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38] 고린도교회의 분열상 - 고린도전서 1:10~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10-01 23:31
조회
1541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10월 1일 / 최형묵 목사


제38강 고린도교회의 분열상 - 고린도전서 1:10~9



1. 고린도교회의 분열상 - 1:10~12


인사를 마친 바울은 본격적으로 권면을 시작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후 일관된 관점을 이렇게 미리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일치되는 말을 하고, 분열을 일으키지 말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열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소식을 글로에 집안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글로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로에 집안 사람들(노예 또는 자유인)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일상의 필요에 의해 빈번히 이동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그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동 상황을 짐작케 해 준다.

문제가 되는 파당으로 언급된 것은 네 개의 파당이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이다.

고린도교회가 파당으로 갈렸다면 바울파는 충분히 예상함직하다. 교회의 기초를 닦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파당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동시에 교회의 기초를 닦은 사람에 반하는 파당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어쨌든 바울은 자기사람 챙기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모든 파당의 존재를 일축해서 부정하는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충실하다고 내세우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공동체의 화합에 기여하기보다는 하나의 분파로서 존재한다면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아볼로파는 그가 고린도교회에 영향을 끼친 것(사도행전 18:26; 18:27~19:1)을 생각하면 역시 있음직하다. 바울이 전하는 바를 따르면 아볼로는 바울과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고전 3:6~9). 그렇다면 파당을 형성하게 만든, 그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출신으로 지식이 풍부했고 뛰어난 언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바울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언변에 능하지 않았다(고후 10:10; 11:6). 이런 차이가 바울보다는 아볼로를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게바파는 베드로를 추종하는 파당을 뜻하는 것으로, 그 파당이 베드로의 직접적인 영향의 결과인지는 불확실하다. 베드로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수도 있지만 그 사실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중심으로는 하는 파당이 형성될 수는 있었다. 유대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중심인물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야고보였지만, 순회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던 베드로의 존재는 이방 지역 교회들에도 널리 알려졌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가 유대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은 충분히 그럴 법하다.

그리스도파는 도대체 어떤 경향을 띠었을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 파당의 이름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아마도 그것이 하나의 파당으로 존재했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다른 경향을 띠었을 가능성이 높다.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에 통달한 아볼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울과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한 반면, 그리스도파는 혹 그 철학적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자 하였던 파당의 경향을 말하는 것 아닐까 짐작되기도 한다. 맨슨(T.W. Manson)에 의하면, 그리스도파는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유, 불멸성과 동등한 것으로 믿은 경향을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세련된 철학적 일신론을 말하고, 자유는 엄격주의로부터 광활한 자아실현의 세계로의 해방을 뜻하고, 불멸성은 조야한 것으로 간주되는 유대교적 부활의 개념을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2. 세례보다 앞서는 복음 - 1:13~17


바울은 이와 같은 분열 상황을 놓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이 질문은 그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단호한 표현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렸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는 반문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 반문은, 바울이 하나 됨의 근거로 말하는 그리스도의 존재에서 강조되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며 동시에 당시의 세례의 관행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바울에게서 십자가의의 의미는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당시 세례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으며, 삼위일체 이름으로 행해진 것은 그 후이다.

세례보다는 앞서는 복음전파를 강조하는 권면은, 고린도교회의 파당이 일정하게 세례자에 따라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례를 베푼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이 갈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푼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바울은 초기에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직접 베푼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후에는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일보다는 직접적인 복음 전파의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세례보다 앞서는 복음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것은 관례상 시간의 전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 의미에서의 중요성의 차이를 함축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지식과 언변이 오용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권면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앞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앞으로 본문을 대하면서 다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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