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의 갈등, 피할 수 없다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1-22 19:01
조회
444
향린교회 미래선교위원회 <진보신학팀> 시범사업 발표회(교재 집필 초안)
2021년 11월 21일(일) 오후 2:00 / 서울 YWCA 4층 대강당
(* 위와 같이 발표한 원고의 초고로서, 책으로 내기 위해서는 더 다듬고 보충해야 합니다. 더불어 생각해보고, 의견을 경청하고자 하는 기대에서 그 초고를 올려둡니다. 더불어 함께 같은 주제를 다룬 향린교회 서형식님의 글도 첨부해둡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 피할 수 없다면?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기독교윤리학)
1. 선의에도 불구하고 야기되는 갈등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것도 아닌 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틀림없이 갈등의 배후에 어떤 이해관계가 깔려 있을 것이라 판단하기 쉽다. 많은 경우 그 예상이 적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다. 이해관계를 따질 것도 없고 명백히 서로 선의를 갖고 접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갈등을 낳고 서로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가치의 차이 또는 그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충돌, 또는 인정 요구에 따른 충돌이라 할 수 있을까? 갈등의 사연과 층위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래도 숨길 수 없는 한 기억을 되살려야 할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이러저런 의견의 충돌과 조정과정은 늘 있는 일이지만, 정말 심각한 위기로 느꼈던 일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교회건축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과 위기의 상황이다. 내부의 진통뿐만 아니라 외부의 방해까지 겹친 그 과정은 몇 가지 국면이 있기는 했지만, 돌아보는 시점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 교회건축을 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축하인사 끝에 한결같이 어려움을 예고하는 염려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 염려는 기우일 것으로 예상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교회 안에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제법 체화되어 있다고 믿었다. 교회 정관에도 모든 의사결정은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을 명문화해두었고, 실제로 그렇게 운영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의사결정 과정이 다소 더디기는 해도 그 미덕을 체감하고 있었다. 종종 목회자로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여 고심하다가도 교회 안에서 그 뜻을 물으면 되리라는 기대로 염려를 접은 경험도 여러 차례였다. 목회자로서 책임이 한결 가벼워지고, 또한 교회 구성원들에게는 공동결정의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종종 목회자로서 답답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도 있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가질 수 있다면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목회에 임할 수 있어 좋다는 답을 해왔다. 그리고 거의 매번 경험을 통해 보건대, 목회자로서 생각했던 것과 교회 구성원들의 총의를 모은 것이 그다지 괴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니 어려움을 예고하는 우려를 기우로 돌릴 수 있었다. 게다가 구성원들의 인격 또한 믿고 있었으므로 흔히 겪는 그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마음속으로 거의 장담하다시피 생각했다. ‘두고 보시라!’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그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곧바로 느끼게 되었다. 처음 120% 공감, 아니 과정을 마칠 즈음 200%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제한된 자원, 곧 한정된 예산이 원천적인 문제였을까?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미 있고 효율적인 공간 구성을 갖춘 교회당을 짓기로 한 데 모두 공감하였지만, 논의가 구체화될수록 의견들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가치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상의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1년여 진통을 겪는 동안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일을 숱하게 겪었고, 몸마저 그대로 반응하여 두 가지 위협적인 병증을 겪기도 했다. 목회자로서 맞는 위기일 뿐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온 한 사람으로서 맞닥뜨린 생애의 위기로까지 느껴졌다. 민주적 절차와 합의의 정신을 중시했던 믿음마저 흔들릴 지경이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크게 두 차례에 걸친 내부의 진통, 그리고 건축을 시작했을 때 외부의 방해로 인한 진통을 거친 후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감하게 되었기에 지금 그 과정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지만, 진통을 겪는 동안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마도 이해관계의 충돌이었다면 결국 파국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간 교회가 지향해왔던 가치를 공감하고 있었기에 서로 한 발작 물러나 서로의 입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갈등의 상황을 공동체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그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절차와 합의의 과정을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평정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교우들을 신뢰하고 서로의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했던 것이 옳았던 것 같다. 그 진통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각기 개별적으로 선의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서로에게 심각하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따라서 심각한 갈등의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라 하여 갈등의 무풍지대가 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진실을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는 계기였다.
2.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특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갈등의 한 사례를 끄집어내기는 하였지만, 교회에서 겪을 수 있는 갈등이 그뿐일까?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숱하게 겪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갈등에 관한 일반론이나 흔히 교회 안에서 겪는 갈등 현상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교회로 일컬어지는 교회, 더 분명히 말한다면 민중신학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현상과 성격을 돌아보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민중신학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신학적 지향을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신학적 지향을 따른 교회 구조와 기풍까지 함축한다. 그 교회는 대체로 평신도의 주체성을 중요시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것을 특징으로 한다. 권력의 독점 또는 과점을 지양하고 수평적인 배분을 그 특성으로 한다. 목회자의 배타적 권한이나 당회와 같은 치리기구의 권한 집중을 배제하고 평신도들의 총의를 반영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 교회이다. 더불어 교회생활 언어 측면에서도 가능한 한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우리가 지금 관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교회 안에서의 갈등 현상이다. 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과연 다른 기존교회들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른바 진보교회에서도 다른 교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여러 갈등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앞서 말한 진보적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과 양상이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견해를 보장하는 제도와 풍토 가운데서 나타나는 갈등의 양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독점적 권위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이거나 물질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갈등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갈등이 일어날 경우 그 갈등이 신앙의 언어를 취하고 있어 실질적인 원인이 은폐되기도 하지만 그 양상을 들여다보면 갈등의 뿌리를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대개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지기 십상이고, 결국 그것이 해법 아닌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진보교회에서 두드러진 갈등의 양상은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기대 수준의 차이 또는 그 실현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저마다의 의견주장이 충분히 보장된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이기에 그 범위가 넓고 더 소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악화될 경우 분열로 귀결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장기화되고 일상화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구성원들의 피로감이 높아가고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는 긴장감이 높아질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양상이 진보교회 갈등의 특성으로서 그 고유한 양상이 아닐까?
사실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갈등의 상태가 비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갈등이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 특정한 신앙과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경우 갈등이 훨씬 완화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역시 다양한 출신과 경험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마주치는 만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해법이다. 한 공동체가 건강한지 아닌지는 갈등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갈등의 해결방식에 달려 있다. 만약 갈등을 한쪽의 일방적인 힘으로 눌러 무마한다면 그것은 미숙한 해법이요,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역동적인 관계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성숙한 해법이다. 우리가 지금 진보교회의 갈등 양상을 가늠해본 것은 그에 적합한 해법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3.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그 해법
진보교회의 특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갈등의 양상이 분명하다면 그 해법은 역시 진보교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그 조건 안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의 주체성을 중요시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면, 역시 그 해법은 일차적으로 그 조건 안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우선 갈등을 불러일으킨 어떤 사안이 그 조건이 보장하는 절차 안에서 적절하게 다뤄져 온 것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양한 의견들을 충분히 수렴하고자 하는 적절한 절차로서 이미 공동체 구성원에게 합의된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절차적 적절성을 살펴보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초보적 요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초보적이라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요건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만일 민주적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절차로 여겨져 왔던 제도가 실제로 어떤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제도 자체를 보완하는 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갈등 해법의 한 계기이자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까지도 사실은 여전히 갈등 해법의 초보적인 단계이다. 진보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요건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수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통의 신앙, 공통의 이상을 추구해나가는 구성원들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사실 평상시 교회생활 전반에서 이뤄져야 할 과제이지만, 갈등이 현저하게 노정된 국면 그 자체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건이다. 이미 갈등이 노정된 상황은 신뢰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을 뜻하는데, 그러한 국면에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이 갈등 상황 자체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요건이 될 수 있을지 회의가 들 수도 있다. 신뢰 형성은 일상적 과정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갈등의 국면 그 자체 안에서도 강조되어야 할 덕목이다. 그야말로 선의를 선의로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피차간 주장의 요체를 이해하기 위한 깊은 숙고와 더불어 투명한 대화와 소통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신뢰 형성은 오히려 갈등의 국면 그 자체 안에서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일상적 과정 안에서, 또한 위기의 국면에서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태도가 요청된다. 다양한 지혜를 수용하는 개방성이다. 신앙은 그 자체로 개방성을 뜻한다. 신앙은 그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믿음이거나 특정한 교리에 대한 믿음을 뜻하지 않는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 개방성을 뜻한다. 그 개방성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확고하게 정립된 진리를 따른다기보다는 절대적 타자를 향한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진리를 찾아나서는 여정에 있는 구도자와 같다.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은 개방성을 뜻한다면 우리는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겸허해질 수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마태 7:12), 끊임없이 반복되는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는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 준다. 그러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은 성서 안에 넘쳐난다.
성서는 또한 구체적인 갈등의 상황에서 그 극복의 과정을 전하는 흥미로운 사례들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모세가 백성들 가운데서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직분을 분담하는 이야기(출애 18:13~26)와 초기교회 직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사도 6:1~7)는 그 흥미로운 사례이다. 모세는 백성의 각 단위별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송사를 해결하는 해법을 찾는다. 초기교회에서는 출신별로 차별이 발생하고 갈등이 이야기되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분의 분담이 이뤄졌다. 그것이 교회 직분의 기원이었다. 성서는 두 이야기 모두 행복한 귀결을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당사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책임을 분담하는 가운데 공통의 지도력 안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이어져온 공의회의 전통이나 근대 이후 공화제 또는 현대의 합리적인 여러 조직 원리는 사실상 매우 오랜 지혜이자 상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그 진실을 새삼 헤아려보는 것만으로도 갈등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4. 진보교회 안에서 갈등 해결을 위해 더 생각해볼 과제들
사실 진보교회 안에서 성서적 지혜에 대한 이해나 오늘의 시대적 합리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아니다. 진보교회의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은 성서해석에 대한 개방성과 더불어 그렇게 이해된 성서적 지혜와 오늘의 보편적 가치 사이의 소통능력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항간에서 오해하고 있듯이 진보교회 안에서 성서의 권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두 이야기의 합류’(서남동) 개념에서 성서의 민중전통과 역사에서의 민중전통이 각각 동등한 전거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유일한 절대적 규범 근거로서 성서의 권위가 상대화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개념은 당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관점에서 성서의 전통을 생동하는 지혜로 수용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항간의 오해와 달리 대부분의 진보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성서주석에 충실한 것도 그 반증이다. 항간의 오해는 역사에서의 민중전통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오늘의 실천적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측면이 마치 성서를 배제하는 것처럼 오인된 데서 비롯될 뿐이다. 요컨대 진보교회 안에서 성서의 지혜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매우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주제인 갈등의 해법과 관련하여 그 지혜를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풍요로운 지혜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더 생각해봐야 할 과제들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 과제, 곧 공동체의 규모, 전통적 덕목으로서 성도의 교제, 그리고 목회적 지도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교회 공동체의 규모는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고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는 데서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규모가 커지면 구성원의 인격적 관계보다는 조직관리와 경영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갈등이 발생할 경우 역시 그 논리에 의한 해법이 추구될 수밖에 없다. 오늘 대형교회들이 안고 있는 병폐를 보면 그 문제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 방대한 규모 안에서는 성찰적 신앙이 결코 가능하지 않고 민주적 의사결정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 병폐를 넘어 정말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각 교회마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겠지만,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면 구성원 모두 인격적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기왕의 구성원들이 적절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새롭게 합류하는 구성원들이 적응하기까지 잠정적으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정도면 더 없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는 교회라면 어떻게 할까? 그야말로 행복한 고민이니 염려할 것 없다. 바로 그 점에서 분가선교는 매우 훌륭한 대안이 된다.
두 번째, 교회의 전통적 덕목으로서 성도의 교제는 진보교회 안에서 새삼 그 의의를 주목하고 구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진보교회는 특정한 성향집단의 성격을 일정정도 지니고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친밀한 교제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보교회는 이념적 결사의 성격이 강한 만큼 상대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부차화해온 측면이 있다. 보수는 부패해서 망하고 진보는 분열해서 망한다는 시쳇말은 교회에도 해당하지 않을까? 교회가 탄생한 이래 꼭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성도의 교제를 강조해온 의미를 새삼 새겨야 한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지속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취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함축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높이며, 따라서 갈등이 발생할 경우 상대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볼 수 있는 기풍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아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진보교회 안에서 목회적 지도력은 독특하고 미묘하다. 평신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교회에서 당연시되는 권위주의적 지도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목회적 지도력이 그저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총체적이면서 동시에 섬세한 지도력이 요구된다. 노자는 말하기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도덕경 60장), 가장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도덕경 17장). 그 까닭은, 공을 이루어도 백성은 다 그것이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깨워주는 진실이기도 하다. 결코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고난의 종(이사 42:1~4), 끊임없이 섬김의 길로 일관한 그리스도의 길이다(마태 20:28). 그저 이루기 어려운 심원한 진실이 아니다. 권력의 욕망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교회 가운데서 대안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교회의 지도력에 당연히 요구되는 진실이다. 거시적 방향설정 차원에서는 결단의 미덕을 갖춰야 하지만, 미시적 관계형성 차원에서는 경청의 미덕을 발휘하는 지도력이라고 하면 조금 실감이 날까? 그것은 물론 목회자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앞서 계속 강조했지만, 교회 구성원의 상호신뢰가 형성될 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지도력이기도 하다. 진보교회에서 목회지도력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섬김의 지도력을 시험 받고 있는 중이다.
2021년 11월 21일(일) 오후 2:00 / 서울 YWCA 4층 대강당
(* 위와 같이 발표한 원고의 초고로서, 책으로 내기 위해서는 더 다듬고 보충해야 합니다. 더불어 생각해보고, 의견을 경청하고자 하는 기대에서 그 초고를 올려둡니다. 더불어 함께 같은 주제를 다룬 향린교회 서형식님의 글도 첨부해둡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 피할 수 없다면?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기독교윤리학)
1. 선의에도 불구하고 야기되는 갈등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것도 아닌 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틀림없이 갈등의 배후에 어떤 이해관계가 깔려 있을 것이라 판단하기 쉽다. 많은 경우 그 예상이 적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다. 이해관계를 따질 것도 없고 명백히 서로 선의를 갖고 접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갈등을 낳고 서로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가치의 차이 또는 그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충돌, 또는 인정 요구에 따른 충돌이라 할 수 있을까? 갈등의 사연과 층위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무래도 숨길 수 없는 한 기억을 되살려야 할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이러저런 의견의 충돌과 조정과정은 늘 있는 일이지만, 정말 심각한 위기로 느꼈던 일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교회건축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과 위기의 상황이다. 내부의 진통뿐만 아니라 외부의 방해까지 겹친 그 과정은 몇 가지 국면이 있기는 했지만, 돌아보는 시점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 교회건축을 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축하인사 끝에 한결같이 어려움을 예고하는 염려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 염려는 기우일 것으로 예상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교회 안에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제법 체화되어 있다고 믿었다. 교회 정관에도 모든 의사결정은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을 명문화해두었고, 실제로 그렇게 운영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의사결정 과정이 다소 더디기는 해도 그 미덕을 체감하고 있었다. 종종 목회자로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여 고심하다가도 교회 안에서 그 뜻을 물으면 되리라는 기대로 염려를 접은 경험도 여러 차례였다. 목회자로서 책임이 한결 가벼워지고, 또한 교회 구성원들에게는 공동결정의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종종 목회자로서 답답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도 있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가질 수 있다면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목회에 임할 수 있어 좋다는 답을 해왔다. 그리고 거의 매번 경험을 통해 보건대, 목회자로서 생각했던 것과 교회 구성원들의 총의를 모은 것이 그다지 괴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니 어려움을 예고하는 우려를 기우로 돌릴 수 있었다. 게다가 구성원들의 인격 또한 믿고 있었으므로 흔히 겪는 그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마음속으로 거의 장담하다시피 생각했다. ‘두고 보시라!’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그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곧바로 느끼게 되었다. 처음 120% 공감, 아니 과정을 마칠 즈음 200%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제한된 자원, 곧 한정된 예산이 원천적인 문제였을까?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미 있고 효율적인 공간 구성을 갖춘 교회당을 짓기로 한 데 모두 공감하였지만, 논의가 구체화될수록 의견들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가치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상의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1년여 진통을 겪는 동안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일을 숱하게 겪었고, 몸마저 그대로 반응하여 두 가지 위협적인 병증을 겪기도 했다. 목회자로서 맞는 위기일 뿐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온 한 사람으로서 맞닥뜨린 생애의 위기로까지 느껴졌다. 민주적 절차와 합의의 정신을 중시했던 믿음마저 흔들릴 지경이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크게 두 차례에 걸친 내부의 진통, 그리고 건축을 시작했을 때 외부의 방해로 인한 진통을 거친 후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감하게 되었기에 지금 그 과정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지만, 진통을 겪는 동안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마도 이해관계의 충돌이었다면 결국 파국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간 교회가 지향해왔던 가치를 공감하고 있었기에 서로 한 발작 물러나 서로의 입장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갈등의 상황을 공동체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그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절차와 합의의 과정을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평정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교우들을 신뢰하고 서로의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했던 것이 옳았던 것 같다. 그 진통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각기 개별적으로 선의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서로에게 심각하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따라서 심각한 갈등의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라 하여 갈등의 무풍지대가 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진실을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는 계기였다.
2.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특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갈등의 한 사례를 끄집어내기는 하였지만, 교회에서 겪을 수 있는 갈등이 그뿐일까?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숱하게 겪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갈등에 관한 일반론이나 흔히 교회 안에서 겪는 갈등 현상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교회로 일컬어지는 교회, 더 분명히 말한다면 민중신학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현상과 성격을 돌아보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민중신학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신학적 지향을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신학적 지향을 따른 교회 구조와 기풍까지 함축한다. 그 교회는 대체로 평신도의 주체성을 중요시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것을 특징으로 한다. 권력의 독점 또는 과점을 지양하고 수평적인 배분을 그 특성으로 한다. 목회자의 배타적 권한이나 당회와 같은 치리기구의 권한 집중을 배제하고 평신도들의 총의를 반영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 교회이다. 더불어 교회생활 언어 측면에서도 가능한 한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우리가 지금 관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교회 안에서의 갈등 현상이다. 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과연 다른 기존교회들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른바 진보교회에서도 다른 교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여러 갈등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앞서 말한 진보적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과 양상이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견해를 보장하는 제도와 풍토 가운데서 나타나는 갈등의 양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독점적 권위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이거나 물질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갈등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갈등이 일어날 경우 그 갈등이 신앙의 언어를 취하고 있어 실질적인 원인이 은폐되기도 하지만 그 양상을 들여다보면 갈등의 뿌리를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대개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지기 십상이고, 결국 그것이 해법 아닌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진보교회에서 두드러진 갈등의 양상은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기대 수준의 차이 또는 그 실현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저마다의 의견주장이 충분히 보장된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이기에 그 범위가 넓고 더 소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악화될 경우 분열로 귀결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장기화되고 일상화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구성원들의 피로감이 높아가고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는 긴장감이 높아질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양상이 진보교회 갈등의 특성으로서 그 고유한 양상이 아닐까?
사실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갈등의 상태가 비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갈등이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 특정한 신앙과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경우 갈등이 훨씬 완화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역시 다양한 출신과 경험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마주치는 만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해법이다. 한 공동체가 건강한지 아닌지는 갈등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갈등의 해결방식에 달려 있다. 만약 갈등을 한쪽의 일방적인 힘으로 눌러 무마한다면 그것은 미숙한 해법이요,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역동적인 관계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성숙한 해법이다. 우리가 지금 진보교회의 갈등 양상을 가늠해본 것은 그에 적합한 해법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3.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그 해법
진보교회의 특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갈등의 양상이 분명하다면 그 해법은 역시 진보교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그 조건 안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의 주체성을 중요시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면, 역시 그 해법은 일차적으로 그 조건 안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우선 갈등을 불러일으킨 어떤 사안이 그 조건이 보장하는 절차 안에서 적절하게 다뤄져 온 것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양한 의견들을 충분히 수렴하고자 하는 적절한 절차로서 이미 공동체 구성원에게 합의된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절차적 적절성을 살펴보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초보적 요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초보적이라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요건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만일 민주적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절차로 여겨져 왔던 제도가 실제로 어떤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제도 자체를 보완하는 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갈등 해법의 한 계기이자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까지도 사실은 여전히 갈등 해법의 초보적인 단계이다. 진보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요건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수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통의 신앙, 공통의 이상을 추구해나가는 구성원들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사실 평상시 교회생활 전반에서 이뤄져야 할 과제이지만, 갈등이 현저하게 노정된 국면 그 자체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건이다. 이미 갈등이 노정된 상황은 신뢰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을 뜻하는데, 그러한 국면에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이 갈등 상황 자체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요건이 될 수 있을지 회의가 들 수도 있다. 신뢰 형성은 일상적 과정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갈등의 국면 그 자체 안에서도 강조되어야 할 덕목이다. 그야말로 선의를 선의로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피차간 주장의 요체를 이해하기 위한 깊은 숙고와 더불어 투명한 대화와 소통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신뢰 형성은 오히려 갈등의 국면 그 자체 안에서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일상적 과정 안에서, 또한 위기의 국면에서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태도가 요청된다. 다양한 지혜를 수용하는 개방성이다. 신앙은 그 자체로 개방성을 뜻한다. 신앙은 그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믿음이거나 특정한 교리에 대한 믿음을 뜻하지 않는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 개방성을 뜻한다. 그 개방성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확고하게 정립된 진리를 따른다기보다는 절대적 타자를 향한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진리를 찾아나서는 여정에 있는 구도자와 같다.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은 개방성을 뜻한다면 우리는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겸허해질 수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마태 7:12), 끊임없이 반복되는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는 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 준다. 그러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은 성서 안에 넘쳐난다.
성서는 또한 구체적인 갈등의 상황에서 그 극복의 과정을 전하는 흥미로운 사례들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모세가 백성들 가운데서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직분을 분담하는 이야기(출애 18:13~26)와 초기교회 직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사도 6:1~7)는 그 흥미로운 사례이다. 모세는 백성의 각 단위별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송사를 해결하는 해법을 찾는다. 초기교회에서는 출신별로 차별이 발생하고 갈등이 이야기되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분의 분담이 이뤄졌다. 그것이 교회 직분의 기원이었다. 성서는 두 이야기 모두 행복한 귀결을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당사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책임을 분담하는 가운데 공통의 지도력 안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이어져온 공의회의 전통이나 근대 이후 공화제 또는 현대의 합리적인 여러 조직 원리는 사실상 매우 오랜 지혜이자 상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그 진실을 새삼 헤아려보는 것만으로도 갈등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4. 진보교회 안에서 갈등 해결을 위해 더 생각해볼 과제들
사실 진보교회 안에서 성서적 지혜에 대한 이해나 오늘의 시대적 합리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아니다. 진보교회의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은 성서해석에 대한 개방성과 더불어 그렇게 이해된 성서적 지혜와 오늘의 보편적 가치 사이의 소통능력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항간에서 오해하고 있듯이 진보교회 안에서 성서의 권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두 이야기의 합류’(서남동) 개념에서 성서의 민중전통과 역사에서의 민중전통이 각각 동등한 전거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유일한 절대적 규범 근거로서 성서의 권위가 상대화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개념은 당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관점에서 성서의 전통을 생동하는 지혜로 수용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항간의 오해와 달리 대부분의 진보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성서주석에 충실한 것도 그 반증이다. 항간의 오해는 역사에서의 민중전통에서 비롯되는 지혜와 오늘의 실천적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측면이 마치 성서를 배제하는 것처럼 오인된 데서 비롯될 뿐이다. 요컨대 진보교회 안에서 성서의 지혜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대체로 매우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주제인 갈등의 해법과 관련하여 그 지혜를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풍요로운 지혜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더 생각해봐야 할 과제들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 과제, 곧 공동체의 규모, 전통적 덕목으로서 성도의 교제, 그리고 목회적 지도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교회 공동체의 규모는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고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는 데서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규모가 커지면 구성원의 인격적 관계보다는 조직관리와 경영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갈등이 발생할 경우 역시 그 논리에 의한 해법이 추구될 수밖에 없다. 오늘 대형교회들이 안고 있는 병폐를 보면 그 문제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 방대한 규모 안에서는 성찰적 신앙이 결코 가능하지 않고 민주적 의사결정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 병폐를 넘어 정말 평신도의 주체성을 보장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각 교회마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겠지만,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면 구성원 모두 인격적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기왕의 구성원들이 적절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새롭게 합류하는 구성원들이 적응하기까지 잠정적으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정도면 더 없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는 교회라면 어떻게 할까? 그야말로 행복한 고민이니 염려할 것 없다. 바로 그 점에서 분가선교는 매우 훌륭한 대안이 된다.
두 번째, 교회의 전통적 덕목으로서 성도의 교제는 진보교회 안에서 새삼 그 의의를 주목하고 구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진보교회는 특정한 성향집단의 성격을 일정정도 지니고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친밀한 교제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보교회는 이념적 결사의 성격이 강한 만큼 상대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부차화해온 측면이 있다. 보수는 부패해서 망하고 진보는 분열해서 망한다는 시쳇말은 교회에도 해당하지 않을까? 교회가 탄생한 이래 꼭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성도의 교제를 강조해온 의미를 새삼 새겨야 한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지속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취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함축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높이며, 따라서 갈등이 발생할 경우 상대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볼 수 있는 기풍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아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진보교회 안에서 목회적 지도력은 독특하고 미묘하다. 평신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교회에서 당연시되는 권위주의적 지도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목회적 지도력이 그저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총체적이면서 동시에 섬세한 지도력이 요구된다. 노자는 말하기를,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도덕경 60장), 가장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도덕경 17장). 그 까닭은, 공을 이루어도 백성은 다 그것이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깨워주는 진실이기도 하다. 결코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고난의 종(이사 42:1~4), 끊임없이 섬김의 길로 일관한 그리스도의 길이다(마태 20:28). 그저 이루기 어려운 심원한 진실이 아니다. 권력의 욕망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교회 가운데서 대안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교회의 지도력에 당연히 요구되는 진실이다. 거시적 방향설정 차원에서는 결단의 미덕을 갖춰야 하지만, 미시적 관계형성 차원에서는 경청의 미덕을 발휘하는 지도력이라고 하면 조금 실감이 날까? 그것은 물론 목회자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앞서 계속 강조했지만, 교회 구성원의 상호신뢰가 형성될 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지도력이기도 하다. 진보교회에서 목회지도력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섬김의 지도력을 시험 받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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