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읽기 56] 이렇든 저렇든 - 고린도전서 7:25~3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6-03 21:21
조회
1426
천안살림교회 2015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5년 6월 3일 / 최형묵 목사
제56강 이렇든 저렇든 - 고린도전서 7:25~31
1. 결혼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 7:25~28
결혼관계 문제에 대해 바울은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어떤 규범을 율법주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에 권고할 만한 어떤 태도를 말하고 싶어한다. 기본적으로 바울은 종말론적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현재의 세계 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강화할 수도 있는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거리를 둘 것을 권면한다. 현재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는 그것을 말한다. 아내에게 매여 있으면 벗어날 필요가 없고, 이미 벗어나 있으면 새로 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결혼하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다. 종말에 닥칠 재난을 생각하면 그것이 짐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2. 이렇든 저렇든 - 7:29~31
바울은 그 구체적인 권면의 취지를 이 대목에서 다시 일반적인 권면 형태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아닌 듯’ 살라는 이야기다. 있는 데도 없는 듯, 하는 데도 안 하는 듯 살라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 언뜻 떠올리기에 이 말씀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마음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불교적 명상의 세계 또는 스토아 철학적 의미의 마음의 평정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것에 대해 마음으로 초연해지라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단지 관조적으로 마음 자세만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이 말씀은 전혀 종말론적 희망 또는 메시아적 희망으로서 성격을 지니지 못한다. 단지 부당한 현실을 옹호해 줄 뿐이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해탈만 추구한다면 현실은 변함없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으로 남을 뿐이다. 예컨대, 가미카제 특공대의 전사들은 선불교의 명상의식으로 마음을 평정했다. 이 때 마음의 평정은, 스스로 느끼는 평화와는 정반대로 한 인간을 극한적인 폭력의 무기로 돌변시킨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구분과 조건들을 무시하라는 데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떤 현실의 조건에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의 조건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절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조건을 타개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모순의 상황, 갈등의 상황 에 있는 인간 상황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조건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본문에서 세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업을 포함하여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현실에서 여러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현재의 것에 매이지 말라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지금 주어진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 지금 누리고 있는 지와 명성, 지금 내가 의존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 나 자신을 대신하거나 우리의 궁극적 희망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자체가 덧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의 형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사회적 관계, 현재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 등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서신(고린도전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5년 6월 3일 / 최형묵 목사
제56강 이렇든 저렇든 - 고린도전서 7:25~31
1. 결혼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 7:25~28
결혼관계 문제에 대해 바울은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어떤 규범을 율법주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에 권고할 만한 어떤 태도를 말하고 싶어한다. 기본적으로 바울은 종말론적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현재의 세계 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강화할 수도 있는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거리를 둘 것을 권면한다. 현재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는 그것을 말한다. 아내에게 매여 있으면 벗어날 필요가 없고, 이미 벗어나 있으면 새로 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결혼하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다. 종말에 닥칠 재난을 생각하면 그것이 짐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2. 이렇든 저렇든 - 7:29~31
바울은 그 구체적인 권면의 취지를 이 대목에서 다시 일반적인 권면 형태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아닌 듯’ 살라는 이야기다. 있는 데도 없는 듯, 하는 데도 안 하는 듯 살라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 언뜻 떠올리기에 이 말씀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마음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불교적 명상의 세계 또는 스토아 철학적 의미의 마음의 평정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것에 대해 마음으로 초연해지라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단지 관조적으로 마음 자세만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이 말씀은 전혀 종말론적 희망 또는 메시아적 희망으로서 성격을 지니지 못한다. 단지 부당한 현실을 옹호해 줄 뿐이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해탈만 추구한다면 현실은 변함없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으로 남을 뿐이다. 예컨대, 가미카제 특공대의 전사들은 선불교의 명상의식으로 마음을 평정했다. 이 때 마음의 평정은, 스스로 느끼는 평화와는 정반대로 한 인간을 극한적인 폭력의 무기로 돌변시킨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구분과 조건들을 무시하라는 데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떤 현실의 조건에 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의 조건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절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조건을 타개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모순의 상황, 갈등의 상황 에 있는 인간 상황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조건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본문에서 세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업을 포함하여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현실에서 여러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현재의 것에 매이지 말라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지금 주어진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을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 지금 누리고 있는 지와 명성, 지금 내가 의존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 나 자신을 대신하거나 우리의 궁극적 희망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자체가 덧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의 형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사회적 관계, 현재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 등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체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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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원2015-05-20 22:52'그리스도인의 내적 자유'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살림에 와서 얻은 큰 소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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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2015-05-21 09:00상당한 득도의 경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