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8/23 온라인 공동예배] 교회 스스로의 허물을 돌아볼 때 - 누가복음 18: 9~14 [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8-22 19:54
조회
37401
[8/23] 성령강림 후 열둘째 주일, 온라인 비대면 주일 공동예배

시작 오전 11:00 / 인도 담임목사 / 촬영․영상편집 최시내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하나님,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배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게 하여 주시며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서로 교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시간 그리스도인 됨과 교회 됨의 의미를
깊이 새기게 하여 주십시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이 땅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진실로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은
타인을 정죄하는 데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데서
구현되는 진실을 새기게 하여 주시고,
그 믿음으로 희망을 바라보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나 주의 도움 받고자”(새찬송 214 / 통일찬송 349)/ 다같이


묵상과 성찰/ “내 평생에 가는 길”(Bliss)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김광식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누가복음 18:9~14 / 인도자


말씀나누기/ 교회 스스로의 허물을 돌아볼 때 / 최형묵 목사


2020년 8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교회 스스로의 허물을 돌아볼 때
본문: 누가복음 18: 9~14

오늘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또 다시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0주간의 비대면 예배 후 재개된 16주간의 대면 예배 이후 다시 비대면 예배로 전환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추세가 수도권에서 심각해지고 있고 우리 천안지역 또한 심상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만 해도 수도권과는 달리 천안지역은 비대면 예배가 행정명령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고 권고된 상황이었지만, 다음 날 21일 금지 조처가 취해졌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중하고 전 사회적인 위기에 대한 대응에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정말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광훈만 미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 전반의 공공의식과 보편적 가치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 교회의 현실을 보면 정말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전광훈과는 다르다고 선만 그으면 될 일이 아니라 그와 같은 괴물을 탄생시킨 교회의 밑바탕,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와 다르지 않은 교회의 밑바탕을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그 성찰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과오의 가능성을 일깨워 줌과 동시에 그 과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를 대비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당당하게 서서 자기가 행한 행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기도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돈을 밝히고,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저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기도 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 가운데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자기 집으로 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단순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바리새파 사람은 잘난 체 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했고 세리는 전적으로 겸손했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두 사람이 처한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처신과 믿음으로 보자면 거짓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은 그 자신에게는 사실일 뿐 아니라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을 떠올리면 그저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떠올리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윤리적으로 모범적이었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 앞에서도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 또한 진실합니다. 세리는 당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 받았고 따라서 상종 못할 사람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세리가 고백한 대로 별로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라면 경제적으로는 넉넉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하급 세리의 경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엄밀히 말해 국가 관리라기보다는 일종의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유력자가 입찰에 응하는 방식으로 징세권을 얻어내면 하수인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정액을 상납한 것이 당대 관례였습니다. 단계별로 임의적 징수와 착복이 당연하게 이뤄졌지만, 아래로 갈수록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거의 도둑이나 강도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급 세리들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은 시선대로 받고 자기 손에 쥐는 것 또한 변변치 않았을 테니, 감사할 조건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비유의 주인공이 하급 세리인지 상급 세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급 세리였다 하더라도 늘 불의한 구조에 일조한다는 자책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나 세리나 모두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세리만 의롭다 인정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자기세계에 집착하며 지키며 경계를 치느냐 않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누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자랑스럽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만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바로 그 조건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 경계를 짓습니다. 나아가 나는 옳고 나와 다른 사람은 그른 것으로 단정합니다. 자기의 가치기준, 자기 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세상을 그에 따라 질서 지으려고 합니다. 의인의 세계, 정상인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로부터 배제되는 차별 대상과 비정상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질서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세계에 집착하거나 내세울 만한 어떤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리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금을 그어놓은 경계 안 어디에도 들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주류 세계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기의 가치기준, 자기 의에 따라 그 누구를 판단하고 세상을 질서 지을 만한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었고, 세리는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자기의 업적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느냐 않느냐에 따라 사람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헌신적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 듯했지만 자기의 판단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다른 사람을 질시했습니다.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동정심을 갖고 있을 경우 교정과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치부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했지만 자신과 같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의롭게 되고 종교적으로 신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경계 밖에 있는 죄인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타인에게 거북스러운 일을 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삶의 구조가 흔들리고 정말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태도와 행위 이면의 진실을 그렇게 간파하시고 비유로서 사람들에게 설파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떤 태도에 가까울까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의 태도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에 광풍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주인공과 그에 열광하는 무리들을 보십시오. 그 거친 언어와 독선을 우리가 그대로 옮기기조차 어렵습니다. 타인을 정죄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구축해온 고질적 병증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역수칙을 어기고 폭력사태까지 빚은 8․15 광화문집회에서는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만 높인 게 아니었습니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혐오발언과 가짜뉴스가 집중적으로 쏟아졌습니다. 사실상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해 코로나19 확산 위기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열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들의 반사회적 태도, 결국은 반교회적으로 귀결되는 그 태도는 워낙 돌출되어 있기에 이제 분별하기가 쉬워졌습니다. 그들만 모를 뿐, 우리사회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현상만 도려내면 될까요? 우리는 그와는 다르다고 선 긋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전광훈을 이단으로 정죄하면 되는 걸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병증은 한국교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수한 한국교회의 교단들이 이단대책위를 두고 그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건강한 신앙을 추구하고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에 빠져 자신과 다른 집단을 우선 정죄하려 드는 그 태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자기 의에 빠져 있는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이단대책위를 두고 걸핏하면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결국 오늘 역시 유수한 교단들이 동성애대책위를 두고 있는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결국 그 도구로 성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목회자(임보라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더니, 이제 성소수자를 축복한 목사(이동환 목사)를 교회 재판에 넘기고, 평생 학문에 정진해 왔던 목사(허호익 교수)가 성소수자 문제를 한국교회가 직면해야 하는 과제로 제시하는 온건한 저서를 낸 것을 두고 출교 처분하는 사태까지 일으키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평등법/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교회 안에서 신앙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전광훈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다수의 주류 한국교회는 그 점에서 입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광훈은 한국교회 스스로가 배태하였다는 것을 통감하여야 합니다.

자기 의에 빠져 타인을 정죄하는 방식으로는, 복음이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건전한 신앙이 결코 지켜지지 않습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의 허물을 드러내고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면,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고 하지 않고서는 진실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기 스스로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과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지, 또한 이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임하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믿고 구현하는 데서 성취됩니다. 남을 정죄하는 데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구현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현되는 진실을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신실한 믿음에 대열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우리 빈 손을 모아”(살림의 노래 169)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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