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25] 살든지 죽든지 - 빌립보서 1:19~26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4-30 22:18
조회
1315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4월 30일 / 최형묵 목사


제25강 살든지 죽든지 - 빌립보서 1:19~26


1. 그리스도의 영광 - 1:19~20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동시에 지역교회의 상황을 말했다. 18 하반절부터 그 이하는 모든 동사가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해지고 있는 상황을 기뻐했다. 바울은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한다. 그것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우들의 기도와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알고 있다. <표준새번역>은 이 대목을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번역함으로써 감옥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 번역이 정당한지는 의문이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된 사실을 기뻐한 사람이 곧바로 감옥에서 풀려나게 될 것을 기대하며 기뻐한다고 말했을까? 그보다는 바울이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바울이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한정하고 있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살든지 죽든지’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그야말로 죽음의 가능성까지 전제하고 있다. 그러한 각오를 하고 있는 바울이 당장 감옥에서 풀려나리라는 기대로 기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도 기뻐할 만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바울은 그보다는 최종적인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한 것이다. 바울이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스스로 진실한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태도를 말하며, 바로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기에 예나 지금이나 담대할 수 있다. 그 삶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바울이 바라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몸 안에 계 그리스도’라는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몸’은 인간존재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전한 실존을 표현하고 있다.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그리스도와 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데 초점이 있지만, 이것은 동시에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한다. 살아서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과 죽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의 정점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2. 살든지 죽든지 - 1:21~24


바울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계속해서 말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의 각오를 뚜렷하게 피력한다. 지금 바울에게는 삶과 죽음의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 달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바울에게서 자신의 삶과 죽음은 차이가 없다. 어떤 경우든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굳이 스스로 택한다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자아의 죽음을 뜻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육신의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교회에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정리하자면 스스로 택할 수 있다면 죽음을 선택하겠지만(물론 그것은 자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불가불 죽음에 이르는 상황을 말한다), 교회에 유익한 길로 인도되지 않겠느냐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살든지 죽든지 한결같다는 말은 단단한 결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만, 죽음으로써 곧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적 영혼불멸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유대교적 종말론의 표상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바울은 여기서 몸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함으로써 그리스적 이원론과는 다른 생각을 엿보였다. 그러나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혼불멸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적 이상을 말하며,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관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생각한 것은 마침내 마지막 날에 이르기 전까지의 중간기를 그렸던 유대교의 종말론적 표상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의 의미는 바울의 서신 곳곳에 나타나는 부활에 관한 주장 또는 종말론적 기대에 관한 주장들을 대조함으로써 정합적으로 그 지시하는 바를 따져볼 수도 있지만(사실은 후대의 교리적 진술이 그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그렇게 따지기보다는 단순하게 이해해서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는 당대의 믿음을 반영한 주장이라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완전한 단절일 수 없다는 믿음은 일반적이었거니와 바울은 그 믿음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3. 재회의 희망 - 1:25~26


바울은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허심탄회하게 빌립보 교우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곁에 머무르게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말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교회의 자랑거리를 많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랑거리는 빌립보 교회 교우들의 인간적 자랑거리가 아니다. 사도 바울의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체험하게 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어떤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대를 통해 바울은 재회의 희망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전체 3
  • 2014-04-24 22:03
    일부 오타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생생한 현장중계입니다.

  • 2014-04-24 22:06
    앗, 질문으로 제기된 게 '복음주의'가 아니라 '복음파'였군요.
    rnㅋ '복음주의'로 알고 열을 올렸는데, '복음파'라는 걸 알았으면 물론 더 열을 올렸을텐데...
    rn하여간 그렇게 이름붙이는 건, 그럼 다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따르지 않는다는 거냐 하는
    rn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우선 문제가 있다는 건 변함 없습니다.

  • 2014-04-25 12:58
    오타 수정한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ㅠㅠ... 지적해주시면 고쳐서 다시 올려놓겠습니다. 일단 한번 수정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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