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30]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 빌립보서 3:1b~1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6-11 22:15
조회
1316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6월 11일 / 최형묵 목사


제30강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 빌립보서 3:1b~11


1.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 3:1b~3


3:1b부터는 분위기가 확 바뀌고 있어 이전까지 내용과 구별되는 다른 편지라는 데 이견은 없다. 이전의 서신이 기쁨의 서신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투쟁의 서신이라 할 만큼 그 성격은 확연히 구별된다.

먼저 바울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계속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한다. 되풀이되는 이야기가 혹시 빌립보교회에 불편함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며, 그 되풀이가 자신에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며, 빌립보교회의 안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되풀이된다는 사실 때문에 중간에 또 다른 서신이 있지 않았나 추정케 하지만, 그 되풀이가 꼭 서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두로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운을 떼고 난 다음 바울의 이야기는 거친 직격탄이다. 할례를 주장하는 악한 사람들을 개들이라 칭하며 그들을 조심하라고 일갈한다. 바울은 여기에서만 이 ‘개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욕설로서 무지한 자들, 불신자들, 이방인들을 나타낸다. 이렇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이 빌립보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방인 교회인 빌립보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여기서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할례가 평화적 공존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던 경우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이 유대인과 결혼할 때 할례를 하는 것은 공동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방인 출신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할례는 종종 유대인들에 의해 만류되기도 했다. 유대 정통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선민의 표징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저 공존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그 까닭에 이방인들 가운데도 할례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일부가 빌립보교회에 합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바울의 공격은 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바울의 격한 말투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교회 안에서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할례를 정신화하는 것이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여기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속적 삶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할례를 하는 것을 구원의 표징으로 삼는 태도, 곧 율법에 매인 삶의 태도에 한정된 것이다. 바울은 그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2. 옛 바울의 자랑거리 - 3:4~6


바울은 육체의 의미에서 자랑거리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율법의 준수라는 차원에서 말하면 옛날에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거리가 많았다. 바울은 율법이 명한 대로(창세 17:12)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하였고,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베냐민지파 사람이며,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이며, 율법준수에서는 가장 철저한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여기서 ‘이스라엘’, ‘히브리’는, 종종 이방인들이 경멸적 의미를 깔고 있는 ‘유대인’과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자긍심 내지는 언어 또는 문화적인 자긍심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베냐민지파는 바울의 예전 이름과 동일한 사울 왕이 속했던 지파로서, 여기에서는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의 순수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깟 할례한 것(정확하게는 ‘자르는 것’) 하나 가지고 자랑거리로 삼는 이들에게 자기로 말할 것 같으면 그보다 훨씬 자랑거리가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3. 지금 바울의 모범 - 3:7~11


그러나 바울은 현재의 자신을 하나의 모범으로 내세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때문에 그간 자신에게 이로웠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밝힌다. 다마스커스 사건을 회상하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전폭적인 결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 결단이 가능했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결단을 강조한다. 그 결단은 전적인 가치의 전도를 의미한다.

이하의 8절은 현재 시점에서 앞의 7절과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하며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잃은 모든 것을 단지 오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소중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는 의,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이다. 전적인 삶의 전환을 뜻한다. 기존의 자신의 삶을 떠받쳐 주는 조건에 의지하거나 그에 의존한 주관적 욕망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의를 따르고자 하는 삶이다. 이 열망을 말하는 데서 바울의 어투는 일관되게 자신의 선택과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죽으심을 본받고 마침내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최종의 목적으로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피력한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완전하게 자신을 비워버린 죽음의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부여받는다. 역설의 진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지금 그 궁극적 목적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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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03 08:53
    성서의 장을 표시한 것은 11세기, 절을 표시한 것은 16세기부터인데, 그 과정에서 부적절하게 분류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구체적인 정황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고, '기뻐하십시오'하는 긍정적인 언어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싶어 한 데서 그런 착오가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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