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 고린도후서 6:1~1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2-18 15:04
조회
8951
2018년 2월 18(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본문: 고린도후서 6:1~10



오늘도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성서일과를 따르다 보니 근래에 계속해서 고린도전후서의 본문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기억에 한계가 있기에 자주 대한다 해서 고스란히 그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제시된 본문말씀 자체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고 각기 다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기대로 말씀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를 계속 대하는 만큼, 이쯤 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게 된 배경을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서신’은 그 발신자와 수신자가 명백한 만큼 무척 생생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 청중이나 독자의 범위가 분명합니다. 어떤 일반적 교훈서나 교리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공유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런 만큼 하나하나의 주장이 어떤 구체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우리가 조금 더 깊게 알게 되면, 당연히 서신서에 담긴 내용을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는 서신은 본래 4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가운데 두 번째 서신과 네 번째 서신이 남아 오늘날 고린도전후서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이 그렇듯 고린도서 역시 하나의 교의적 체계를 설파한 것은 아니고 구체적인 공동체의 상황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구체적인 문제 상황에 대한 해법을 찾으면서 그 나름의 신학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 신학적 입장은 문제의 상황을 접하기 이전부터 이미 확립된 것도 있으나 많은 부분 문제의 상황에 대처하면서 첨예화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서는 매우 첨예한 쟁점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교회 상황의 복잡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크게 세 가지 문제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분파간의 갈등이었습니다(1:12). 그것은 특정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공동체서 구성원들이 나눠지고 갈등을 겪은 상황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기존의 성적 역할의 혼란 상황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예언이나 방언 등 특별한 은사를 받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가족적 질서에 순응하기보다는 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주인과 노예,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보다 더 세부적인 갈등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그 갈등의 상황 가운데서도 첫 번째 갈등, 곧 분파간의 갈등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더 특정해서 말하면, 그 상황을 거시적 배경으로 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모욕을 당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누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있으면, 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지 않고 말하면, 어느 정도는 여러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2:5~7)
이 증언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한 일이 있었지만, 그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장 6절 이하의 증언을 보면, 그 문제의 당사자가 돌이켰을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공동체 전체가 그 문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뉘우쳐 사도 바울을 열렬히 변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어간에 사도 바울은 아마도 격한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 전한 소식은 그처럼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이 포함된 고린도후서는 그 기쁜 소식을 듣고 난 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듣고 난 후라 사도 바울은 더욱 자신 있게 자신의 진심을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어떤 사심이 아니라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참 착잡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자신을 변호해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특이한 점은, 그 어떤 세속적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존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사의 형식으로 보자면,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어법도 이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진정성이 없어 보이지 않나요? 오늘날 그 어법은 너무 식상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가 나오면 오히려 귀담아 듣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갖 세속적 권위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그 말과 삶이 괴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서 정말 특이한 점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그의 주장이 그의 삶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생애를 공유한 적이 없고 심지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한 때 박해하기까지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 어떤 다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의 삶 자체로 진정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6:3-8a)
이 고백은 사도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일행은 남들이 보기에 즐거울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와 그 일행은 한결 같았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그 어떤 영화를 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사도와 그 일행은 자신있게 그 일을 감당하는 자신들의 자긍심을 내세울 수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10)
놀라운 역설의 진실입니다. 도대체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요? 궤변이요 기만일까요?
진실을 입증하는 데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연역, 귀납, 변증이 그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등장하면서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됩니다. 역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딸들을 둔 어머니가 딸들에게 어떤 물건을 사주려 할 때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그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주장대로 물건을 사는 것이 연역법이요, 딸들의 의견을 들어 물건을 사는 것이 귀납법이요, 어머니와 딸들이 의논해서 물건을 사는 것이 변증법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가 역설입니다. 원래 헬라어에서 Paradox는 두 의견이 대립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있는 상태입니다. 상식적인 논리로 역설은 진실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결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매듭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역설을 진실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논리로 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까지 버림받은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 죽어야 산다는 고백,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역설입니다. 이 역설은 기독교 신앙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미 소크라테스가 진실을 설파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았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것이 삶의 진실입니다.
역설은 모든 상식적 논리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며, 그 상황을 말하기도 합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의 진실을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신비입니다. 무한한 대립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바꿔 말하면, 역설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든 어설픈 결론을 내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뻔히 예견되어 있는 결론을 기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판단하기를 중지하는 태도가 아니라 끝까지 진실을 위해 달려가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립보 3:12) 그 신비한 경지를 향해 달려가는 삶,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고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매이거나 의탁하지 않고 궁극적인 것을 향해 달려가는 삶입니다. 끝내 그 궁극에 도달하리라는 믿음, 그렇게 구원에 이르리라는 믿음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믿음이,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예컨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돌고 도는 인생에게는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쳇바퀴에서 탈출하면 무한한 길이 열립니다. 뻔히 예견된 일상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답답해지고 심드렁해집니다. 아직 알지 못하지만 뭔가 기대되는 일이 있어야 즐겁지 않습니까? 지금 동계올림픽이 한창입니다만, 어째서 스포츠 경기에 빠져들까요? 단순히 승패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그 결과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한계가 빤히 다 들여다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면 넓고 깊은 바다 같다고 할까요?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늘 기대가 되고 설레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뒤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옹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색한 것입니다. ...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12-13) 사도 바울은 교회 밖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로부터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부질없는 사람으로, 사서 고생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여러분이 마음을 넓히면 내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누가 봐도 뻔한 그런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누가 봐도 쉽게 속단할 수 없는 그렇게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마음 자세입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선한 뜻,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단체들도 있습니다. 그 선한 사람들,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단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굳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고 굳이 교회 공동체를 일구어야 하는 사연이 과연 무엇일까요? 전혀 새로운 세계,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구원을 기대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지금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초월하는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 안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존재합니다. 출신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만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근거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어렴풋하게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 한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진정한 구원자라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순절 절기에 그 신앙의 신비를 깊이 체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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