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 그저 옷깃을 만져봤을 뿐이지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6-25 11:37
조회
778
죽재 서남동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그저 옷깃을 만져봤을 뿐이지만


최형묵(한국민중신학회 회장 / 천안살림교회 목사)


서남동 목사님과 나의 인연을 말하자면, 옷깃을 만져본 것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옷깃을 만져보았다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인연일 수 있겠다. 복음서에 보면 혈루증 걸린 여인이 그저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마가 5:25-34). 그런데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마침내 예수님과 직접적인 인격적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저 옷깃을 만진 것만으로도 놀라운 삶의 변화를 경험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예사로운 인연은 아닌 셈이다.
내가 옷깃만을 만져보았다고 한 것은, 나로서는 서남동 목사님을 몇 차례 뵙기는 했지만, 그분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경험이 없고 따라서 그분이 나를 기억할 만큼 어떤 삶을 공유한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그분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니 그렇게 비유하는 것이 딱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1981년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서남동 교수님이 해직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연세대 신학과에서는 김찬국 교수님과 함께 두 분이 해직된 상태였다. 입학 전부터 이미 그분들의 이름을 알고 있던 터라, 내가 재학하는 도중 복직하면 직접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엄혹했던 신구분의 통치 시절이었지만 1983년에 이르러 신군부는 유화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 또한 시행하였다. 그리고 1984년 1학기말쯤 해직교수들이 복직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연히 기대감에 설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남동 교수님은 그해 7월에 서거하셔서 다시 강단에 설 수 없게 되었다. 4학년 마지막 학기에 두 분의 수업을 기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웠다. 김찬국 교수님만이라도 뵙고 배울 수 있는 것만으로 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84년 2학기초 마침내 해직교수들이 복직하게 되었을 때 우리 학생들은 복직 교수님 환영회를 열기로 하였다. 두 분이 함께 복직을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분은 복직하셨지만 한 분은 돌아가셨으니, 이를 어찌 하여야 할지 우리는 고심하였다. 결국 고심 끝에 “서남동 교수님 추모예배 및 김찬국 교수님 복직환영회”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열었다. ‘추모’와 ‘환영’이 겹쳤으니 그 분위기는 기묘하였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다들 애매한 표정으로 행사를 치렀다. 제자들의 환영사에 응답하는 김찬국 교수님 역시 시종일관 학생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김찬국 교수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서남동 교수님을 그리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애매한 표정으로 함께 했던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그 아쉬움을 내내 간직하고 있지만, 다행히 나는 서남동 교수님을 직접 뵈었던 기억 또한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 뵌 것은 1981년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학교 강의실보다 외부의 집회에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학교에서 뵐 수 없었던 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가능한 한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다녔다. 처음 뵌 그 장소는 기독교회관 2층 강당이었다. 정확히 무슨 모임이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서남동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에 대해 변선환 교수님께서 논찬하는 자리였다. 다른 몇 분이 더 있었지만 기억에 없고 두 분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거니와 그 두 분의 이야기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서남동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변선환 교수님의 논찬은 대학 1학년생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서남동 교수님의 이야기는 민중신학적 모티브로 구성된 내용이었던 것 같다. 딱히 그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는 순간 소화되고 육화된 탓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러나 변선환 교수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도무지 받아 넘기기 어려웠던 탓에 그 기억만 또렷이 남게 된 것 같다.
그 다음에 서남동 교수님을 뵌 것은 대학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쯤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1982년말에서 1983년초 어느 시점이다. 서남동 목사님께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계실 때이다. 당시 선교교육원은 학교에서 쫓겨난 교수들과 학생들의 대안적 신학교육의 장으로도 유명했지만,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온갖 모임들이 이뤄진 중요한 공간이기도 했다. 청년학생들의 모임도 빈번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청년회전국연합회(기청)의 모임은 늘 그곳에서 이뤄졌다. 우리는 늘 내 집으로 알고 드낙거렸다. 그렇게 모임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서남동 목사님께서 들르셔서 청년들을 격려해주셨을 때 온화한 얼굴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때 긴 말씀은 없었고 그저 격려의 말씀을 주고 가셨는데, 나로서는 가장 가까이 뵐 수 있었던 기회라 ‘아, 바로 이분이구나!’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 때는 그렇게 뵐 수 있었던 것만으로 영광이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은 1984년 돌아가신 해 벽두 설날 일단의 청년들과 함께 세배하러 간 자리였다. 연세대학교 구내 낡은 교수사택에서였다. 당시에는 청년학생들이 어른들에게 세배하러 다니던 ‘미풍양속’이 있었는데, 수유리 쪽에 여러 어른들 댁이 많았다. 그 때 중요한 ‘팁’ 가운데 하나가 식사 때에는 안병무 선생님 댁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박영숙 선생님의 음식솜씨가 유명했고, 항상 진수성찬을 준비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 날도 안병무 선생님 댁을 들르고 몇 분 어른들 댁을 들른 후 마지막으로 신촌 연세대학교 구내 세브란스 뒤편 서남동 목사님 댁을 들렀다. 서남동 교수님은 당시 해직상태였기에 학교 사택에 살 수 없었으나 달리 집이 없는 형편을 배려받아 그 낡은 사택에 살고 계셨다. 낡고 고풍스러운 집에 들어서면서 ‘여기가 사택인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 뵐 걸!’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뒤늦게나마 그렇게 뵐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거실에 혼자 계셨고, 탁자를 보니 이미 다른 손님들이 다녀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에 띈 건 포도주였다.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우리들에게도 포도주 한 잔씩을 권하셨다. 젊은 마음에 선생님 댁에 포도주가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는데,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잔을 받게 되어 더욱 영광이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여 적지 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그런데 젊은이들 앞에서 민중신학자로서 삶의 여정을 말씀하실 때 귀가 번쩍 띄는 이야기가 있었다. 민중신학자로서 선생님께서 ‘크리스찬 맑시스트로 살아왔다’고 말씀하신 대목이었다.
내가 그 대목에서 귀가 번쩍 띈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기청을 통해 기독청년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때가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진입하는 시점이었으니 학생운동에서 ‘고참’급이 된 즈음이었다. 그 때 가장 큰 고민거리가 ‘신앙’과 ‘운동’의 관계였다. 나로서는 신앙과 운동의 행복한 만남, 그 종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지만 당시 기독청년학생운동에서 그 문제는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신앙과 운동의 관계는 막연히 추상적 차원에서 문제시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급진적 학생운동은 과학화되는 경향을 띠면서 사실상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에 비춰볼 때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여기서 이른바 기독청년학생운동의 ‘아이덴티티 논쟁’이 제기되었다. 그 문제는 그렇게 운동진영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그 운동에 참여한 기독학생들에게는 실존적인 문제가 되었다. ‘운동’을 선택하면 ‘신앙’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하면 ‘운동’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즈음 나는 그 실존적 고민에 빠진 여러 후배들을 붙잡고 양자의 병존과 종합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설득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서남동 선생님으로부터 스스로 ‘크리스찬 맑시스트’라는 고백을 직접 듣게 되었으 니 그것은 마치 ‘복음’과 같이 들렸다. 이미 서남동 목사님의 후기 저술에 그와 같은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기에 나는 선생님의 신학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스스로 명시적으로 실토하신 것은 처음 듣는 터여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해하는 바 그분의 신학에 대해 더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도 그 신학의 방법은 내가 신학적 사유를 펼치는 데 여전히 중요한 하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어쨌거나 그 날 그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던 탓인지 그 다음 상황은 어찌 되었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그 말씀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서남동 선생님은 1984년 그 해 서거하셔서 다시는 직접 뵐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그 이후 그분의 유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작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기독청년학생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에게 친숙한 『해방공동체』집필 작업이었다. 『해방공동체』는 기청 성서연구위원회 이름으로 펴낸 성서연구 교재였고, 그 교재가 나왔을 때 기독청년학생들의 필독서처럼 되었다. 그런데 그 교재가 탄생하게 된 기원이 사실은 서남동 목사님에게 있었다.
당시 기청에서는 청년들을 위한 성서교재를 선교교육원에 요청하였다. 선교교육원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수준급의 교재를 펴내고 있었고, 또한 성인을 위한 구역교재 등을 펴냈으나 청년을 위한 교재는 없었다. 그래서 청년들을 위한 교재를 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인데, 당시 선교교육원장이었던 서남동 목사님께서 청년들 스스로 작업을 해보라고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 청년들 스스로 작업을 시도하면 선교교육원이 뒷받침하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그래서 기청에서는 성서연구위원회를 꾸려 청년을 위한 성서교재 편찬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것이 1985년이었으니 서남동 목사님이 제안하신 그 작업에 대한 지원은 후임 원장인 박근원 목사님 때에 이뤄지게 되었다.
아마도 서남동 목사님께서 청년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맡기지 못했을 것이다. 청년학생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민중운동이 절정기를 향하고 있던 그 즈음 청년들 스스로 생생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서를 다시 조명해보라고 맡겼기에 그 책은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시 정호진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름을 열거하면 알 만한 여러 젊은이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수년에 걸쳐 선교교육원에서 밤을 지새가며 작업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책의 탄생 기원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저 청년들 스스로 펴낸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서남동 목사님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그 내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각별한 인연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0대 후반 내내 그 작업에 열정을 바쳤으니 가히 청춘을 바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 신학적 사유의 방식을 형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그 중요한 일이 나에게는 서남동 목사님과의 인연의 한 고리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금도 나는 서남동 목사님의 신학적 통찰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고, 그분의 신학적 방법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이미 다른 글들을 통해 밝힌 내용을 이 지면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두 이야기의 합류’라든지 ‘계시의 하부구조’, 그리고 ‘사회경제사적 방법’ 등은 지금도 내가 신학적 사유를 펼쳐나가는 데서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이 지면에서 재삼 이야기하고 싶다.
그분이 나를 기억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배울 기회는 없었지만, 그분으로부터 가장 큰 신학적 영감을 얻고 그분의 신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후학으로서 ‘제자’라 자처하더라도 선생님께서는 ‘아니’라며 나무라시지는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제자를 자처하는 분이 나섰는데도 굳이 그분과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이고자 싶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혹 다른 누군가가 또 마지막 제자를 자처하더라도 서남동 목사님께서는 나무라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분으로부터 감화를 받은 후학들이 많다는 것을 뜻하고, 그만큼 그분의 신학이 풍요롭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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