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읽기 49] 고린도교회 안의 음행 - 고린도전서 5:1~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3-25 21:40
조회
1518
천안살림교회 2015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5년 3월 25일 / 최형묵 목사
제49강 고린도교회 안의 음행 - 고린도전서 5:1~8
1. 고린도교회 안의 음행 - 5:1~5
서신의 서설에서 절대로 교만하지 말 것을 역설해 왔던 바울은 이제 구체적으로 고린도교회의 잘못이 무엇인지 꼬집기 시작한다. 여기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잘못이 음행이다. 그것은 성적인 문란함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람의 음행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아내는 아마도 계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부인은 아버지와 사별했거나 이혼한 상태일 것이다. 아무리 막 간다 해도 현재 아버지와 부부관계인 사람을 자기 아내로 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바울이 질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이나 교회가 그 일에 대해서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정도 용인할 만한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질책한다. 바울이 볼 때 그 일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 없거니와 이방인의 입장에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레위기(18:8; 20:11)에서 금지하고 있고, 그리스-로마 세계의 도덕률에서도 금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사자와 고린도교회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을까? 오늘날에도 성윤리는 매우 미묘하고 그에 관해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고대 사회의 상황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과부가 된 계모와 결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일반적 도덕률과는 다른 견해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경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따랐기에 과거의 인습에 매일 필요 없다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 육에 속하는 일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었다. 유대의 전통에서든 그리스-로마의 전통에서든 용인되지 않은 그 일을 두고 고린도교회가 자만에 빠져 있다는 바울의 질책은 바로 그런 상황을 암시한다. 기존의 어떤 도덕률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신들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적어도 이 대목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바울은 결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정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더욱 엄격한 윤리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공동체의 보존을 위해 그런 음행을 저지른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바울은 그 의사를 밝히는 가운데 자신이 비록 현재 몸으로는 공동체와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으므로 공동체 안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피력한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니 교회공동체가 그 문제에 대해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의사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입장천명과 더불어 그렇게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제명이 갖는 의미를 역설한다. 그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는 멸망하게 하고, 그 영은 주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보면 바울의 입장에서 상당한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이야 어찌되었든 영의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질책하는 바울 역시 동일한 논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 형식으로 보면 동일하다. 그러나 음행을 저지르거나 그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육체적 음행 자체를 거리낌 없는 것으로 정당화하는 데 강조점이 있는 반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음행을 저지른 육체를 죽임으로써 영의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 강조점이 있다. 공동체로부터의 제명 또는 육체의 멸망, 곧 심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는 구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게 하는 이치 - 5:6~8
바울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을 제명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기회를 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울은, 그것이 또한 공동체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길임을 누룩의 비유를 통해 강조한다. 누룩 하나가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이치를 환기시키며 누룩을 제거할 것을 강조한다. 유대교 세계에서 많은 경우 누룩은 악을 상징하였다. 복음서에서 예외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마태 13:33; 누가 13:20)도 있지만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여기서 누룩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덧붙이는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유월절은 유대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했던 일을 환기함과 동시에 급히 탈출하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었던 일을 환기하며 재현한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사실 유월절 의식에는 오랜 고대의 종교적 관념이 함께 스며들어 있다. 전통적인 속죄양의 관념, 그리고 농경의식으로서 햇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면서 묵은 곡식으로 만든 누룩을 배제했던 의식이 함께 스며들어 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관념과 의식을 해방사건과 연결하여 재해석하였고, 바울은 지금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 사건과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해방된 백성이니 해방된 사람들로서의 공동체의 순수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이 이 대목에서 누룩과 유월절의 비유를 든 것은, 아마도 편지를 쓰는 시점이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5년 3월 25일 / 최형묵 목사
제49강 고린도교회 안의 음행 - 고린도전서 5:1~8
1. 고린도교회 안의 음행 - 5:1~5
서신의 서설에서 절대로 교만하지 말 것을 역설해 왔던 바울은 이제 구체적으로 고린도교회의 잘못이 무엇인지 꼬집기 시작한다. 여기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잘못이 음행이다. 그것은 성적인 문란함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람의 음행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아내는 아마도 계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부인은 아버지와 사별했거나 이혼한 상태일 것이다. 아무리 막 간다 해도 현재 아버지와 부부관계인 사람을 자기 아내로 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바울이 질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이나 교회가 그 일에 대해서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정도 용인할 만한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질책한다. 바울이 볼 때 그 일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 없거니와 이방인의 입장에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레위기(18:8; 20:11)에서 금지하고 있고, 그리스-로마 세계의 도덕률에서도 금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사자와 고린도교회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을까? 오늘날에도 성윤리는 매우 미묘하고 그에 관해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고대 사회의 상황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과부가 된 계모와 결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일반적 도덕률과는 다른 견해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경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따랐기에 과거의 인습에 매일 필요 없다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 육에 속하는 일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었다. 유대의 전통에서든 그리스-로마의 전통에서든 용인되지 않은 그 일을 두고 고린도교회가 자만에 빠져 있다는 바울의 질책은 바로 그런 상황을 암시한다. 기존의 어떤 도덕률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신들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적어도 이 대목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바울은 결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정신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더욱 엄격한 윤리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공동체의 보존을 위해 그런 음행을 저지른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바울은 그 의사를 밝히는 가운데 자신이 비록 현재 몸으로는 공동체와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으므로 공동체 안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피력한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니 교회공동체가 그 문제에 대해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의사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입장천명과 더불어 그렇게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제명이 갖는 의미를 역설한다. 그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는 멸망하게 하고, 그 영은 주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보면 바울의 입장에서 상당한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이야 어찌되었든 영의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질책하는 바울 역시 동일한 논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 형식으로 보면 동일하다. 그러나 음행을 저지르거나 그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육체적 음행 자체를 거리낌 없는 것으로 정당화하는 데 강조점이 있는 반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음행을 저지른 육체를 죽임으로써 영의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 강조점이 있다. 공동체로부터의 제명 또는 육체의 멸망, 곧 심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는 구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게 하는 이치 - 5:6~8
바울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을 제명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기회를 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울은, 그것이 또한 공동체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길임을 누룩의 비유를 통해 강조한다. 누룩 하나가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이치를 환기시키며 누룩을 제거할 것을 강조한다. 유대교 세계에서 많은 경우 누룩은 악을 상징하였다. 복음서에서 예외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마태 13:33; 누가 13:20)도 있지만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여기서 누룩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덧붙이는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유월절은 유대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했던 일을 환기함과 동시에 급히 탈출하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었던 일을 환기하며 재현한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사실 유월절 의식에는 오랜 고대의 종교적 관념이 함께 스며들어 있다. 전통적인 속죄양의 관념, 그리고 농경의식으로서 햇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면서 묵은 곡식으로 만든 누룩을 배제했던 의식이 함께 스며들어 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관념과 의식을 해방사건과 연결하여 재해석하였고, 바울은 지금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 사건과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해방된 백성이니 해방된 사람들로서의 공동체의 순수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이 이 대목에서 누룩과 유월절의 비유를 든 것은, 아마도 편지를 쓰는 시점이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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