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엇을 찾고 있느냐?” - 요한복음 1:35~5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7-09 17:17
조회
1426
2023년 7월 9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엇을 찾고 있느냐?”
본문: 요한복음 1:35~51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부르는’ 장면이 아니라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의 증언과 요한복음의 증언은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는데,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 관한 증언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성서일과의 또 하나의 본문으로 제시된 누가복음 5:1~11과 비교해볼까요?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가운데,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는 어부들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이릅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반신반의했지만, 그 말 대로 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동료들을 불러 다 걷어 올려 두 배를 채웠는데,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태를 경험하고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떠나달라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의 태도를 말합니다. 경이감을 넘어선 경외감의 표현입니다. 자신의 상식과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그 깊이를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태도입니다.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상식의 표피를 넘어 깊이의 차원에 이름으로써 진정으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제자직을 일깨워주는 장면입니다. 그 부름 앞에 제자들이 따라 나선 것도 극적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모든 소유와 조건을 버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은 어떨까요? 그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상황도 서로 부합하는 바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 서두에는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 둘과 함께 있는데, 예수께서 지나가십니다. 이를 보고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순결한 존재로서 세상 죄를 짊어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자 예수께서 되돌아서며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께서 계신 곳을 따라가 그 날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요한으로 추정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지시하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오래 전부터 기다리던 그분을 드디어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옵니다. 시몬을 만난 예수께서는 곧바로 그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아람어로 게바는 그리스어로 베드로, 곧 반석을 뜻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그 이름을 얻는 것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인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불립니다.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의 이야기와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비교해볼까요?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에 비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예수를 만나 따르는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미리 예정된 일이 착착 진행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일련의 이야기를 깊이 음미해보면 오히려 더 있을 법하면서도 더 극적인 성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감지하지 못했던 변화가 어느 시점에 극적으로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삶의 파문과 단절을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어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예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일을 보여 주고 제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로 나서기 위해 자신들의 소유까지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극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몇 가지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른 것은 예수가 아니라 증인들이었습니다. 먼저는 세례 요한, 그 다음은 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증인들이 예수의 존재를 알아보고 인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 이 증인들은 이미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만난 순간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구도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그 안드레에 의해 부름을 받은 시몬, 곧 베드로는 이미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 증인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그분의 길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들이 버려야 했던 것은 일상의 소유가 아니라 이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함축하는 바입니다. 물론 이 점은 잘 새겨야 합니다. 그릇된 방향에서 바른 방향으로 전향한 것과는 다릅니다. 세례 요한 또한 예수의 증인이었다는 점에서 그 사상적 전환은 일종의 질적 전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희미하게 알고 있던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마침내 체화하는 전환이라고 할까요? 세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를 평생 따르는 삶으로의 결단은 그런 전환을 뜻합니다.

그 전환의 성격은, 놀라운 반전을 함축하고 있는 나타나엘과 예수의 만남 장면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나타나엘은 본문말씀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장면(21:2)에서 한 번 더 등장하고 그밖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비중 있는 제자였을 것 같은데, 열두 제자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전승은 그가 바돌로매라고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이상화된 상징적인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나타나엘과 동행한 빌립이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그 소개를 들은 나타나엘은 대뜸 대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 이야기는 당시의 상식을 대변하고 있지만, 그 당사자가 듣기에 매우 민망한 이야기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알려지지 않은 매우 하찮은 동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서의 그 어떤 곳에도 나사렛이 메시아의 고향이라고 전해진 바가 없습니다. 그곳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어떤 지역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엘이 이야기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고장 출신인 예수님을 대놓고 그 말을 했다는 것은 거의 면박에 가깝습니다.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동네 촌뜨기 아니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거의 면박을 당하다시피 했는데도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의아스러운 반응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좋다. 그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식을 제대로 대변했다.’ 그런 이야기일까요? 언뜻 보기에는 그런 뜻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 다음 나타나엘의 반응을 보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말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문답 같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어떻게 알아보느냐고 반색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정해준 것을 알아차렸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것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에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옛 예언을 환기합니다(미가 4:4; 스가 3:10; 마카상 14:12 등). 평화의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상식을 대변한 나타나엘의 솔직함에 대한 칭찬이라기보다는 그를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정받은 나타나엘은 비로소 예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의 기대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일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 선언하며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차례의 반전과 비약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반전과 비약은 자신을 질시하는 나타나엘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자신을 낮춰 부른 그 사람을 인정해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했던 사람에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대는 진실한 사람이오.’ 예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멸시에 멸시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포용과 존경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반전과 비약은 두 번째 반전과 비약을 가져옵니다. 멸시의 시선을 보냈던 이가 자신이 인정받음으로써, 멸시했던 그 상대를 인정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촌뜨기, 무명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이가 선생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됩니다.
이 반전과 비약은 나사렛 사람 예수님의 삶 자체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삶, 곧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와 같이 섬김으로써 사람을 구원하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촌뜨기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기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를 인정해준 그 사람을 역시 존중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나사렛 사람 예수’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구원의 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각된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타나엘의 첫 이야기 그 자체의 의도에 있습니다. 나사렛은 멸시의 대상이라는 사실, 아니 그 어떤 대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잊혀진 존재, 아예 무시당하는 존재, 이름없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 말은 추앙받고 두드러진 존재와 대비되는 존재를 환기시킵니다. 단순히 그 대상들을 대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존재를 둘러싼 삶의 원리 자체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 대비되는 삶의 원리가 무엇일까요? 모든 일은 중앙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서울이야말로 모든 기회가 집중되어 있고 그래서 행세를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소?’ 그 소리는 ‘예루살렘이라면 모를까? 그 바닥에서 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전은 그와 같은 의식, 그와 같은 상식이 뒤집어지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의 원리의 등장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원리’가 아니라 ‘나사렛의 원리’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잊혀진 존재, 망각된 변두리에서 새 생명의 기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에서는 그 정신을 ‘주변으로부터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하기도 했습니다.
권력이 집중되면 어떻게 됩니까? 집중화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절대화되게 되어 있고, 그 절대화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합니다. 이 점에서 중앙의 논리는 독점의 원리요 따라서 배제의 원리요, 죽음의 원리입니다. 반면에 나사렛의 원리, 변두리의 논리는 공존의 원리요 포용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분명하게 깨우쳐 줍니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너를 인정했고 네가 나를 인정했으니, 이제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 예수께서 던진 물음은 나사렛 예수 그 자신에게 답이 있습니다.

잊혀진 존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너를 인정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인정받는 길이며 새로운 인간관계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길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