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삶의 무게, 말의 무게 - 예레미야 1:4~10[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8-09 14:20
조회
31408
2020년 8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의 무게, 말의 무게
본문: 예레미야 1:4~10



구약성서의 대예언자 세 사람, 곧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모두가 비범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예언자를 꼽는다면 아마도 예레미야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몸소 가장 극적인 고난의 삶을 살았고 그 메시지 또한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외친 선포 이전에 고난의 삶 자체가 이미 무거운 메시지라고 할 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아마도 유다왕국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랑기, 혼미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자 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는 예언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상황을 전하는 본문입니다. 예언자의 소명기사입니다. 모든 예언서들에는 그 첫머리에 소명기사가 나옵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예언자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줍니다. 정치 지도자로서 왕이나 종교 지도자로서 제사장이 세습으로 그 역할을 이어받는 것과는 달리 예언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름으로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예언자들은 전적으로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그 출신이 다양합니다. 귀족, 제사장, 농부, 목자 등 다양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지배계층에서 배제된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을 전하는 본문말씀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는 장면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태어나기도 전에” 예언자로 세웠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예언자로서의 운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깊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황을 헤아려 보자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어떤 조건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첫머리는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출신인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운명적 조건을 말합니다. 아나돗은 솔로몬 왕 때 파면당한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당한 곳입니다. 솔로몬 왕은 훗날 사두개파의 조상으로 알려진 사독을 아비아달 대신 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돗은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한 곳입니다. 그 아비아달 제사장의 후손으로서 예레미야는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자신의 가문과 그 땅의 기풍을 체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예언은 항상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예언자 자신의 경험과 인격을 매개로 하고 있습니다. 아나돗의 몰락한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서 조상들이 처했던 그 상황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자로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깊다는 것을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언자 자신이 자각하기 이전의 역사적 유산이 그 자신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자신의 삶이 있기까지 역사의 무게, 그 역사의 무게감을 받아들인 삶의 무게를 함축합니다. 지금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 예레미야는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 앞에서 부름을 받고 있으며, 그 역사의 무게를 스스로의 삶으로 감당할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두 번째 대목입니다.
언뜻 보기에 의외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의 태도에 예언자의 전형적 특성이 드러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의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어땠습니까?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말이 어눌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말 잘하는 그의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제시해주니 더 이상 발뺌하지 못하고 모세는 마침내 그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말도 못하고 어리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어리석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생애를 정확하게 연대기로 구성할 수는 없지만, 대략 주전 645년경 태어나 예언자로 부름받은 때가 주전 대략 627년경이라 추정한다면, 그야말로 약관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어리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기에 아직 경륜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볼 것 같으면 아직 어리석다는 것으로 새겨도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참 이상한 장면입니다.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라 대변인을 뜻합니다. 대변인이라면 당연히 말 잘하는 사람이 맡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말을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상황은 확실히 의외의 사태입니다. 모세에게서, 그리고 예레미야에게서 나타난 이 현상은 사실 예수님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예상하고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일관된 태도에서 중요한 진실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며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하고 있는 진정한 위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입니다. 지금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마치 발뺌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감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고 돌아보는 데서 비롯된 태도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역사적 무게감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정말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며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겠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당신의 말을 예언자의 입에 맡기고 계십니다. 어떻든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변해서 선포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아예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을 예언자의 입에 넣어 준다는 표현은, 이 예언자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온갖 말재주로 현란한 말들을 꾸미고 선포하는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태도를 말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예언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말의 위력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주는 말씀입니다. 말의 힘은 그 현란함에 있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일깨주는 말씀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을 통해 진실과 오류를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달변이라 해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눌변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말은 말 그 자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더불어, 그 진실을 체득한 삶과 인격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온갖 기인행각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표했습니다. 어눌한 말솜씨를 기인행각으로 보완한 것은 아닙니다. 삶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눌하다고 고백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말씀들을 선포했습니다. 때로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절규하기도 했지만, 정말 사람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새 언약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이 예언자의 소명체험이 도대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늘 마음속으로 새기지만, 설교의 가장 첫 번째 청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청중들에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말씀은 설교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공적으로 발언을 해야만 하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준비하지 않고 평소 생각대로 말씀해주셔도 된다’고 하지만, 그럴 때에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 말해야 하는 처지에서, 오늘 말씀의 무게가 새삼 다가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말씀은, 수없이 현란한 말들과 가식적인 태도로 자신을 드러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오늘의 삶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비수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일상의 삶에서의 소통방식이 그렇거니와,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여러 매체를 통한 소통의 방식이 저마다의 내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실이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주장만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오죽하면 ‘팩트체크’가 진실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을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깊은 생각 끝에 이른 견해로,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다시 환기하고 싶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머리에서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말,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입술로 나오는 말,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아 온 몸으로 표현되는 말,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고도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없는 말,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머리에서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말은 자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에 가장 선명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꼭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상처를 입히는 말은 이런 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머리에서 가슴을 통해 입술로 표현되는 말은 성찰을 동반한 말로써 성찰을 동반한 만큼 상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때로 모호할 수도 있고 어눌할 수도 있지만, 상대에게는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말입니다.
셋째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통해 온 몸으로 표현되는 말은 세 치 혀끝과 짧은 입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정한 말일 것입니다. 행동으로서의 말, 삶으로서의 말입니다. 이 말은 때때로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진정한 말입니다.
넷째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고도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르는 말은 일종의 신비의 차원입니다. 나도 모르고 사실은 내 앞의 상대에게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어딘가에 뿌려지는 말입니다. 이 자연이 알고, 하나님이 안다고 하면 될까요?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은 끝끝내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영향을 끼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 영향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는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말이며, 내 삶의 흔적입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 3~4).
마치 이와 같다고 할까요? 대음희성(大音希聲)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통합니다. 그게 도(道)라는 경지 아닙니까?(노자, 41) 그 경지는 신비의 차원이니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삶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과 진실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임했던 예언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 서로 진실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 사이에서의 진실한 태도를 일깨워줍니다.
끊임없이 진실을 외면해야만 잘 살 수 있는 삶의 현실이기에,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삶이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면 그 길에서 도망가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래도 진실한 삶을 살겠다고, 그 진실 앞에 자신을 내 맡기겠다고, 내 삶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고 다시금 다짐하도록, 오늘 말씀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말씀의 뜻을 마음 깊이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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