 섬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을 뒤로하고 할머니와 저, 그리고 누나는 삼촌의 손에 이끌리어 성남으로 이사하게 됩니다. 당시 삼촌은 화학공장에 노동자로서 꽤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빠듯하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촌이 집에서 쉬는 날 뉴스에서 성남의 한 공장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이 방영되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는지.. 바로 삼촌네 공장이였습니다. IMF시절, 방화를 빌미로 공장을 폐쇄하였던 것입니다. 사장이 일부러 불을 냈다고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실업자가 된 삼촌은 그 뒤로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지만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난은 찾아왔습니다.
성남으로 이사 후에 저랑 누나는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각각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시골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왕따가 유행이였으므로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온 촌놈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인 저는 크게 개의치 않으며 학교를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가 10월이라서 어차피 졸업하면 못 볼 친구들이였기에 큰 걱정이 없었습니다. 반면 중학교 2학년인 누나는 학교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 매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한 중학생이 가정이 와해되는 사건을 겪는 중에 바뀐 환경에 대처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당시 누나를 도와줄 수 있는 자원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부도 꽤 잘했던 누나는 그렇게 부적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교 진학에 있어서도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삼촌은 한명밖에 가르칠 형편이 안된다며 누나의 상고진학을 권유하였고, 누나는 성남에서 아주아주 유명한 상고에 입학하였습니다. 지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만 들어도 성남사람들은 모두 알 정도로 꼴통학교로 낙인찍혀져있는 곳이였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삼촌과 누나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은 누나가 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에 삼촌도 더 이상 같이 생활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자리를 찾아서 이곳 저곳을 헤매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2주일에 한번 비정기적으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더 가난해지고 더 가난해졌습니다. 다행이 아주 다행스럽게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선정되어서 정부에서 나오는 쌀과 반찬을 받아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학비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사정이 좋지 않았나하면 고3 마지막 학기는 삼촌이 학비를 가져가서 졸업을 못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학기는 제가 야간 아르바이트를 보름정도해서 그 학비를 내고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겪으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가는 것. 그저 사는 것, 숨 쉬는 것. 그래서인지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녔습니다.
당시에 교회가 우리 집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은 제일 친한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주 맹목적으로 그 당시 하나님을 의심할 여유도 없었고 의심해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군인 출신의 목사님은 순종과 복종에 대한 말씀을 매우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믿음에 대해서도.. 심지어 목사님 댁 개 이름도 순종이 복종이였으니까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칠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나보다 더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요셉은 형들이 팔아서 팔려가고, 욥은 자식 다 죽고, 아내도 떠나고 고통당하고, 당하는 건 기본이고 예수님 따르려면 부모랑 전 재산 버려야하고 저는 엄청 괴로우나 성경 속에 인물들에게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이였습니다. 그 당시 성경이 어쩜 그렇게 요리조리 저를 괴롭혔을까요. 사실 그 당시에도 의문은 있고 잘 믿어지지도 이해되지도 않았던 사건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믿음이라는 말로 일명 ‘퉁’ 쳐버렸습니다. 그 이상 넘어가면 의심이라는 죄가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결국은 하나님 잘 믿고 잘 버티고 잘 사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토요일 학생부예배, 주일 대예배.. 예배.. 그리고 기도..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 수환이는 존귀한 특별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아주 전형적인 기복신앙이 저에게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신앙, 믿음이라는 것이 아주 개인적인 일로 축소되고 하나님에 대해 매우 지엽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교회 밖으로 나가게 되면 죄의 어마어마한 유혹들, 그 당시에는 왠만한 건 다 죄였습니다. 주일날 안나오는 것, 욕하는 것, 친구를 안 도와준 것,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학창시절의 상황들과 교회에서 맞닥뜨린 신앙과 믿음이 제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매우 축소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이 몸과 마음이 자람과 동시에 환경이 바뀜에 따라 점차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대학을 진학하면서 생활지를 성남에서 천안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기독교 동아리에, 신앙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입대와 호주 워킹홀리데이, 독립 등을 거쳐서 기존에 살던 환경과 교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현실, 상식선에서의 의문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떠나니까 그때서야 하나님에 대해, 나의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하나님을 떠나니까 너무 자유로웠습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신앙의 여운으로 약간의 죄책감은 남아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비종교인이였기 때문에 실컷 욕도 하고, 술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이라면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천주교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기 위해 성당에 가서 뭐.. 서약인가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했습니다. 중학교고등학교시절에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교육받았던 사람이 천주교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같은 것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고민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평생 살아온 경험과 환경은 한 번에 뒤집어버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대학 새내기시절 예수전도단이라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고민을 나누었던 선배가 한신대학원으로 진학하면서 저에게 여러 가지 책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책의 저자는 존 도미닉 크로산이였습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한 기분이였습니다. 물론 지금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그 느낌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오직 성경 문자에만 근거하여 믿어왔던 믿음에 균열을 주고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다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믿음과 신앙에 대한 반전은 매우 슬프기도 하며 화나는 일이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였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상황에서 나만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주 운이 좋게도 우리 집 앞에 살림교회가 있었고, 오랜 고민 끝에 정말 그냥 한번 나가보자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살림교회를 다니면서 앞서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경험했던 것이 처음에는 매우 무의미하고 가치없다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것들을 통하여 현재의 내가 존재하고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또한 살림교회에서 배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신앙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배워가며 만들어가는 그 과정 자체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두서 없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학창시절 갑자기 가정에 와해되는 과정을 겪으면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기억을 지워버리는 상처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종교로 기독교에 나를 가두고 성장하지 못 했었습니다. 아니 그 당시 상황이 저에게 너무 크게 느껴져서 성장대신에 버티는 전략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제가 어느 덧 직장도 얻고 두 아이의 아빠로 한 사람의 남편으로 교회의 한 부분으로 잘 버텨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버티는 삶에서 한 단계 도약하여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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