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한 톨의 겨자씨에서 - 마가복음 4:30-32[유영상 전도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8-03-11 16:46
조회
8848
2018년 3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한 톨의 겨자씨에서
본문: 마가복음 4:30-32
유영상 전도사



오늘 이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망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땅에 심어지기 전에는 어떠한 씨보다도 작다고 합니다. 하지만 땅에 심어지면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를 뻗어 새들이 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그늘을 만든다고 합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욥기 8장7절의 말씀이 재산을 풍성하게 불려준다는 의미로 오용되고 있듯이 오늘 본문 말씀을 적혀있는 그대로 읽고 표면적으로 해석한다면, 비슷한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사적인 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적 재산의 부흥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평등한 사회의 실현이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천당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우리의 발자국이 맞대어져 있는 바로 이 땅, 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현세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성서, 그리고 그 당시 사회적 문화와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농민들, 민중들은 가난 때문에 매우 힘겨워 했습니다. 이 가난은 로마제국의 과도한 조세제도 때문이었습니다. 강압적인 조세 부담과 더불어 재산의 강제 압류는 농민들의 자급 가능성을 더욱 축소시켰고, 그 결과 소농들은 자기 땅을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소농들이 땅을 빼앗기고 부채를 떠안게 된 상황은 로마 식민지 사회사의 특색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농민들과 민중들은 희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니 어렵다 못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랍비의 구전을 집대성한 미쉬나에 따르면 헤롯 통치기의 유대 채권법에는 힐렐이라는 랍비가 ‘프로스볼’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이 제도는 ‘사면의 해’가 지나도 채무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안식년이 지나면 모든 부채를 탕감하라는 신명기 15장1절 이하 규정과는 정반대의 규정입니다. 이 제도는 신명기 15장1절 이하 규정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제도에 대한 대안적 방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도로 하여금 부자들의 이익은 더욱 많이 창출되었으며, 반대로 빚을 탕감하지 못한 민중들은 더욱 극심한 빈곤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나사렛과 같은 농촌 지역에서는 봉기가 자주 일어났고, 봉기가 일어날 때면 로마제국은 그들을 전멸 시켰습니다. 바로 이런 동네에서 예수님께서 성장하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성장한 당시 나사렛 갈릴래아 동네에는 이러한 로마제국의 살육의 참상이 온 동네에 트라우마로 남아 몇 세대까지 구전으로 전해졌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로마제국을 향한 분개와 두려움과 함께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생계를 뒤흔드는, 아니 몰살시키려는 제국의 지배를 종결시키기 위해, 농민들에게 과도한 조세를 부과하는 것과 농민을 착취하는 폭력에 저항했습니다.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소농들의 권리 회복과 더불어 나사렛 민중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권리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운동의 방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가장 근본적 정신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민중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나눔과 연대의 근본적인 계약 원칙들을 상기시킵니다. ‘서로 도와가며 살아라, 통치자들로부터 강탈당한 우리의 토지와 돈을 되찾기 위해 함께 연대하자’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즉 아가페(agape)입니다. 우리가 줄곧 들어왔던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태동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그저 이웃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슬퍼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실천하는 정의,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연대의 정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했고, 오천 명을 먹였고, 귀신을 내쫓은 것처럼 ‘사랑’은 예수운동, 즉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춧돌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로마제국이라는 큰 우상을 직면했었습니다. 이에 맞서, 예수님은 사람답게 살 권리가 보장 된 나라, 또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부정하려는 제국의 논리에 대항하는 대안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열망했습니다. 그 당시 통념으로는 로마 제국에 복종해 고분고분 잘 사는 게 복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국의 살육에 침묵하는 것이 이득이었고, 이웃의 파산을 보고 냉소하는 것이 이익이었습니다. 로마황제를 구세주라 불리는 것이 정의였고, 로마황제의 치하가 복음이었고, 로마황제가 곧 진리였습니다. 그 당시 이러한 통념에 대항하여 바울은 ‘오히려 예수님이 진리요 복음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예수님. 우리의 구세주, 복음, 진리이신 예수님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어두운 그림자로 모든 빛을 덮으려는 우상! 로마제국과 맞섭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같이 ‘예수님이 진리요 복음이요 구세주다.’ 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2018년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예수의 복음을 가리고, 어둠을 즐겨하고, 침묵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남성 우월주의라 진단하고 싶습니다. 사실 남성 우월주의라는 우상은 오늘날에 태동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창조됐을 때부터 있었던 우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서 저항해야하고 오늘날 무조건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 생각하기에 남성 우월주의를 오늘날의 우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뒤늦게 여성들의 목소리를 발견했습니다. 수없이 외쳤지만, 수천 년간 외쳤지만 이제야 좀 반응을 합니다. 이 반응이 동감이 아니라 ‘불편’이라는 것은 비관적이지만 그래도 들려지긴 하고 있습니다. 요즘 #metoo운동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 아프고 충격적인 건 이 피해사례들이 주로 시간이 지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주로 사람들은 왜 이제 와서 고발하는가, 지금까지 잘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공론화 하는 걸 보니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냉소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결코 냉소할 수 없습니다. 수년간 그 피해의 기억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 신고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신고한다 해도 그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생각, 신고를 한다면 오히려 나에게 돌아올 피해가 더 커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등에 우리는 분노해야합니다. 그들을 숨게 한 것은 사회적 공동책임이 큽니다. 그들이 그동안 겪어야 했던 수많은 피해와 트라우마를 남성들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metoo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나라한 남성들의 한계, 본모습입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신학과 내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여성혐오, 남초 현상, 남성 우월주의 문화가 당연시 되어 왔습니다. 아니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혐오 발언이 강의실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며, 학교식당에서도 역시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온탕인 줄 알고 발을 담궜는데 냉탕이었던 것과 같이 지성이 숨 쉬어야 할 곳에 폭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극복해야 합니다. 전쟁과 여성혐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남성 우월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청년의 과제이며 숙명입니다.

고등졸업-대학입학 선물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페미니즘 도서를 선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운동이 아니라, 모두의 운동입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야 하는 예수운동입니다. 우리 이제 스무살이 된 청년부 신입교우분들이 평등을 지향하고, 혐오는 지양하는 청년이 되길 소망합니다.

작년이었습니다. 예수님 사랑에 대한 어린이부 설교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나는 여자인데 어떻게 할 수 있나요.’라고 비관적으로 말했고, 그 말에 많은 친구들이 동의했습니다. 한창 꿈을 꿀 나이에 허구적인 성별의 한계에 자신을 가두고 있었습니다. 꿈이 풍성하고, 훗날 청년이 돼 그 꿈을 이루어 나갈 친구들이 말입니다. 남성 우월주의라는 우상은 이처럼 어린이들의 꿈의 이정표에 여성혐오라는 푯말을 박고,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나도 남성인데 이 강단에 서서 페미니즘을 말한다는 것이 ‘과연 나에게 떳떳한 것이며, 내 말에 권위가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이전의 ‘저’를 알기에 한없이 부끄러우며 성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남성은 끝없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남성 우월주의 문화에 해택을 받고 있었던 남성들의 의무입니다. 성찰해야만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로 걸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저희는 예수님의 사랑의 의미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실천하는 정의,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정의입니다. 남성 우월주의라는 우상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실천하는 정의,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연대의 정의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열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비유의 의도를 심층적으로 알아보고자 지중해 지역의 겨자 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저술가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Natural Histor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겨자는 쏘는 듯 한 맛과 얼얼한 효과로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이 식물은 이식함으로써 개량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야생으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뿌리고 나면 땅에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싹이 나기 때문이다.’ 이렇듯 겨자는 밭을 망쳐 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겨자 풀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곳을 점령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십상이라는 점, 그리고 특히 새들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경작지 안으로 새들을 끌어 들이기가 쉽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말해 줍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위험한 특성과 쏘는 맛을 가진 겨자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이 커지는 연대, 그로 인한 로마제국의 전복.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이 커지는 #metoo운동. 그로 인한 남성 우월주의의 전복.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 들어와 개혁을 시도하려는 페미니스트들. 우리는 평등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대하여 평등이 실현된 정의로운 사회를 우리의 신앙으로, 지성으로 갈망하며 겨자씨와 같이 자라나길 천안살림교회 온교우 여러분들께 축원합니다. 이미 씨는 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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