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전광훈과 황교안, 복음을 오도하는 전도자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7-02 17:24
조회
762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웹진 원고(201907)


전광훈과 황교안, 복음을 오도하는 전도자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


‘전광훈 현상’으로 세상이 소란하다. 그의 막말 파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한기총 대표회장을 맡은 이후 그의 발언 수위는 점입가경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험한 말들을 뱉어놓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 소란을 피우며 거두고자 하는 정치적 효과 말고, 정말 뭐가 그렇게 못 마땅해서 그러는 것일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평화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을 북측의 ‘적화’ 야욕에 놀아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 듯하다. 굳이 반대하는 합리적 핵심을 짚자면 그것뿐이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한 가지 이유를 찾자면, 그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소수자들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는 기류가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불편해하는 현재 시국 상황의 실체는 그런 것이다.

아니,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불편한 것일까? 갈등과 대결의 구도를 강화시키는 편 가르기에 편승하고, 그렇게 편 가르기를 하는 가운데 숱한 타자들을 정죄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찾아온 잘못된 인식, 잘못된 신앙 때문이다. 누군가 악마화해야 할 상대가 무너지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없어 위기감을 느끼는 허망한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렇게 허망한 세계관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궁극적인 구원의 희망을 바라는 것이다. 그 희망은 그 어떤 것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반공주의, 반동성애, 반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코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어떤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동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희망은,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며, 모든 사람이 삶의 기쁨을 노래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지금 삶 가운데서도 구현하고자 하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다(고후 13:11~13).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온전하게 되기를 힘쓸 때, 서로 격려하며 서로 한 마음이 되기 위해 힘쓸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며 새로운 세계를 이루게 된다. 언제나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이라는 자각 없이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으며,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그저 사람을 옭아매는 도그마에 빠지기 십상이다. 말도 안 되는 정치적 선동으로 신앙을 타락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놀랍고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그렇게 소란을 피우면 피울수록 그 자신이 얼마나 허황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그가 대표한다는 집단이 결코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지! 누가 심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심판받고 있다는 것을 과연 스스로 알고 있기는 할까?

그와 궁합이 잘 맞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제1야당의 대표이면서 전도사 직함까지 갖고 있는 황교안이다. 한국교회를 스스로 대표한다는 이가 스스로 심판받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일까? “우리나라에 그동안 기여한 것이 없는 외국인들에게 산술적으로 똑같이 임금수준을 유지해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의 발언은 우리를 경악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었다. 그가 대표하고 있는 정당은, 현재 최저임금법이 그 적용대상에서 예외로 하고 있는 장애인의 경우에 더해 외국인까지 그 대상에 포함하는 법안을 발의하기까지 했다.
‘인권 감각 0점, 경제감각 -100점’! ‘입법활동에 그동안 기여한 것이 없는 한국당에 산술적으로 똑같이 임금수준을 유지해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입을 모으고 있다.

그냥 웃어넘길 일일까? 경제 감각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제쳐두더라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이로서 그에게 과연 적절한 발언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늘 성경을 마주하는 기독교인, 게다가 전도사 직함까지 갖췄다면 신학을 공부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기에 경악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사실 자체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여의 원칙을 넘어선 하느님의 정의(마태 20:1~16)를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성경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른다는 사람이 과연 성경의 진실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러한 사태를 두고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일침을 가한다. “세상은 스스로가 있다고 상상하는 안전성에 근거하여 하느님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그러한 안전성은 종교에서 가장 고차원적이고 파괴적인 형태에 도달하게 되며, 따라서 유다 사람들에게서는 성경에 근거한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파괴적인 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탐구’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에 대해서는 귀머거리가 되게 한다.”(국제성서주석 <요한복음 I>, 434에서 재인용)

‘스스로 믿고 있는 안전성’,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기만의 우상일 뿐이다. 성경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가장 지독한 형태의 우상숭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꼬집는 격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공격하였던 유다 사람들(요한 5:39~47)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그와 동일한 사태를 목격하고 있다.*


* 이 내용은 고린도후서 13:11~13; 요한복음 5:39~47을 본문으로 하는 두 편의 천안살림교회 설교문 가운데 관련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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