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문익환의 '히브리민중사' 복간을 맞이하여: 민중의 발바닥 언어로 풀어낸 성서 이야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1-11 19:26
조회
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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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히브리민중사> 복간을 맞이하여

민중의 발바닥 언어로 풀어낸 성서 이야기

崔亨黙

문익환은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다. 어느 한 이름으로 그의 삶을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최대한 간결하게 그 이름을 집약한다면 목사, 신학자, 시인, 실천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왠지 그 이름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그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기에 충분치 않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의 삶을 통째로 드러내 놓을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딱 꼬집어 찾는다면 과연 뭐라 말해야 할까?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의 말마따나, 무엇보다 목사로서 언어의 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비워버리고 온 몸으로, 아니 발바닥으로 삶을 기록해낸 선각자라고 하면 그나마 근접하지 않을까?
발바닥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해나간 문익환에게서 전환점이 되는 계기는 그가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즈음부터이다. 4.19를 겪고 숱한 절망의 시간들을 거친 뒤 ‘말씀의 수용자’에서 일거에 ‘말씀의 창조자’로 전환하는 반전의 수단이 시집 출간이었다. 시 역시 또 하나의 언어 형식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익환의 시는 화려한 언어조탁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온전히 드러내는 수단이요 그 삶을 이끌어가는 꿈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문예비평가들이 별로 주목할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아무런 색채가 없는 글로써 표현된 그의 시 세계는 파격적인 체제 전복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련의 시집들에 나타난 문익환 시세계의 열쇠는 ‘꿈’이었다. 꿈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무한정으로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서, 딱딱하게 굳은 체제의 논리를 전복하는 힘을 갖고 있다. 문익환은 그 꿈을 선취하는 삶의 길을 헤쳐 나감으로써 스스로 길이 되어 마침내 ‘생명’의 바다에 이르게 된다. 생명은 그저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 할 삶으로서, 그것은 일체의 죽임을 넘어선 살림을 뜻한다.
문익환이 시인으로 불리게 된 삶의 후반부는 이른바 실천가로서 삶의 여정과 일치한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평화 통일운동에 헌신한 삶의 여정이다. 1976년 3.1구국선언 사건이래 여섯 차례 무려 12년을 옥중에서 살아야 했던 삶의 여정이다. 폭력의 세기, 그 폭력의 구조가 응축된 한반도,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이루고자 한 생명의 서사를 펼쳐 보여준 발걸음이요 몸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생명의 바다에 이른 발걸음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발바닥이 땅에 남긴 것을 보충하는 일종의 주석으로서 문익환은 <히브리 민중사> 저작을 남긴다. 발바닥으로 기록한 삶의 여정을 일일이 동행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 히브리민중사>는 성서의 일관된 맥을 히브리 민중들의 해방 역사로 꿰뚫고 있다. 문익환이 이미 오래 전부터 관심을 기울여 온 예언자들의 해방 전통은 여기서 성서의 본류로 확고하게 자리매김 되고, 그 예언자들의 선포는 해방을 향한 민중들의 발자국을 드러내는 것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밝혀내는 증거가 된다. 본래 구약성서 신학자요 성서 번역가였던 문익환이 삶의 반전을 통해 체득한 통찰로 성서를 재해석한 빛나는 저작으로서 <히브리 민중사>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역사에 가려진 민중의 역사는 본래의 역동적인 모습을 되찾는다.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우선 그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 ‘히브리 민중사’인가? 오히려 친숙한 것은 ‘이스라엘’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중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또렷한 문제의식이 깃들어 있다. 오늘날 ‘히브리’와 ‘이스라엘’은 유무상통하는 개념으로 통용되고, 성서 자체 안에서도 그렇게 통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역사적 기원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구별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히브리’가 민중적 함의를 갖는다면 ‘이스라엘’은 민족적 함의를 갖는다. ‘히브리’는 고대 근동사회에서 일종의 천민 집단을 일컫는다면, ‘이스라엘’은 그 집단이 연대하여 탄생한 하나의 국가사회적ㆍ민족적 집단을 일컫는다. 이는 최신의 구약 성서학과 고고학의 연구가 밝혀낸 사실로서, 이 책의 서설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민족의 실체를 민중으로 인식한 그와 같은 관점이 문익환과 한국의 민중운동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하는 점이다. 문익환 목사 하면 흔히 민족지상주의자의 면모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라고 외치며 민족통일운동에 헌신하였을 때 그 인상은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된다. 그러나 문익환은 단순한 민족주의자 또는 민족지상주의자가 아니었다. 문익환은 이 책에서 성서를 히브리 민중사로 조명하고 있고, 민중의 편에서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를 주목하고 있다. 문익환은 만년의 또 하나의 저작인 공동서한논쟁집 <예수와 묵자>에서 말하기를, “사랑의 사회적 실천은 의”라 역설하는가 하면, “예수는 계급해방론자”로서 ‘NL’이 아니라 ‘PD’라고까지 하였다. 문익환은 “평등이 평화의 핵심”이라 강조하고 민중들이 일상적 삶의 평화를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생명 본연의 모습이라 보았다. 갈등하는 사회현실 한복판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들을 먼저 주목한 데서 비롯되는 통찰이다. 그것은 문익환을 포함한 민중신학의 선구자들이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서 이른 통찰로서, 세계적 지평에서 또한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다.
물론 한국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의 선구자들에게서 ‘민족’과 ‘민중’은 별개로 인식되지 않은 면이 있다. 민중신학에서 널리 통용된 ‘민중적 민족’과 ‘민족적 민중’이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그것은 식민지 피지배라는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민족의 현실을 민중의 현실과 동일시한 데서 ‘민중적 민족’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민족국가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그 주체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그와 같이 인식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과 민중은 모순관계로 인식되지 않고 병행관계로 인식되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민족적 민중’이라는 말까지 통용되었던 사정은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과 ‘민중’을 동일시하는 인식은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정한 체제에의 귀속성을 벗어난 민중을 특정한 체제의 귀속성을 전제로 하는 민족에 함몰시키는 것은 사회적 구성원의 다양성과 그 갈등관계를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 아니라, 대외적 차원에서 민족지상주의가 갖는 폐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문익환과 민중신학의 선구자들은 어떤 기존체제의 귀속성을 벗어난 민중의 시좌를 강조함으로써 그 혼돈으로 인한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인식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통찰은 역사적으로 민족지상주의가 야기하는 폐해를 넘어 보편적 민중의 지평에서 호소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그 통찰은 오늘 다양한 얼굴과 이름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민중들을 분명하게 드러내 줄 수 있는 돋보기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책이 구어체로서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었다는 것 또한 그 의의를 쉽사리 지나칠 수 없다. 그저 애초 발표되었던 지면의 성격상 독자들과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채택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일까? 아니면 온 몸으로, 발바닥으로 끊임없이 뛰어다녀야 했던 처지라 어떤 논저 형식을 갖춰 글을 쓰기에는 여의치 않은 사정 탓일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방식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 문익환은 애초 그 효과를 유념하고 작심하였을 듯싶다.
구어체의 대화란 청중을 눈앞에 두고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야기를 듣는 상대의 눈빛을 읽고 그 가운데서 심중을 헤아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야만 온전한 뜻이 전달된다. 그야말로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생동감 넘치는 소통의 방식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는 순간순간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상상력이 자극되는 만큼 의미의 확대와 심화를 가져온다. 여기서 상상력의 극대화 효과는 무엇보다 성서가 전하는 히브리 민중의 이야기와 오늘 현실의 민중의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실제로 히브리 민중사는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 마당마다 당대 한국 민중의 이야기가 겹쳐 있다. 북간도 명동촌의 후배로서 신약 성서학자 안병무가 일관되게 이야기했던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분리되지 않는 성서해석의 진면목이 여기에서도 확연히 드러나 있다.
이야기 형식이라는 면에서 이 책은 오늘날 민중신학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히고 있는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가 갖고 있는 장점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물론 <민중신학 이야기>는 실제 대화를 기초로 하여 기록된 것이고, <히브리 민중사>는 처음부터 글로써 이야기를 접해야 하는 독자를 유념하고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그 탄생 기원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듯한 이야기 형식으로서 장점을 고스란히 지니게 된 것은, 단지 문익환의 필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민중의 현장을 누볐던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온 몸으로, 발바닥으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한 민중들의 고통과 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 또한 체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히브리 민중사>는 발바닥으로 땅을 누비며 해방을 갈망한 히브리 민중들의 이야기를 재연한 것이자 동시에 역시 그와 같이 발바닥으로 뛰며 해방의 역사를 일구고자 한 저자의 삶의 기록이며 이 땅의 민중들의 이야기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이 땅의 민중사건을 증언하는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을 대표할 만한 중요한 또 하나의 저작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야기 형식으로서 저작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방금 앞서 말했지만, 이 책은 담고 있는 내용 면에서 다른 민중신학의 중요 저작과 비견할 만하다. 민중신학에서 성서해석과 관련한 대표적 저작으로는 안병무의 <갈릴래아의 예수>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사실은 갈릴래아의 예수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는 히브리 민중사의 맥락을 선연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선구 격으로 평가받는 것이 마땅하고 나란히 함께 읽혀야 할 책이다.
상상력에 자극 받은 이야기 형식이니 어떤 학구적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만한 내용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치부해버리는 것은 기우요 오만이다. 이른바 학문적 논증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약 성서학자로서 성서 번역자로서 저자는 당대 최신의 연구결과를 충분히 반영하는 가운데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그 역사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통찰이 그 어떤 꼼꼼한 주석보다 빛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단지 읽기에 편한 가벼운 책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이 책은 바로 그 역사와 현실을 꿰뚫은 놀라운 상상력의 진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서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탐구>와도 견주어 볼 수 있다. 서남동의 그 저작은 민중신학의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서의 민중전통과 당대의 민중현실 가운데서 구원과 해방의 의미를 통찰하는 데 번뜩이는 영감을 풍부하게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민중신학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한국의 역사 가운데서 탄생한 민중신학을 정초한 중요 저작 목록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또 하나의 저작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민중신학에 관한 논의의 지평에서 <히브리 민중사>는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해 왔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이야기 형식의 가벼운 책이라는 편견 때문에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측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민중신학을 정초한 중요 저작 가운데 이른바 학구적 논저 형식을 취한 저작이 어디 있는가? 제법 체계를 갖춘 안병무의 <갈릴래아의 예수>마저도 사실은 이른바 학구적 논저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책의 진가는 놀라운 역사적 상상력과 현실을 통찰하는 안목에 있다. 그 점에서 <히브리 민중사>가 그보다 못한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면, 암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그 저작이 지니는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문익환의 삶 자체가 저작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발바닥으로 새긴 그의 삶의 궤적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얇은 책 한 권은 그저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분명 이 책 한 권으로 문익환의 삶을 평가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새롭게 보는 차원에서, 특별히 세계 신학계에서 고유한 신학으로서 평가받고 있는 민중신학의 기초를 밝히는 차원에서 이 책의 진가는 다시 조명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이 아쉽게도 미완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독자로서는 무척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 마당에서 다룬 예언자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마저도 완결되지 않았고, 여타의 다른 지혜서들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가 성서 번역에서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시편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이야기가 계속되어 또 어떤 놀라운 통찰을 일깨워 주었을까 생각하면 아쉽기 그지없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이 책은 ‘시대의 풍운아, 만방의 예언자 - 예레미야 I’ 편에서 그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징역살이로 중단을 거듭해야 했던 저자에게 역시 징역살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서 끝난 것은 “우연이라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깊은 같은 경험”이 히브리 민중사와 우리 민족사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서 생각하면 강대국의 힘의 대결이 펼쳐지는 가운데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선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다시금 되새겨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물론 결국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유다국가의 운명과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으로 고무되어 있는 오늘 우리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제적 각축과 긴장의 고조는 닮아 있지 않은가! 그 가운데서 민중적 정의를 재삼 일깨운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소리는 촛불민심을 따를 것인지 강대국과의 동맹을 따를 것인지 재삼 환기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 민중사 미완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에게 발바닥으로 그 이야기를 채워나가도록 숙제를 남겨주고 있다. 때마침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히브리 민중사>의 재발간의 의미는 그 과제를 우리에게 환기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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