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39] 유대인은 표적을 찾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 고전 1:18~2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10-08 22:36
조회
1459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10월 8일 / 최형묵 목사


제39강 유대인은 표적을 찾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 고린도전서 1:18~25



1. 십자가의 도 - 1:18~19


여러 분파(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로 갈라져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분파를 가르는 것이 인간적, 세상적 지혜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히며 그것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은 유익하지 않으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에 대한 교훈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도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요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엎는 역설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2. 유대인은 표적을 찾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 1:20~22


바울은 세상적 지혜의 허망함을 말하고, 그 세상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 세상적 지혜를 추구하는 대표적 집단으로 유대인과 그리스인을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구한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하는 통념이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보기에 잘못된 가치관이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이란 무엇일까? 표적은 곧 눈으로 드러난 기적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태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에 띄게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인간들 자신의 주장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이게 드러내달라는 요구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요, 하나님을 자신의 욕구충족 수단으로 삼는 태도를 말한다.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 볼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가치관과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일종의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과는 뭔가 다른 것, 특별한 것, 획기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갈구하는 것도 같은 경우이다. 하나님을 부르짖고 특별히 뜨거운 ‘은사의 체험’을 하지만, 그것이 일상의 삶하고는 상관이 없는 경우이다. 예수께서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한 적이 있다(마가 8:11-13 // 누가 11:29-32 // 마태 12:38-42). 표적을 보여 줄 것이 있다면 요나의 표적 이외에는 없다는 말은, 진정한 ‘삶의 변화’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구하는 지혜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잘못된 지혜로서의 그리스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한마디로 실천이 없는 사변적 지혜 또는 진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도구화된 지식을 말한다. 논리가 맞고, 그 자체로 이치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사상이나 지혜가 많다. 오늘날 한갓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과학기술 지식, 계량적 수치를 산출하고 그에 따라 경기변동은 예측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는 경제학적 지식과 같은 것이 그런 경우이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의 허상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영적’ 지혜 또는  ‘이데아적’ 지혜를 추구했다. 현실은 허상 내지는 불완전하고 거꾸로 완전한 이상 세계는 피안의 영적 세계에 있다고 본 것이다. 해명될 수 없는 모순투성이의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의 영적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 온 것이 영지주의이다. 그것은 영적 지혜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한 점에서 매우 그럴듯한 구원관이었지만, 인간의 육체적 삶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육신의 삶 또한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했다.


3.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으로서 그리스도 - 1:23~25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는,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는 이들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어리석어 보인다. 완전한 비움, 철저한 자기부정의 사건으로서 십자가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거리낌이 될 수밖에 없으며,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럴 듯한 지혜로 일깨우기보다는 자기 몸뚱어리를 완전히 내놓은 사건으로서 십자가는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지배하는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신의 능력을 보여 준 사건도 아니요, 고상한 지혜를 일깨워주는 사건도 아니었다. 도대체 꺼림칙하고 불가해한 사건일 뿐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건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거꾸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강함이라고 말한다. 역설의 진실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지금 모순으로 가득 찬 육체의 현실을 내버려두고 어떤 기적을 바라는 태도, 해명되지 않은 모순덩어리로서의 현실을 그대로 두고 어떤 이상적 질서를 바라는 태도의 허구성을 말하려 한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이다(21절). 그것은 주술적인 어떤 효과를 지닌 사건이 아니라 폭력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삶 가운데 개입해 들어오시는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21절)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뜻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 대비하여 이해할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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