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9/27 온라인 공동예배]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 디모데후서 1:7~10[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9-26 20:46
조회
20159
[9/27] 창조절 넷째 주일 한가위감사주일 온라인 비대면 예배

시작 오전 11:00
인도 담임목사 / 촬영․영상편집 최시내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뭇 생명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저마다의 삶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한가위 명절을 맞이합니다.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질병과 계속된 재난으로
고통 가운데 있고,
누려야 할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삶의 용기를 저버리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바꿀
용기를 지니게 하여 주시고,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를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그 가운데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하여 주시고
더욱 따뜻한 사랑을 나누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새찬송 304 / 통일찬송 404)/다같이


묵상과 성찰/ “서로 사랑하자”(김두완)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박종국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디모데후서 1:7~10 / 정경록 교우


말씀나누기/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 최형묵 목사


2020년 9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본문: 디모데후서 1:7~10

오랜 역사를 걸쳐 집약된 성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정황과 그 정황 가운데 형성된 신앙의 유산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교리에 매여 볼 것 같으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관심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편에서 볼 때 구원에 대한 갈망,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구원에 대한 약속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때할 때 그것이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헤아려야 할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말씀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디도서와 더불어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의 목회서신으로 불리는 책들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바울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바울의 친서라기보다는 좀 더 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목회서신은 기본적으로 제도로서 교회가 자리잡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서신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과 복음의 대립구도에서 기존의 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바울의 급진적 입장과는 달리 보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목회서신들의 가치가 간단히 깎아 내려질 수는 없습니다. 근본적 세상의 변화를 추구했던 신앙이 제도화된 교회의 현실 가운데서 굴절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의 질서에 대한 대안적 공동체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 한 포기될 수 없는 성격입니다. 목회서신은 불가피한 상황 가운데서 현실적 조건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몫을 다하고자 하는 교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일정한 제도적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뜻,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교회의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가장 긴밀한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칭송하며 신실한 믿음으로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합니다. 바울의 가장 긴밀한 동역자로서 디모데는 바울에게 마치 아들과도 같은 존재였고, 교회 안에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에게 보내진 편지 형식으로 기록된 말씀은, 당시 교회 안에서 추구되었던 신앙의 요체를 잘 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첫머리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바탕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친서 로마서의 내용을 그대로 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이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하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강요된 어떤 것을 그저 따라야 하는 노예와 같은 삶이 아니라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유인으로서 삶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환기되고 있는 것은, 당대 그리스도인이 처한 현실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 현실 가운데서 취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분명히 해주는 의의가 있습니다.
‘비겁한 영’, 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영이라는 부정적 언급이 먼저 등장하는 사실은, 당대의 상황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강요된 질서와 세계관이 압박하는 상황입니다. 외적인 박해, 그리고 당대 지배적인 세계관과 영합하여 발생한 내적인 혼란 등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그 삶을 위협하는 여러 요인들로 둘러싸인 상황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이 그와 같은 정황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저 그렇게 수동적으로 그 상황 한 가운데 내던져져 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 그리고 ‘절제’의 영이라 말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상황을 이겨낼 마음의 바탕입니다. 상황을 타개해나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서 능력, 서로 마음과 삶을 나누고 교류하는 사랑,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데서 꼭 필요한 절제력이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사라는 것을 본문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은사를 받은 만큼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을 둘러싼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고난을 초래하겠지만, 받은 은사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의를 재삼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바울의 의인론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이 요체를 새삼 환기함으로써 바울의 핵심적인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론은 오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그 첫머리에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의인론의 핵심은, 어떤 사람의 업적과 공로에 의해 특정한 자격을 인정받는 삶의 방식과 그 체제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 공로에 의해 살아간다는 허위의식을 근본적으로 깨우치게 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많은 업적과 공로를 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스스로 쌓은 것인지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공로와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차원에 대한 인정, 다시 말해 겸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을 통해 인간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길, 바로 그 새로운 삶의 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환히 드러났다고 본문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전적으로 내어 준 삶을 살았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주었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길이 드러났습니다. 철저하게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저 마지못해서 생존하는 삶의 법칙은 무력화되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도가 드러났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자연의 순환과정으로서 죽음과 썩음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삶, 마치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를 내세워야만 생존하는 삶, 곧 각자도생하는 삶의 법칙이 무너지고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더불어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삶, 곧 상호공존하는 삶의 법칙이 드러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증언한다는 것은 그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삶의 방식을 거슬러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일과에 함께 제시된 요한복음 11장의 말씀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내용은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죽임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그 죽임으로부터 구해내신 예수님의 삶을 전할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마침내 죽임을 딛고 일어선 예수님 자신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예수께서 적대자들에게 미움을 사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의 미움을 사고 죽음에 이르게 된 계기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의 말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표적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요한 11:47~48; 53)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못마땅하다면, 그렇게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사람들이 숨죽이고 다들 죽어 있는 것 같이 있는 것이 좋은 사람들, 사람들이 제정신을 갖고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싫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불공평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체제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고만 할 뿐 그에 대해 이의제기하지 않는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요, 그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내가 사는 방식이 세상의 법칙인 반면, 예수의 방식은 나를 내어줌으로써 상대를 살리고 더불어 사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지배자들은 예수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제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진정한 삶과 진정한 죽음의 충돌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의 세계 안에서도 그 충돌과 갈등은 여전합니다. 오늘날 법적으로 노예제도는 용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요된 노동으로 허덕이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 어떤 이유로든 엄연한 차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 곧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힌 사회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선민으로 구원받았다고 자처하고 있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 세상의 질서를 용인할 뿐 아니라 교묘한 논리로 그 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도반입니다. 주어진 부당한 상황을 타개해나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서 능력, 서로 마음과 삶을 나누고 교류하는 사랑,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데서 꼭 필요한 절제력이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사입니다. 우리가 그 은사를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그 은사가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것을 느끼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그리스도인 아닌 그리스도인이어서야 되겠습니까?
두려움을 조장하여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진정한 삶,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베풂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진정한 삶, 구원을 보장합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며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사랑으로”(살림의 노래 101)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알림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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