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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새끼 송아지나 새 책이나 설렘은 같습니다”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0-03-22 23:22
조회
2262
“새끼 송아지나 새 책이나 설렘은 같습니다”  

1인 출판으로 지식의 논밭 일구는 농부 박영기씨    


천안신문 | 기사입력 : 2010-03-22 09:34:55 | 기사수정 : 2010-03-22 09: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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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과 오늘 오전에도 제 손으로 직접 새끼 송아지를 받았습니다.”


풍서천이 벌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풍세면 두남리의 강정골. 고향인 이곳에서 박영기(41)씨는 부모님과 목장을 운영하며 젖소와 한우를 키우고 있다. 젖소 50마리와 한우 10마리를 돌보며 틈틈이 논밭일도 하는 탓에 영기씨의 하루는 새벽 5시30분에 기상해도 늘 하루해가 짧다.


어제, 오늘처럼 송아지 출산이라도 있는 날이면 긴장이 배가되어 이면 평소보다 더욱 녹초가 된다. 하지만 영기씨에게는 피곤을 핑계로 미룰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책 만드는 일’이다.


미국 유학생이 농투성이로 변신


요즘은 1년이면 새끼 송아지만 10마리를 받는 능숙한 그이지만 몇 해 전만 해도 갓 태어난 송아지에 손도 못 대는 초보 축산농이었다. 귀국 후 부모님을 도와 처음 축산일을 거들기 시작한 것이 2002년 무렵의 일.


세기말을 통과하던 시점인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그는 미국에 머물렀다. 미국에서 선진축산영농법이라도 배우고 있었던 것일까. 공부를 한 것은 맞지만 분야는 전혀 달랐다. 미국의 대학원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했다.


386세대의 말석 학번인 90학번으로 대학에 진학한 영기씨. 전공과는 법학이었지만 관심은 현실정치와 학생운동에 쏠렸다. 학생운동조직에서 활동하다가 구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목격했다. 정치와 사회의 간극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고 대학 졸업 뒤 한국의 대학원에 진학해 1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이왕 할 거라면 본격적으로 공부길에 나서 보자는 결심에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유학 생활이 쉬웠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IMF 경제환란을 겪으면서 환율까지 폭등해 생활비나 학비 마련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정치철학 등 인문학 분야는 적어도 10년은 집중해서 한 우물을 파야 성과가 나옵니다. 그럴 여건은 못 되고 부모님에게 짐 지우는 것도 더 이상은 죄송해 ‘돌아가자’ 마음 먹었죠.”


귀국 후 몇 해 동안은 고향마을 이름을 딴 ‘강정 목장’일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밤 늦도록 농장과 논, 밭을 오가는 고된 일상을 반복했다. 목장과 농사일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저만치 미뤄둔 욕망이 슬금슬금 잠을 깨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8년 2월 마침내 일을 벌였다.


'1인 출판'으로 첫 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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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기씨는 2008년 2월 출판사 설립을 등록했다. 출판사 이름은 ‘논밭’으로 정했다. 누구는 ‘논쟁의 밭’이냐고 심오한 해석을 내 놓았지만 삶터가 논밭인 것에 착안해 대수롭지 않게 지은 이름이었다.


출판사 등록 뒤 4월에는 대행사를 통해 외국 서적 한 권의 저작권도 확보했다. 본인이 직접 번역에 착수해 9월쯤 1차 번역 원고를 완성했다. 통상 저작권의 유효 기간은 2년. 2년동안 책을 출판하지 않으면 해당 책의 저작권은 자연 소멸된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교정을 보자는 게으름에 자칫하면 책도 펴내지 못하고 저작권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도래했다. 서둘러 편집을 외부에 맡겨 2010년 2월 18일 논밭출판사의 첫 책 인쇄를 시작했다. 일주일 뒤 초판으로 찍은 5백권의 책이 여러 상자에 담겨 집으로 배달됐다.


“기대 속에 상자를 풀어 첫 책을 꺼내는 순간은 흡사 갓 태어난 새끼 송아지를 받는 것과 같은 설렘이었습니다. 편집이야 외부에 맡겼어도 저작권 계약부터 번역, 교정까지 제가 도맡아 했으니 감동이 더했죠.”


흥분 뒤에는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1권당 정가가 1만8000원인 이 책들을 모두 팔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5백권이 마치 5천권처럼 여겨졌다. 판로 개척을 위해 대형 온라인 서점의 문을 두드렸지만 전문배송업체와 계약하지 않으면 책 판매를 대행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번역비는 제외해도 저작권료와 편집료, 인쇄료 등으로 첫 책 출간에만 순전히 600여만원이 쓰였습니다. 서점 등에서 주문이 오면 제가 근처의 우체국에 나가 발송합니다. 택배비와 서점의 지불금 등을 빼고나면 책을 다 팔아도 적자를 면하기 어렵죠.”


농사나 출판이나 세상에 보탬되기는 같아


밤잠을 아껴 번역에 매달리고 적자가 훤히 예상됨에도 수백만원의 자비를 들여 박영기씨가 출판한 책은 신학자 로랜드 보어의 2007년 근작인 『성서와 대안좌파』.


『성서와 대안좌파』는 보수적인 정치.종교 그룹들의 전유물이 된 성서를 종교좌파와 세속좌파가 연대해 성서의 해방적 읽기와 적용을 복원하자는 저자의 주장이 도발적이면서도 힘 있는 글들로 실려 있다. 영기씨는 기독교를 비롯해 종교의 보수화 경향이 이미 적정한 도를 넘어선 한국 사회에 꼭 맞춤한 책이라고 말했다.


“성서는 종교우파들의 전유물로 남겨두기엔 너무도 중요하고 다양한 의미를 가진 텍스트입니다. 성서를 가지고부와 특권에 대해 옹호하고, 온갖 종류의 억압과 제국의 전쟁이나 정복에 대해 정당화하는 것과 같은 성서의 오용과 극우적 이용을 폭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방의 편에 서려면 성서를 혁명적으로 읽는 전통을 복원해야 합니다.”


첫 출간 책이 종교 관련 서적인 점에는 신앙적 배경도 한몫했다. 중학교 2학년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에서 새벽이면 울리는 산 너머 교회 종소리로 눈을 떴다. 초등생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찾았다. 지금도 작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논밭출판사의 두 번째 책도 종교 관련 책이다. 『사도바울과 현대 철학자들』로 슬라보예 지젝 외 여러 명의 저자가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성서와 대안좌파』처럼 종교를 말하지만 실상은 정치와 사회, 역사를 다룬다. 영기씨와 더불어 몇몇이서 번역을 진행중이다.


두 번째 책도 흑자를 기대하기는 무리가 아니냐는 질문에 올해 2월 창업농업경영인(예전 농업후계자)으로 지정된 그는 “좋은 책의 출판만으로도 의미가 값지다”고 말했다.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 것과 출판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돈’만을 떠 올려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들이죠. 더디가더라도 세상에 보탬되는 농사처럼, 세상에 보탬되는 책들을 오랫동안 펴내고 싶습니다. 나중에는 ‘논밭’이라는 출판사 이름에 어울리는 괜찮은 농사 책도 꼭 만들고 싶네요.”


[윤평호 기자 sisa-yp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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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5
  • 2010-03-23 00:12
    윤평호 기자의 글 중, 참 잘 쓴 기사네요.

    소재가 좋아서 그런갑다~~~^^

  • 2010-03-23 08:45
    윤 기자 사진도 내 사진 찍을때보다 훨씬 낫네요.

    그건 인물이 좋아서 그런갑다.^^

  • 2010-03-23 15:07
    좋네요.

  • 2010-03-23 23:57
    그나저나..웃는 표정도 이젠 완전히 소(牛)일쎄 그려.....ㅎㅎ

  • 2010-03-24 00:39
    저도 이 책 한권 주문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