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리로부터 탈출, “내”가 되다![황의명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8-07-28 10:39
조회
12741
2018년 7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리로부터 탈출, “내”가 되다!
본문: 마가복음 3:1~6
황의명 목사(충남청소년쉼터 보호상담사)



도입

포장마차에서 청년과 패거리들의 싸움..(유머)

요즘 자주 쓰는 말이 바로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너도 나도 좋은 공동체를 세워 건강하게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꿉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많은 공동체들이 그 시작은 좋은 목적에서 하지만 때때로 점차적으로 집단의 이기주의에 빠져들고, 지도자들의 타락과 탐욕으로 와해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닌 패거리의식으로 변질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꾸미고 멋진 철학을 가져다 붙여도 패거리의식으로 변질된 공동체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저 패거리에 불과해집니다.

슬픈 것은 가끔 교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패거리의식은 골목을 두고 패권을 다투는 깡패조직들의 아귀다툼처럼 공존과 나눔이 아닌 경쟁과 권력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때로는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똘똘 뭉쳐서 굳건한 결속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패거리들이 자주 하는 말은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과 힘의 강화를 위해서는 이성이나 합리성은 무시한채 억지와 고집으로 때로는 진흙탕 싸움도 불사합니다. 구성원들에게 열정적인 참여를 독려하면서 말합니다. “오직 팔은 안으로 굽는다.”
자신들의 조직의 생사를 위해서는 때로는 더 큰 공동체의 파괴도 일삼습니다. “소위 나라가 망해도 우리가 정권만 잡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패거리 안에는 항상 패거리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전통과 규율이 존재합니다.
자신과 패거리의 운명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이 전통과 규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어긋날 때에는 가차 없이 처단해버립니다.
그 규율이라는 것이 계급적 요소와 결합해서 폭력적으로 작용하고, 명령과 복종이 있을지언정 대화와 협의는 없습니다.



또한 패거리는 강해지기위해 체질개선에 힘씁니다.
패거리의 강화를 위해 연약하고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성원은 바로 내치거나 괴롭혀서 스스로 도태되게 만듭니다.
나치주의 시절의 독일에서는 종족 우생학이라는 유전학이 유행했습니다.
그것은 보다 유능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적장애를 가지거나 무능한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유능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유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적으로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따로 가두거나 살해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패거리 문화는 상처로부터 옵니다. 약했던 과거를 안고 있습니다.
독일의 나치주의는 히틀러의 어린시절 유대인에게 당한 가족의 상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먼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의 기억과 수많은 포로시기.. 그리고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처들 속에서 강력한 민족주의로 뭉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작용을 낳아서 율법주의가 되어버리고, 율법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모두 처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율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은 안식일에 행해집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날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절대 일을 해서 안되도록 규정하고 그 세세한 39개의 조항을 정해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불을 피우는 것, 그릇을 옮기는 것, 물을 깃는 것, 800m정도 이상의 길을 걷는 것, 하나의 매듭을 매거나 푸는 것, 음식을 장만하는 것, 두 글자를 쓰는 것, 두 글자를 지우는 것, 타작하고 키질을 하는 것, 가루를 빻고, 체질하고, 반죽하고, 빵을 굽는 것 등등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사건은 어떻습니까?
안식일 법에 의하면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만, 사람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생명이 위독한 경우가 아니었으므로, 안식일이 아닌 날 치유하실 수 있음에도, 굳이 예수는 안식일 법을 어기고 이 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행한 이적 중에 하나가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안식일법에 얽매어 평화와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여전히 자신들의 패거리의 힘의 논리로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현재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이 기적을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있는 한 가난한 사람들, 서민들이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그 제도를 어기신 것입니다.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절-2절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는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아마도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서자 한 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노려봅니다. 고쳐주나 안 고쳐주나 주목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 이겠죠?
하나는 미리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그 사람을 데려다 놓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들어오시면서 구석자리에 있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알 만큼 뚫어지게 보셨거나일 것입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요..

아마도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도 몇 번 예수님은 안식일날 회당에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해법은 정면 돌파였습니다.
그냥 구석에서 고쳐주시면 될 것을, 아님 끝나고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그를 불러서 몰래 고쳐줘도 되었을텐데...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일으켜 세워서 가운데로 부릅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잘 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보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네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안식일의 주인공은 사람, 바로 우리들입니다.
애굽에 노예를 있을 당시 쉴새 없이 노역에 시달리며 강제노역 속에서 고생하고 삶의 의미를 잊으며 때때로 생명까지도 위협받았던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으로 보며 하나님은 다시금 안식일의 쉼을 강력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은 2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2:2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그를 가운데 세워놓고 주위 사람들(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뭐가 옳은지 논쟁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여기 있는 사람을 봐라.”,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좀 봐라.”라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순간 안식일의 주인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막3:4).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보입니다.
아직도 그들의 관심은 ‘그 사람’에게 있지 않고,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막3:5) 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학원 시절 한 교수님께서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매주일 한 노숙자 같으신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냄새가 너무 심해서 교수님이 속으로 하는 기도는 늘 “제발 오늘 그 사람이 내 옆에 앉지 않게 해주세요.”였답니다.
교수님과 몇몇 교인들의 매 주일 예배시간의 관심은 그 사람이 오늘 어디 앉을까였다고 합니다.
정작 그 분이 누구고 어떻게 교회에 오게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체 말입니다.

교수님은 그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오늘 수업을 준비하면서 그 일을 생각해봤다.
예배는 나만의 예배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한 예배이기도 한데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왔고,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한 번도 안하고 내가 예배드리는데 방해 안되게 내 옆에만 안앉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신 것을 회개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해가 되는 교인을 우리는 안 왔으면 합니다.
사실 제 마음에도 가끔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일을 제정하시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여건을 바로 우리교회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은 과연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가운데로 당당하게 나와 본 적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동안 그 누구도 그 사람에게 가운데로 나오라고 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불편하고 싫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이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안식일 법은 이 작은 자 한사람이 치유 받는 것 보다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하나님 뜻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을 봐라.”,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좀 봐라.”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개인은 중요합니다. 구체적이며 특정한 개인, 심지어 그 개인의 작은 부분들까지도 소중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 얼마나 위로를 주는 소식입니까?
우리 각자 한사람, 한사람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들로서 사랑받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로 그 특별한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은 법적 고발이나 죽일 모의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가운데 나오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경쟁을 통해서 남을 짓밟고, 업신여기고, 모함해서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그건 가운데가 아닙니다.
진짜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독특한 소질과 재능을 개발해서 참된 “나”를 완전히 꽃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능력(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중심으로 나오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기꺼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수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우리를 전적으로 수용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된 “나”를 활짝 꽃피울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자기 능력을 펼치며 사는 것은 남에게 주는 삶을 사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사람이 손을 펼 수 있게 된 것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능력을 발휘하며 사는 것)이고, 그것은 곧 남에게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르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기적은 회복입니다. 원래의 참된 “나”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하셨는데, 내미는 것은 내가 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불신 때문에, 혹은 수치심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체면 때문에 내밀지 못하니까 회복이 안 됩니다.
그 수치심만 이겨내고 내밀면 그것이 회복이 되는데,
그 두려움만 이겨내고 내밀면 그것이 회복되는데,
그 불신만 넘어서면 그것이 회복되는데,
과거의 상처,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 그것만 내놓으면 회복이 되는데 그것을 감추고(방어) 사느라 그것이 나의 창조적 에너지들을 삼켜 먹어버립니다.

또한 껍데기 율법의 세계에 머무르면 자꾸 에너지가 소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고 탄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마치 건강한 척 하면서, 병든 사람 하나를 예수가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회당의 진짜 병자는 마음이 굳어진 그 사람들입니다.
단단해진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습니다.
마음은 이 세상을 다 담을 수 있는가 하면, 동시에 바늘 하나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선함을 보면서 동시에 거기에 비춰진(마치 거울을 보듯이) 자신들의 악함, 추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격노하고, 결국 예수님을(선함 자체) 없앨 모의를 하기에 이릅니다.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창조성, 선함, 의미로 가득했던 그의 삶을 시기했던 사람들은 결국 예수를 죽이게 되지만, 그 선함은 없어지지 않고 더 큰 빛을 바라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내밀어서 참된 “나”를 발견하고 치유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추함과 죄악을 숨기고자 무리뒤에 숨어서 예수님을 부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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