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사건, 그 이후 - 에베소서 1:3~14 [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5-27 17:50
조회
15018
2018년 5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사건, 그 이후
본문: 에베소서 1:3~14



지난 주일 오후 청년들과의 즐거운 대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안병무 선생의 <갈릴래아의 예수>를 몇 주에 걸쳐 공부한 다음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 흥미진진한 물음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성서에 삼위일체론이 있습니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자리를 함께 했던 청년들은 기억하십니까? 제가 어떤 취지로 답을 했는지요. 저의 답의 취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말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결된 형태로 삼위일체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굳이 하나님을 삼위(三位)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성서에는 하나님을 더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표상들이 등장한다. 삼위일체론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어떤 관계를 통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략 이런 취지로 답했습니다.

왜 이 이야기부터 꺼내고 있을까요? 사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의 본문말씀이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되는 본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른바 ‘예정론’의 근거가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선택받은 자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교리의 근거가 되는 본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와 더불어 바울의 제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서신서입니다. 만일 서신서에 기록된 대로 바울이 에베소의 감옥에 갇혔을 때 직접 썼다면 60~63년 어간이 그 저작시기가 되겠지만, 내용상 반영되어 있는 상황으로 보아 제자가 쓴 것이 확실하다면 100년 전후가 그 기록연대일 것입니다. 바울의 친서들과 상당히 다른 점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대에 기록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이른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찰이란 사건이 벌어진 이후 사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사건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의미를 통찰하는 과정이 이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병무 선생은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성서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요? 구약과 신약을 나눠 각각 하나씩 꼽으면 뭘까요?
구약에서 보자면 그것은 ‘출애굽사건’입니다. 이집트 대제국 안에서 억눌린 노예로서 삶을 살던 히브리인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해방시킨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약에서 보자면 그 사건은 ‘예수 사건’입니다. 왜 ‘예수의 언행’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예수의 삶과 죽음이 하나의 중대한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청년들과 더불어 공부하면서 그 ‘사건’의 의미를 말했지만, 다시 환기하자면, 단지 인간을 사랑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을 뿐인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바로 그 사건으로부터 신약성서의 세계가 형성되었고, 그로부터 구약까지도 재해석할 수 있는 안목이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 또한 당연히 바로 그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오늘 본문말씀은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함축하는 교리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전거가 되는 본문입니다. 이른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선택받은 자의 구원의 예정에 관한 교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전거가 되는 본문입니다. 좀 더 부연해서 말하자면, 이 본문말씀이 ‘삼위일체론’을 말하고 설파하고 있고, 이른바 ‘선택 예정론’을 설파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훗날 그와 같은 교리를 형성하는 데 실마리가 되는 중요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어긋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어떤 진실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 그것이 항구불변하는 진리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리적 문구 그 자체에 매이기보다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교리적 진술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핵심적 실체가 하나의 근본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어떤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예수 사건’,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충격과 감동에서 사람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삶을 실천한 예수께서 십자가의 극형을 당해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온전한 사랑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펼쳐 보인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끊임없이 그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 말씀과 같은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 요체가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장차 성령의 보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오늘 본문말씀은 보다 구체적인 몇 가지 내용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선택(4절), 둘째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심(5~8상반절), 셋째 자녀로서 상속받을 몫(8하반절~12절), 넷째 성령의 보증(13~14절)이 그 내용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했다는 내용을 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선택은 적극적인 의미로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택의 반대가 되는 배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는 내용을 볼까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도 부정적인 그 어떤 내용도 없습니다. 자녀로 삼았다는 말은 선택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 이라는 말 대신에 ‘아버지’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의 뜻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정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 예정의 내용은 점차적으로 구체성을 갖습니다. 구원하기로 했고, 자녀로 삼기로 했고, 그러니 상속자로 삼으신 것이라고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넷째 그 모든 예정은 성령의 보증으로 확고해집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합니다.” 더 이상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현실에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어떤 의미로든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야기하는 그 어떤 내용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말할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 사건,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깨달은 진실의 요체입니다.
‘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진정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이 있다’는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 믿음은 한편으로 구체성을 띠고 있고 한편으로 더더욱 심원해집니다.
에베소서의 이어지는 말씀 내용들을 볼 것 같으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합니다. 현실의 구체적인 삶의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적대의 소멸을 뜻합니다. 그 사건은 지상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우주적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나온 대로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적 차원에서 실감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참 생명의 길을 따를 때 이 우주적 생명이 진정으로 온전해지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통해 우주적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한국 현대사에서 재야 민주화운동의 선구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정신적 기초를 닦은 신앙의 선구 장공 김재준 목사는 “생명ㆍ평화ㆍ정의”라는 말로 기독교적 가치를 집약한 바 있습니다.
맨 첫머리를 장식하는 ‘생명’은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궁극적 지향점에 해당합니다. 장공은 일찍부터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를 대신한 말로써 사용해 왔고, ‘생명’은 그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단적으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생명의 본성을 함축합니다. ‘평화’는 온전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를 한층 구체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밀쳐냄으로써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당기고 싸안음으로써 생명이 온전히 존속하도록 하는 조건, 그것이 평화입니다. ‘정의’는 평화로운 생명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말합니다. 정의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모든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 상대의 몫에 대한 공정한 인정이 정의의 요체입니다.
하늘이 땅에 내려와 땅을 하늘의 영광으로 감싸주는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요체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땅에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몫을 그 역순으로 일깨워줍니다.
이 대목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뜻은, 한 사건에 대한 체험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통찰이 이렇게 놀라운 정신세계, 삶의 윤리로 승화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환기하고자 함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몇 주간 저는, 이번 주간에 있는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심포지움을 준비하느라 문익환 목사의 저작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과연 생명의 큰 바다라고 할까요? 그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출어람이라고, 스승 김재준 목사의 정신세계보다 훨씬 풍요로운 정신세계에 새삼 감동했습니다. 저는 그 정신세계의 얼개를 “사랑ㆍ정의ㆍ평화ㆍ생명”으로 집약해봤습니다.
많은 이야기 가운데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문익환 목사는 그저 안일한 종교적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다면 “깨끗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단념”하도록 촉구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일러 “우리의 아성이 증축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아성이 무너져 가는 곳”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 새 창조의 역사가 찬란하게 이뤄져가는 곳”이라 선포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신앙의 중독증을 일으켜서 고요히 저 세상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가 하면, “하느님께 찡얼거리다 겨우 천당에나 들어가는 죽은 교인이 아니라 팽팽하게 근육에 차 넘치는 도덕력과 초롱불처럼 빛나는 창조적인 눈을 가진 교인이 왁자한 교회, 숨을 마시는 만큼 내쉬는 산 교회로 한국의 교회도 체질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형상’ 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살리는 교회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쩨쩨하게 어떤 교리에 죽고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교리는 우리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는 초보적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사건의 진실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그렇게 깨달은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심원한 통찰이 아직 실감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의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늘 우리에게 현존하시는 이로서 성령을 믿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까?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능히 물리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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